남도기행 /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떠올리며 남도를 가다
1.젓갈에서 남도(南道)의 향기를 맡다
열하일기는1780년 연암 박지원이 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에 가면서 보고, 듣고 교류한 것을 기록한 연행록이다. 그의 연행록은 단순히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에서 벋어나, 청나라의 문물을 접하며 조선의 현실문제를 객관적으로 비춰보고 개혁의 방향과 방법을 논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여행은 목적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필자는 연암과 같은 여행을 꿈꾼다.
지난 연말 우리고장의 문화를 생각하는 몇몇 지인들에게 남도여행을 제안했다. 남도의 멋과 맛을 여행하면서 평택지방의 문화를 생각해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시립도서관 김용래 관장을 포함하여 다섯 명으로 팀이 꾸려졌다. 필자는 남도답사일번지로 알려진 해남, 강진, 순천으로 여행일정을 잡았다. 늘 바쁘게 생활하는 문화원 박성복 사무국장의 일정으로 금요일 저녁 여섯시가 넘어서야 길을 떠났다. 캄캄한 호남평야를 달려 목포에서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니 영암과 해남이다. 밤 열한시가 넘었지만 숙소로 들어가기에는 여행의 설렘이 너무 강했다. 간단하게 한 잔 하자고 들어간 곳은 남도의 멋과 거리가 있는 주몽식당. 주모에게 해물탕과 낚지 반 접시에 덤으로 젓갈과 매생이 국을 시켰다. 기대처럼(?) 해물탕은 그저 그랬지만 덤으로 나온 밴댕이젓, 꼴뚜기젓과 매생이국은 몽롱한 정신을 확 깨웠다. 매생이는 김이나 파래와 함께 겨울철에 생산되는 대표적인 해초다. 김양식을 하였던 필자의 고향에서도 많이 생산되었는데, 김양식장에서 자라는 잡초쯤으로 여겨 버리거나 된장국에나 넣어먹던 천덕꾸러기였다. 그랬던 것이 남도의 특산음식이면서 건강에도 좋은 웰빙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요즘에는 김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다. 젓갈이 식탁에 오르자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장순범씨. 여행 내내 젓갈왕으로 불렸던 장씨는 좀 짰던지 밥 한 그릇을 시켰다. 젓갈은 물에 말아먹어야 제격이라는 것이다. 입맛이 짠 것은 일행도 마찬가지여서 순식간에 서너 그릇의 밥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2.해남 유선여관은 아직도 건재하다
대흥사 앞 유선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유선여관은 40여 년의 역사, 전통한옥, 깔끔한 밥상, 등산 안내견으로 유명한 누렁이 그리고 영화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 천년학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여관문을 들어섰다. 기다리다 막 잠이 들었다는 주인장은 밤늦은 손님을 타박하지도 않고 방으로 안내했다. 유선여관은 전통한옥의 멋을 유지하면서도 숙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 점이 눈에 띄었다. 여름철 방문을 열어 놓고 밥을 먹으면 좋은 것 같은 앞마루, 늦은 밤 달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인 툇마루, 두륜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시냇물이 뒤 켠,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과 병풍, 방 앞에 걸려 있는 당호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전통이 오랜 생명력을 간직하려면 유선여관에서 배워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른 아침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대흥사에 올랐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의 유언에 따라 발우와 금란가사를 모시면서 거찰로 성장하였다. 그 뒤로도 19세기의 고승 혜장과 초의가 주석하면서 더욱 빛났다. 가문이나 사회가 빛나려면 뛰어난 인물과 시대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사상이 필요하다.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와 초의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절 경내에는 서산대사의 사당과 함께 조선후기 다도(茶道)문화를 부흥시킨 초의선사의 시비(詩碑) ‘동다송’이 서 있다. 우리 일행은 경내의 찻집 ‘동다실’에서 차를 나눠 마신 뒤 발걸음을 돌렸다.
평택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민세 안재홍 고택이라면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이 있다. 녹은당은 15세기에 처음 지어졌고, 윤선도가 효종의 사부(師父)로 하사받은 과천 집의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 지으면서 유명해졌다. 녹우당이 배출한 인물로는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지은 윤선도와 정선,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 3재로 이름을 날린 공재 윤두서가 있다. 그래서인지 고택 옆의 기념관에는 온통 윤선도와 윤두서의 흔적들, 그들이 학문하며 읽은 서책들로 가득하다. 저작들도 한 권 없이 사진 몇 장으로 내부를 채우고 있는 안재홍 고택과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3.아지매, 참 꼬막 있어라!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은 동행한 양용동 기자의 고향이다. 불과 몇 백 미터 차이인데도 경계에 들어서자 양기자의 말 수가 부쩍 많아진다. 실학사상가 정약용의 삶에서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은 특별한 것이었다. 주변의 홀대를 받으며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집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저작 가운데 대표작인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가 이곳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는 다산초당에서 우리고장의 문화정책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의 관광에 대한 좀 더 넓은 안목이 있었다면 귤동마을 앞 구강포를 간척하기 보다는 수 백 만평 갈대밭과 갯벌을 이용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했을 것이라든가, 초당인데도 기와집으로 복원하여 생뚱맞은 느낌을 주지 말고 초가집으로 했어야 한다는 것, 고장의 인물을 선양할 때 출생자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이라는 것 등.
남녘교회 방문은 잊은 수 없는 추억이었다. 남녘교회는 ‘참꽃 피는 마을’ ‘종소리’와 같은 수필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고, ‘여행자의 노래1, 2’를 만든 음악가이며 여행가로도 유명한 임의진 목사가 목회하였던 교회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민중들을 보듬으려 애썼고, 종교 간의 벽을 허물어 모두 하나가 되는 참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던 몽상가였다. 이십 평 남짓한 교회 내부에는 ‘남녘’이라고 쓰인 북과 예배의 시작과 끝을 알렸던 징이 덩그란히 놓여 있고, 주인이 떠나버린 강대상에는 새로 부임한 목사님의 흔적인 듯 엄숙한 휘장이 내려 있다.
강진에서 2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장흥을 지나 보성에 이른다. 일찍이 보성차를 폄하하는 이야기를 귀 따갑게 들었던지라 ‘보성차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벌교로 들어섰다. 해방직후에는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마라’고 충고를 들었던 벌교. 허지만 지금의 벌교는 주먹보다도 ‘꼬막’이 유명하다. 근래에 벌교꼬막을 유명하게 한 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빨치산 남편을 두었던 외서댁에게 치근덕거리던 청년단장 염상구의 질펀한 비유에 전국의 독자들이 벌교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꼬막이 제철이다. 아낙들은 겨울철 널빤지와 바구니를 끼고 순천만 갯벌에 나가 한쪽 무릎으로 널빤지를 밀면서 꼬막을 잡는다. 꼬막은 참꼬막과 새꼬막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도시에서 맛보는 것 대부분은 새꼬막이다. 벌교에서 꼬막으로 유명한 집은 벌교꼬막식당이다. 식당 입구에는 겨울 꼬막을 맛보려는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일행은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는 양기자의 꼬드김에 떠밀려 벌교시장으로 갔다. 시장에는 시중에서 1만 2천원한다는 꼬막이 6천원에 불과하다. 꼬막 4킬로와 새조개 1만원어치를 사서 근처 식당에 삶아달라고 부탁했다. 뜨거운 불에 살짝 데친 꼬막은 짭짤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과연 명불허전이다.
4.전통식당의 남도 한정식
벌교 꼬막과 새조개로 배를 채우고 낙안읍성에 여장을 풀었다. 낙안은 삼국시대 이후 남해안의 큰 고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변고을을 관장하고 왜구를 방어하던 군사적 요충이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순천에 편입된 뒤로는 중심지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읍성(邑城)은 조선 초 토성으로 축조하였던 것을 나중에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다시 쌓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인조, 효종 때의 명장 임경업이다.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때의 인연으로 성 안에 선정비가 세워졌고 현재도 주민들에 의해 수호신으로 받들어진다. 민속마을은 1983년부터 조성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에 따른 변화는 낙안읍성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을이 보존되기 어려웠다. 그러자 관청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유적보존방향을 논의한 결과 유적을 보존하되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여 주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방침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인들 중에 외지인이 없고, 역할분담이 분명하며, 마을의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내부시설은 현대의 편리함을 갖춘 조화로운 마을이 되었다.
낙안읍성에서 승주방향으로 15㎞를 달리면 선암사다. 신라 말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선암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정도량이다. 정유재란과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 크게 불에 타는 바람에 지금은 20여 동의 건물만 남아 있지만 전성기에는 8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선암사에서는 사찰과 관청의 문화재에 대한 철학, 자연공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승용차가 드나들 수 없는 긴 진입로와 새로 난 오솔길에서는 조금 불편해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려는 스님들의 마음이 읽혀지며, 작년 말 신축된 전통야생차체험관에서는 경관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관청의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남도여행의 화룡점정은 음식으로 하였다. 음식문화는 생산활동과 직결되며, 사회구조나 철학과도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진의 훌륭한 전통음식점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담양의 전통식당이었다. 전통식당 음식의 가장 큰 강점은 감칠맛 나는 장맛이다. 음식은 장맛이 결정한다는 격언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집이라는 말이다. 방안에 앉아 10여 분 노닥거리는데 수 십 가지 음식이 교자상 두 개에 가득 담겨 들어온다. 상이 들어오자 술 한 잔을 해야 한다며 왁자지껄하던 좌중이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토란탕, 청국장, 홍어삼합을 비롯하여 네댓 가지가 넘는 장아찌, 성게알젓, 갈치속젓으로 이어지는 젓갈류, 홍어찜, 굴비와 같은 생선류 등 40가지가 넘는 반찬은 배부른 사람의 손에서도 숟가락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음식상을 물리는데 포만감과 함께 아쉬움이 밀려든다. ‘평택에도 이런 식당 하나 만들면 안 될까!’ 전통은 계승에도 가치가 있지만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는데... (20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