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連帶)의 힘
-영화 ‘런던 프라이드’를 보다
얼마 전 교회 남선교회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녁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 ‘동성애자’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근래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성애차별금지법’에 대한 비판이었다. 동성애차별금지법이란 성적 취향이나 조건 때문에 취업, 승진, 거주이전, 진학 등 각종 사회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법률을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성애법에 반대 의견을 밝혔다. 근자에는 강력한 이슈파이팅까지 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죄(罪)’라는 입장이다.
그날 내 옆과 앞에는 믿음이 신실한 장로님과 안수집사님이 앉아있었다. 동성애법 반대여론도 이분들이 주도했다. 이분들 논리도 기독교계의 일반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참 탁상 위에서 ‘동성애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쯤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동성애법에 찬성해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숨이 턱 막힌 안수집사님은 ‘그건 아니잖아요’라고만 되풀이 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체장애인들에게 ‘너는 병신이야, 하나님께 벌(罰) 받았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장애’란 하나님의 실수도 인간의 죄(罪)의 결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수(多數)와 조금 다른 장애인들을 차별하지 말고 존엄한 한 사람으로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저는 동성애자도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사람들과 좀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성적 욕구나 호기심만으로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감내하면서까지 커밍아웃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흑인, 백인, 황인종을 만들고 그들 가운데도 다양한 민족을 만들었듯 그들도 대다수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예수 시대에는 나병환자를 죄악시했습니다. 죄 때문에 나병에 걸렸다며 마을 밖으로 쫓아냈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돌을 던졌으며 접촉을 극도로 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병을 고쳐 질병에서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도 하나님의 귀한 아들이었고, 예수에게 나병은 가난한 이웃을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라면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봤을까요. 성적 정체성이 대다수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고통 받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요?’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침묵은 오래 지속되었다.
매튜 워처스 감독의 『런던 프라이드』(2014년)는 ‘성 소수자’들에 관한 영화다. 다시 말해서 게이와 레즈비언에 관한 영화다. 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개봉했다. 성소수자 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다. 아직까지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고 지금도 유명인들의 커밍아웃이 화제가 된다. 워처스 감독은 무겁고 민감한 주제를 발랄하고 유쾌하게 표현했다. 통상 이런 영화가 갖고 있는 뻔한 결말도 유쾌하면서 묵직하게 한 방 날렸다.
영화의 배경은 1984~5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 광부대파업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 2000년에 개봉한 ‘빌리 앨리어트’라는 영화도 광부대파업이 배경이었지만 형식은 사뭇 다르다. 이 영화를 보려면 1984년 영국 광부대파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2차 대전 후 영국노동당은 노동조합과 광산노동자들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집권 후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폭넓은 복지정책으로 호응했고 그러는 가운데 광산노동자들이 영향력은 커졌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석탄수요가 증가하자 광부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보수당 정권은 임금인상에 부정적이었다. 광부들은 1974년 파업으로 대응했다. 보수당은 의회해산과 총선거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물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보수당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노동당이 재집권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파업은 계속되었다. 노동자 파업이 장기화하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결국 장기파업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당도 물러났다.
노동당에게 실망한 영국국민들은 1979년 선거에서 보수당에게 몰표를 줬다.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마거릿 대처가 수상이 되는 이변도 발생했다. 대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정책 신봉자였다. 그는 신자유주의정책으로 만성적인 영국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성적인 파업과 적자에 시달리던 석탄산업 개혁을 위해 이안 맥그리거를 국립석탄국 총재로 임명했다. 대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부임한 맥그리거는 경제성이 떨어지는 탄광을 폐쇄하고 광부인력을 대폭 감축하는 내용의 ‘석탄산업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전국광부조합은 즉각 파업으로 맞섰다. 1984년 3월 광부대파업이다. 광부들이 전면 파업했지만 대처는 눈도 꿈쩍 안 했다. 파업은 장기화되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세 가지 부류가 나타난다. 인내하며 끝까지 버티는 사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좌절하는 사람, 사용자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사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생업을 중단한 채 머리띠를 동여 맺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다. 광부노조는 그렇게 1년 넘도록 싸웠다.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도움을 줬던 우호집단들은 점점 등을 돌렸다. 여론도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 월급도 끊겼다. 정부와 사용자들은 전기와 가스까지 끊었다. 광부와 가족들은 각 지역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으로 연명했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게이·레즈비언 단체인 LGSM이 광부노조 파업을 지지하며 많은 후원금을 보낸 것이다. 단지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폭력에 시달려온 성소수자들이 1년여 동안 언론과 사회의 뭇매를 맞고 있던 광부들에게 연민의 손길, 연대(連帶)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사회는 동성애에 부정적이었다. 우리사회처럼 보수적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악이라며 정죄(定罪)했다. 더구나 1980년대 중반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가 확산되었던 시기였다. 그 원인이 동성애 때문이라는 괴담이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1985년에는 유명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하면서 공포심에 기름을 부었다.
동성애자들의 후원금을 받고 전국광부노조는 크게 당황했다. 그들의 최종 선택은 거절이었다. 압박받는 사회적 약자끼리의 연대(連帶)보다 여론의 향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전국광부노조의 냉대가 가슴 아팠지만 동성애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직접 고물자동차를 몰고 웨일즈의 작은 광산촌을 찾아 후원금을 전달하고 연대를 모색했다. 영화는 어떻게든 돕고 연대하려는 게이들과 이들을 경원시하는 광산촌 주민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부정적 상황을 ‘긍정’으로 활용하는 대단한 용기와 응용력도 보여준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부비면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게이들도 똑같은 인간이고 밥 먹고 울고 웃는 존재이며 광부들처럼 사회의 냉대와 억압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연대(連帶)’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고 중요시한다.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지만 생각과 삶의 방식, 문제해결방식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동지(同志)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서로 조금씩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힘이 생긴다. 정의로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영국 광부파업은 결국 패배했다. 광부들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지만 그들 속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싸움을 통해 연대(連帶)의 힘을 배웠다.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깨달았다. 역사는 실패를 거울삼아 진보한다. 진보(進步)는 수많은 실패 속에 쌓아 올린 금자탑(金字塔)이다. 일제식민지시기 민족해방에 투신했던 전사들도 그렇게 기꺼이 죽어갔다. 영화는 게이들의 인권운동으로 마무리한다. 모두가 우려하고 냉대했던 게이들의 투쟁에 광부들은 대형버스를 타고 올라와 연대(連帶)했다.(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