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은 불교에 귀의하고 수행자로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르는 것도 삭발은 머리카락이 아닌 자신이 그 동안 지니고 있는 무명을 잘라내는 것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삭발을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마음과 몸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서원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부터 승려들이 삭발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마부 찬다카와 작별을 고할 때 “지금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苦)에서 해탈할 것을 서원하는 뜻으로 삭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경전에서 전하고 있지만 부처님을 묘사한 불상이나 불화 어디에도 삭발한 부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브라만들이나 사문들도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치렁치렁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머리를 기른 모습만이 남아있는 기록이나 그림을 통해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역시 역사속의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면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이나 적당히 기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혼자서 수행을 하는 독각자 들은 더더욱이나 삭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이후 계율이 정비되면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율장’가운데에서는 길게 기른 머리나 수염은 출가자에게 여러 방해 요인을 제공하므로 깎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부처님 사후에 제자들이 모여 결집을 하고 교단을 형성하면서 대중화합을 최고의 계율로 하는 생활 속에서 단정하고 통일된 대중생활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천태종은 약 900여년 전 고려 11대 문종왕의 넷째 아들인 의천 대각국사에 의하여 개종 되었다. 이 후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숭유억불정책인 선교양종의 폐합으로 말미암아 천태종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500여년 만에 상월원각대조사님에 의하여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본 종을 중창하신 상월원각대조사님은 일찌기 불교에 입문하시어 국내, 외의 불교성지를 두루 참방하신 뒤 1945년 소백산 구봉팔문 연화지에 들어오셔서 천태종의 근본도장인 구인사를 창건, 1966년에 대한불교 천태종을 중창하셨던 것이다. 상월원각대조사님의 슬하에는 많은 비구, 비구니의 제자를 두셨는데, 구인사에는 비구, 비구니들이 한 도량에서 수행을 하는 특색이 있다. 또한 구인사 창건초기부터 천태종의 비구니들은 유발의 모습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이에 천태종 비구니의 유발수행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 한 도량 안에서 비구, 비구니가 함께 수행을 하고 있는데, 함께 삭발을 할 경우 비구, 비구니가 구분이 되지 않음으로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음을 염려하여 비구는 삭발수행, 비구니는 유발수행하게 했다. 그리고 한 도량 안에서 수행하면서 무엇보다 엄격한 계율을 생명으로 여기고 생활하고 있음으로 유발에 대한 이렇다 할 장애가 없다. 둘째 : 1966년 종단 중창이후 불교의 일반적인 풍습에 따라서 비구니의 삭발에 대하여 검토한 바가 있었으나, 대조사님께서는 " 불법의 근본은 마음을 닦는데 있는 것이지, 모양을 갖추는데 있지 않다. 삭발염의 하고 지계수행을 소홀히 하는 것 보다, 유발염의로 지계청정 수행이 불법의 근본에 더 부합된다."고 하시며 비구니 유발수행을 천태종의 전통으로 지켜갈 것을 부촉하셨던 바, 그 뜻을 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종의 비구니 스님들은 외형적인 모습은 유발이지만, 청정한 계율과 뼈를 깎는 주경야선의 고행수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이다. 이는 천태종도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