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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1월23일-24일(土日)雨雲
▲백두대간29차(효곡리-큰재-국수봉-용문산-작점고개-금산-추풍령)
해봉(23명)
130127
♠참 고
▲국수봉(菊水峰)-한국의 산천
국수봉(763m)은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중 추풍령~큰재
구간에 속해있으며 큰재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 상에 솟은 산.
산행은 공성면의 큰재 정상에서 시작한다. 정상에는 인성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인성초등학교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써 1947.7.1 설립 되었으나 최근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없는 관계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로
된 후 그나마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 1997년3월1일 폐교 되었다.
교적비에는 1949년11월9일 개교 졸업생 597명을 배출하고 1997년3월1일 폐교.
지금은 부산녹색환경연합에서 임대하여 생태학교로 사용하고 있으나 언젠가
학생들의 소리를 들을 날을 기약하면서 쓸쓸히 대간을 지키고 있다.
♣산행 코스
05시00분 효곡리
06시40분 큰재
07시25분 국수봉
08시30분 용문산
09시30분 갈현
10시25분 작점고개
11시05분 사기점고개
12시30분 502봉
13시10분 금산
13시30분 추풍령
총7시간30분
☞☞☞겨울 가뭄 끝에 줄기차게 내리는 귀한 비.
노모가 걱정하는 걸 현지에 계속 비가 내리면 산행을
안 하겠다고 안심시킨 뒤
배낭 카바를 정비하느라 지체, 어두운 밤,
배낭을 메고 우산을 받쳐 들고 바쁘게 집을 나섭니다.
남 들이 볼 때 보통 청승이 아니지만 진작 본인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입니다.
출발시간인 정각 22시, 한산한 시민회관 앞의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오릅니다.
임대장이 구간 안내를 하면서
추풍령 금산이 잘려 나가고 있어 그 지점을 통과할 때
조심해야 한다고 안내방송을 합니다.
약속대로‘KBS 일요스페셜 금연방법’녹화 비디오테이프를
언양휴게소 까지 보여주 고 다시 출발할 때는 완전소등을
하고 달립니다.
번쩍 눈을 떠니 어느 사이 부지런히 움직이든 윈도브러시는
멎어있고
03시, 지난번 하산했든 외등이 환히 켜져 있는 낯익은
효곡리에 도착해 있습니다.
은근히 걱정했든 비가 멎어 다행이지만 깜깜한 밤길에 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B팀으로 남기로 합니다.
비가 그친 포근한 날씨,
여유 있는 시간에 임대장은 계속 차내에서 취침을 시킵니다.
04시50분에 기상하여 A팀 11명이
05시, 플래시 불빛을 앞세워 개터재로 출발하고
나머지 12명은
5시45분까지 취침하고 큰재로 출발합니다.
5시55분, 920번 도로상의 큰재 도착.
임대장이 리더가 되어 랜턴 불빛을 앞세워
완만한 경사를 오릅니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차가운 안개구름이 뜨거운 뺨을 스쳐
가쁜 숨소리와 격렬한 운동에 높아진 열기를 식혀주어
시원한 감촉을 느낍니다.
문득 문득 지나가는 구름,
좁은 시야,
플래시 불빛이 막대기로 허공을 갈라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전원이 고갈 되는가
불빛이 희미해져 헤드램프를 켭니다.
06시38분, 잠시 숨을 고루며 휴식하고 계속 올라갑니다.
584봉은 언제 넘어섰는지 알 수 없는데
안개구름을 몇 번 맞고
하얀 눈이 발아래에 밟힙니다.
7시가 넘어서자 동쪽이 뿌옇더니 곧 밝아지고
등로는 더욱 가팔라집니다.
키 낮은 잡목 숲 사이로 힘들게 올라서니
07시25분, 바로 국수봉입니다.
국수봉[菊水峰]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는데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강,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답니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 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
이기도합니다.
뒤따라 올라오는 임사장, 조회장, 집행부 홍일점 은희,
끈기의 장애인 조문기, 맨 끝으로 집행부 환경담당 하회탈이
환히 웃으며 V자를 그리며 올라오는 걸 차례로 촬영합니다.
정상비는 흰 페인트칠한 목비에 ‘국수봉’이라 써있고
다른 면엔 '白頭大幹, 730m' 쓴 걸 돌무더기에 꽂아 세워놓았습니다.
모두 가파른 오름에 지쳐 아무렇게나 퍼질고 앉고
조회장은 가쁜 숨을 쉬며
“한 번도 쉬지 않고 누굴 죽일 여고 이르느냐!”
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07시30분, 임대장이 충분히 쉬었다며 동쪽으로 앞장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곧 길을 잘못 든 걸 깨닫고 되돌아 서쪽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부터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을 밟는 산행.
오른쪽으로 대간종주 산꾼 인지 야영텐트가 보이고
얼마가지 않아 낙엽 깔린 등산로 우측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간판에
계단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흰 페인트칠 해놓았습니다.
완만한 오름의 낙엽이 쌓여 푹신한 촉감의 낙엽능선,
왼편으로 요란한 찬송가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옵니다.
처음 참여하는 임대장의 조카가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등산객에겐 이건 완전히
깨끗한 새벽하늘의 소음공해입니다.
다시 잡목사이를 해치고 올라가는 가파른 오름.
나무를 꺾어 만든 지팡이를 짚은 조문기군이 힘들게 올라가고
그 뒤를 송정환대원이 큰 부피의 배낭을 메고 뒤따라갑니다.
08시30분, 헬기장에 올라섭니다.
용문산은 이미 지나갔고,
임대장이 아침식사를 여기서 한다고 합니다.
땀이 식으면서 추위를 느껴 방풍재킷을 꺼내어 입고
선체 준비해간 김밥을 꺼내어 보온병에서 따끈한 밀감차를
따라 마십니다.
뒤늦게 도착한 자상한 조회장이 여분으로 준비해온
컵라면을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집행부 하회탈에게 넘겨줍니다.
08시55분, 추위 때문에 뒤따라오는 A팀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출발합니다.
얼마가지 않아 송정환대원이
‘백두대간종주기념 강의치, 배도신, 송정환등...’
이름을 쓴 자색시그널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있습니다.
안개구름이 서서히 거치고
계속 낙엽 쌓인 등로를 걷는데
09시27분, 뒤가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A팀 리더 안승태 대장이 앞 찔러 갑니다.
이건 완전히 고속 질주하는 경기차량입니다.
그리고 1,2분 뒤 김윤근, 김명호대원 등 4,5명이 다시 앞서나가고
09시30분, 밋밋한 잘록이 갈현을 통과합니다.
가벼운 오름과 가파른 오름에서 임 대장의 젊은 조카가
이를 악물며 올라오는 모습이 보기 좋아
캠코더에 담습니다.
그 뒤를 홍일점 조양이 가볍게 따르고...
10분 뒤, 추풍령에서 5시에 출발했다는
10여명의 인천의 백두대간 종주대와 조우합니다.
부녀자와 어린이까지 낀 그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눕니다.
10시5분, 작점고개가 내려다보이는 묘지에서
A,B팀이 완전 합류하여 인원을 점검하고 대열을 정비합니다.
건너편의 묘함산을 바라보며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0시25분, ‘추풍령5.5km'이정표와 충청북도 경계간판이 있는
포장도로인 작점고개를 건너면서 임 대장, 조회장등
4,5명이 탈출을 시도합니다.
5분 뒤 예정시간보다 너무 빨라서인가
10시37분, 넓은 묘지에 7,8기의 봉분이 있는데서
다시 휴식하는 선두그룹과 합류합니다.
후미를 기다리다 밭을 가로 질러
콘크리트 포장도로에 올라섭니다.
오른편으로 저만큼 납골묘가 보이고
계속 도로위로 올라가는데 왼편으로 농장인지 목장인지
꽤 큰 시설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온다는 3,4명의
백두대간 종주 팀과 마주칩니다.
도로를 따라 서너 구비 돌아가다
11시7분, 오른쪽으로 전주지지 철사 줄에 매달아 놓은
시그널을 발견하고 등로로 접어듭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사기점고개에서 지름길로 먼저 올라온
후미 팀과 합류합니다.
약 30분 뒤 얕은 완만한 등로를 따라 가는데 산불이 나
검게 탄 잡목구간을 지나칩 니다.
불탄 나무에 자라고 있는
하얀 버섯들의 강인한 생명력이여!
11시57분, 대열이 다시 휴식하는데 먼저 올라가
적당한 위치에서 뒤따라오는 회원들을 촬영합니다.
그 가운데 부산대학 교수라는 노장회원이
“아~ 고맙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이렇게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며 인사합니다.
뒤에 안일이지만 60대의 건건산악회 회원인데
지난번 대간 종주 때 빠뜨린 구간을 땜질하기 위해 나왔다고 합니다.
12시30분, 502봉을 통과하면서 오른쪽으로
추풍령 저수지를 내려다봅니다.
곧 잘려 나가는 금산이 나타난다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합니다.
얼마가지 않아 평탄한 등로가 잿빛돌가루로 덮여있고
13시, 돌가루로 덮어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절벽처럼 잘려 있는 금산.
그 정점에 선두로 올라간 대원들이
개미처럼 보이는 걸 캐논과 캠코더에 담습니다.
조군을 앞세우고 뿌연 돌가루를 뒤집어선 잡목사이 길로
해발384m라는 아슬아슬한 비탈 ‘금산’을 촬영하며 오릅니다.
서울의 쌍 스틱 장년대원이 뒤따라 올라오면서 묻습니다.
“산행 때 마다 비디오를 촬영해요?”
“네~”
드디어 가파른 정상에 올라섭니다.
아래서 콤프레샤와 파쇄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천 길 낭떠러지.
좀 전에 산을 이렇게 파괴해도 되느냐고 했을 때
“말해봤자 눈이나 깜박하겠어요.”
하든 뒤따라 올라선 쌍 스틱 장년대원이 소리칩니다.
“응? 이게 뭐야! 아유~ 세상에,
야~ 이럴 수가 있어, 무서워서 못 내려다보겠네!”
잠자코 캠코더와 캐논에 이 광경을 열심히 담습니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전국 명산에 철심을 박아놓았다고 흥분하든 이 민족이
어쩌다 자기스스로 이런 흉물로 만들어놓고 후손들에게 무어라 변명할려는지 참담한 이 심정..
그건 교묘히 깎여 나가고 있는 백두대간 ‘금산[金山]’.
한반도 호랑이 허리부분 척추가 완전히 잘려 나가고 있는 현장.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게 안쪽에서 야금야금 잘라 나오는 지능적인 파괴현장이다.
우리 국민은 일제가 한국인의 기상을 끊어 놓기 위해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고 그렇게 흥분하면서 왜 우리 국민 스스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너무 무심하다.
들리는 이야기는 철도 공사자제로 사용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하필 백두대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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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그 뒤 해봉산악회 월 회보에 올린 고발 산행기입니다.
▲백두대간 추풍령 ‘금산’ 파괴현장
지난 99년 1월 24일 새벽 5시.
부산의 ‘해봉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는 29차 구간 종주를 위해
경상북도 공성면 효곡리에서
<중 략>
잿빛 돌가루로 덮인 등로를 가파르게 올라 선 정상은 오른편으로 천 길 낭떠러지.
요란한 콤프레샤와 착암기, 파쇄기 소리가 진동하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
올라온 쌍지팡이 장년 대원이 소리쳤다.
“응? 이게 뭐야! 아유~ 세상에, 야~ 이럴 수가 있어......”
서쪽으로 추풍령 고속도로에 무수한 차량과 경부선 철로위로 무궁화호가 스쳐가는
풍경이 평화스럽게 발아래 펼쳐 보였는데 이런 어이없는 광경을 카메라와 캠코더에
담지만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조상들이 400여 년 전부터 朝鮮方域地圖를 비롯하여 전국을 수십 차례 답사한
김정호의 大東輿地圖, 신경준의 山水考를 참고하여 만든 山經表.
이에 백두대간을 주축으로 한 개의 正幹, 13개의 正脈, 여기서 뻗어나간 岐脈. 水系도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山, 峰, 嶺, 峙, 그리고 江, 河, 川을 정감 있게
명명하였는데 日帝가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일본의 지질학자와 지리학자
를 동원하여 만든 산맥명칭을 아직도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교과서에 까지 사용
하게 하는 정부당국과 학자들의 무신경에 할 말을 잃었다.
일제가 한반도를 토끼의 형상으로 비유, 우리 민족의 氣를 죽이려는데 반발한 대한민국
이 포효하는 호랑이로 바꾸었고, 몇 년 전 북한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산에 일본 제국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철제 말뚝을 박아 놓은걸 발견, TV 신문등 대중 매체에서 크게
보도, 전 국민이 그 악랄한 음모와 술책을 비난, 분개하며 철 말뚝 뽑기 운동을 벌리기도 했다.
한데 대한민국 건국 50년에 그 호랑이 등줄기인 백두대간을 그것도 우리 국민이 官民 합작
으로 강릉시 옥계면의 백두대간 자병산을 완전히 없애 버렸고 김천시 추풍령면의 금산이
반 넘어 잘려 나가고 있다.
전국 최대 일간지와 부산의 신문사. 그리고 각 TV 방송국의 기획 제작부장 앞으로 서신을
띄웠는데 묵살 내지는 백두대간 특집 프로 만들 때 혹은 지면 관계를 앞세워 외면해 버려
한동안 맥이 빠져 며칠간 속앓이 만 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어 다시 붓을 들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현장
(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에서 동북쪽 약 700m 거리)을 한번 답사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고발한다.
백두대간 자병산을 없에고, 금산을 잘라 내는 관계자(허가관청 책임자와 시행업자)를.
그리고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파괴 현장을 영구 보존하여 업자와 허가관청 책임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석비를 세워 후대까지 자성의 거울로 삼고,
둘째 국토사랑과 환경보존 차원의 캠페인으로 희망자에 한해 방학 중,
청소년들의 백두대간 구간 종주를 장려, 살아 있는 역사와 강인한 정신력과
자신감을 키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만들고,
셋째 우리 조상들의 그 위대함과 지혜를 발굴하는 계기로 삼아, 매사 책임지는
풍토 를 되살려 물질 만능의 선진국 모방에서 탈피하고 우리 강산만이 갖고 있는
특색을 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 하자는 거다.
그러기 위해 촛대바위와 너럭바위 틈새를 비집고 꼬부라져 솟아오른 푸른
소나무들, 백두대간 자락에서 굽이 굽이쳐 흐르는 東江등의 우리 산하와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을 보전하는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국토사랑은 나라사랑의 바탕이며 국민단합과 IMF 탈출도 나라사랑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이 땅은 등산 동호인만이 사는 땅이 아닌 온 국민이 영원히 뿌리내리고
정 들여 살아갈 터전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 追 信
☞☞지난 2001년8월19일 무박 2일 그룹 산행으로 강화도 마리산을 다녀오면서 경부고속
도로 로 내려오는 도중의 ‘추풍령휴게소’직전, 전면에 보이는 산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산 하나가 희미하게 잘려 나가고 있었다.
그건 교묘히 깎여 나가고 있는 백두대간 ‘금산[金山]’.
한반도 호랑이 허리부분 척추가 완전히 잘려 나가고 있는 현장.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게 안쪽에서 야금야금 잘라 오는 지능적인 파괴현장이다.
우리 국민은 일제가 한국인의 기상을 끊어 놓기 위해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고 그렇게 흥분하면서 왜 우리 국민 스스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너무 무심하다.
들리는 이야기는 철도 공사자제로 사용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하필 백두대간인가?
당시(98년도-99년도)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파괴현장을 캠코더와 카메라로 촬영하여
회보와 ‘사람과 산’(99년4월호)기고 하였고 회보가 백두대간보전회에 알려져 고발 내용이
보전회의 회보에도 실려 국회 환경분과위원회
(당시 이미경 의원이 현장사진이 필요하다는 보전회의 연락으로 사진도 보내어 주었음)
에도 알려져 백두대간보전법이 입안 상정되었으나 정쟁으로 유산되었고, KBS에 몇 번
제보하였으나 9시뉴스에 잠깐 스쳐갔고 조선일보에도 제보하였으나
(홍사중칼럼에서 한번 떼려달라고 직접 서신, 사회부에도 전화)
묵살되고 말았다.
시간이 흘렀으나 당시의 가슴 아픈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아직도 백두대간‘금산’파괴 가
진행 중이란 사실을 알고 뒤늦게나마 ‘산사람들’에게도 알려 여러분들의 느낌을 알고자
당시의 글을 위와 같이 올렸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2003.12.31.국회에서 '백두대간보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038호)통과, 공포 되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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