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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이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지상에서 지키는 마지막 유월절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기기로 결심한 뒤였습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라는 자랑스러운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을 팔아서 자신들의 더러운 잇속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종교 장사치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잡게 되면 즉시 넘겨주겠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 대가로 얼마나 줄 수 있겠느냐고 흥정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영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런 분을 불의한 자들의 더러운 손에 넘겨주는 대가로 겨우 은 삼십을 받아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돌아왔습니다. 함께 동행 했습니다. 은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떠밀어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벌인 파렴치한 일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유다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눅22:3), “사탄이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라는 증거대로,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던 사탄의 충동을 받았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지극히 사탄적인 경향傾向을 띄고 있던 그가 자신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 이끌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나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라는 증거대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하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메시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열심 당원이었던 그는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민족적인 대 숙원 사업을 이루기 위한 극약 처방의 일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팔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當爲性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활용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의 능력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셨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서 잡아가라는 듯 스스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셨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상한 느낌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당하기 힘든 모진 매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살기보다 오히려 죽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결국,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을 찾아갔습니다. 은 삼십을 돌려주었습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 그러니 내가 죄인이다.”(마27:4a)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회개라기보다는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에게 쏟아놓은 넋두리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끊어버렸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 사람은 죄악의 값으로 밭을 사고 거기서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서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행1:18)라는 증거에 따르면, 배가 터져서 창자가 흘러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목적의 달성을 눈앞에 둔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매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을 되돌려 보려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일 아니냐? 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외쳤습니다.
한 때는 서로 마음을 모아 의기투합했던 사람을 살리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실제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엄청난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그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소를 뛰쳐나왔습니다. 힌놈 골짜기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약1:15)라는 선포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유월절 식사를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손을 씻었습니다. 정결淨潔 의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후, 가장이 축제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물을 탄 포도주들 가운데 첫 번째 잔을 마시며 기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서 채소와 쓴 나물을 양념에 찍어 먹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고역을 상징하는 유월절 학가다Haggadash와 할렐Hallel 찬양의 첫 부분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가장은 채소와 쓴 나물을 먹는 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녀들에게 설명해 주고 두 번째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동시에 양고기가 식탁에 오르면, 축복의 잔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또 한 번의 감사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할렐 찬양 나머지 부분을 불렀습니다.
네 번째 포도주를 마신 다음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의 유월절 준비도 끝났습니다. 모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식탁을 향해 왼편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찬에 참여하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하여 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약간 들떠 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혹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너야? 아니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주여! 저는 아니지요?”라고 외쳤습니다. 직역하면 “주여!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죠?”입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제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은밀하게 흉악한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던 유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 사람이 바로 나를 팔 사람이다.”(마26:23)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에 과일과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소스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라고 단정을 지어서 특정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 명이 거의 동시에 그릇에 손을 넣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쭤보라고 눈짓했습니다. 그는 예 그리스도께 더 바싹 다가앉으며 말씀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서 주는 바로 그 사람이다.”(요13:26a)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떡 한 조각을 찍었습니다. 유다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거기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라.”(요13:27b)라고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창세전부터 주어진 죽음의 길을 간다고 하지만, 당신을 파는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정도로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것 봐라. 하지 말아야할 파렴치한 일을 꾸미더니 꼴좋다.”라는 의미의 비아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 하나를 잃게 된 창조주 하나님의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의 악행을 자세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알게 된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강요하거나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완곡하게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호소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이 정도 되면 즉시 자신을 돌아볼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한 짓을 돌아볼 것 같습니다. 돌아서서 회개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 경향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돌아서기보다는 오히려 더 악하게 반응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랬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시치미 뗐습니다.
밉살맞게도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26:25a)라고 물었습니다. 직역하면 “선생님! 접니까? 저는 아니지요?”입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는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과 오래전부터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미 대가까지 받았습니다. 계약을 완전히 끝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셨지만 누군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간절하게 호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닌 것이 맞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흉내조차도 내기 어려운 대단한 위선입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인류의 유일한 주主와 메시아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생들 가운데 하나로 불렀습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췄다.”(마26:49)라는 증거에 따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마치고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를 때도 똑같은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주로 쓰던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던 자들의 반열에 속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도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네가 말하였도다.”(마26:25b)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직역하면 “그렇다.”입니다. 당신을 팔 사람이 유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주는 무수히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겼던 그는,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더할 나위 없이 슬프고 또 끔찍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양은 유월절 절기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양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양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b)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불구덩이로 몰아붙이는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시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유월절 양을 준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유사 이래, 피조물에 불과한 인류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순간적으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주는 아편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가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정말 많습니다. 절대 다수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은밀하게 숨겨져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절대 다수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입니다. 소위, 남들이 부러워하고 또 두려워하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다는 이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처럼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는 물론 하나님을 유일한 주로 섬긴다는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다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저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하나님 자리를 넘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환경과 상황과 조건만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자신 안에 꽁꽁 감추어져 있었던 사탄적인 기질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완전히 돌변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탕에 깔린 힘을 가리켜서 “밑힘”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의 밑에 깔려 있는 밑힘은 물질입니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도 믿을 수 없지만, 물질은 믿을 수도 있고 의지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질이 하나님입니다. 당연히 물질을 밑힘으로 삼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들어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밑에 깔려 있는 밑힘은 사람입니다. 소위 “적극적인 사고”는 한 때,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군부 독재의 군인 정신 “하면 된다.”가 더해졌습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억지 논리까지 더해졌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심리적인 요소가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긍정의 힘”, 지극히 열악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할지라도 바라고 기대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시크릿Secret”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끌어당김과 관련된 많은 책들 가운데 단연 압권은 유엔UN이 수여하는 평화상을 받은 그Twyman F. James의 책 “모세의 코드The Moses Code”입니다. 모세의 코드는 “나는 스스로 있다I am who I am”라는 하나님의 자기소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아실현의 도구는 하나님의 이름 속에 숨겨져 있는 탁월한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그는 모세의 법칙을 통해 자신의 작품The Art of Spiritual Peacemaking을 세계 1위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Town House 역시 불과 한 시간 만에 팔 수 있었습니다.
모두 마음에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끌어당긴 결과였습니다. 또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간절한 마음으로 돈, 집, 건강, 명예, 관계, 지위, 명성 등을 끌어당기면 누구나 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사랑, 평화, 자유, 연민, 동정 등 자아Ego가 간절히 추구하는 것들을 끌어당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때, 비로소 밝고 행복한 사회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바람직해 보입니다. 문제는 밑힘 곧 믿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끌어당김 법칙을 통해서 무한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자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개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렇게 무슨 말이든, 무슨 생각이든, 무슨 계획이든, 누가 되었든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절대성을 띕니다. 하나님 자리에 앉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유다의 야망이 그랬습니다.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능력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누가 주인입니까?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누가 도구입니까?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자신의 유일한 주인입니까? 아니면 무수히 많은 선생들 가운데 하나 정도에 불과합니까?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종교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화형을 당한 다음날, 예전의 모습대로 재림했습니다. 무려 천오백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공생애를 보낼 때와 똑같았습니다. 외모는 여전히 초라했습니다. 볼품없었습니다. 눈빛만 빛날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장님이 용기를 내어 몸을 만지는 순간, 눈이 열렸습니다. 죽은 어린 소녀는 일어나라는 말 한마디에 살아났습니다. 그의 몸과 옷자락에 닿기만 해도 병이 낫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왔습니다. 너도나도 그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때마침, 아흔 살의 대심문관大審問官인 추기경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봤습니다. 손가락을 뻗어 그를 가리켰습니다.
체포하라고 외쳤습니다. 호위하던 근위병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지극히 일부만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재판소 감옥에 가두라는 추기경의 명령에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갑자기 감옥의 철문이 열렸습니다. 늙은 추기경이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네가 그 자냐? 정말 그 사람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추기경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대답하지 말라. 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넌 왜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냐? 내일 너는 극악한 이단자로 화형당할 것이다. 오늘 널 보고 환호한 저 민중들이...널 태우려고 석탄을 들고...달려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은 여전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조용하지만 외치듯 “너에겐 내가 하는 말에 한 마디도 반박할 권리가 없다...지상의 모든 권력은 교황에게 위임되었으니까. 너는 다시 올 생각을 마라...인간들은 네가 준 자유를 우리에게 바쳤다...그래서 우리가 묶고 풀 수 있는 권리를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의 눈은 점점 타올랐습니다. 말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부터 말해 볼까? 굶주린 자에겐 먹을 것을 주는 게 자유지. 관념의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 그건 우상일 뿐이야. 생명을 살리는 게 우선이거든. 삶만큼 소중한 게 없어, 안 그래? 살아 있어야 자유를 원하는 거야. 민중은 관념의 자유보다는 먹을 빵을 원해. 자식이 굶어 죽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아비가 아니야.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을 것을 구해야 해, 안 그래? 자기가 죄를 짓더라도 자식은 살려야해 안 그래? 굶어 죽을 형편인데 헛된 자유가 뭐가 필요하겠어?”라고 이어졌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너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줘. 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굶주린 자에겐 지상의 빵이 우선 필요해. 민중들은 네가 준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 갖다 바치면서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을 것을 주세요.’라고 외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습니다. 추기경은 다시 “자 이제 두 번째 시험에 대해서 말해 볼까? 넌 성전의 꼭대기에 서 있었지.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렸어.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아래로 뛰어 내려라. 천사가 널 받아줄 것이다. 그럼 넌 확실히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다. 하지만 넌 거절을 했지.”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아마 넌 뛰어내리는 행동을 신을 시험하는 일로 여기고,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실토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안 그래? 사실을 말해 볼까? 네가 만일 뛰어 내렸다면 네 몸은 산산조각이 났을 거야. 너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지. 원래부터 그런 기적은 없거든. 넌 기적을 거부했어. 그건 신을 거부한 것 같아. 넌 그런 신을 믿지 않아. 안 그래? 결국 넌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지 않았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그러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겠다.’라고 말했었어. 그런데 넌 결국 내려오지 않고 죽었지. 기적은 없다는 거 아니겠어?”라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밤기운이 차가워지자 추기경은 잠시 불을 쬐며 뜸을 들였습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넌 세상 권세를 모두 거절했지만...우린 이미...지상 모든 부귀와 권력을 장악했어. 우리의 출발은 노예였지만 차츰 세력을 뻗어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 노예였을 때는 가난한 자를 위한 공의와 정의를 요구했지만. 권력을 차지한 후에는 지배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어. 신과 너의 이름으로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해 나가고 있지. 대다수의 민중들은 우리가 주는 행복을 달콤해 하고 있어. 그 미망과 미혹에서 행복하게 죽어 가고 있지만.”이라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은 계속해서 “우린 죄마저도 너의 이름으로 용서해 줘. 너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네 이름이 우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우린 천상의 영원한 보상을 미끼로 그들을 유혹하지.”라고 말했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지면서 어둠이 차츰 물러가고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넌 내일...화형에 처해질 거야. 이제 내 말도 끝났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떤 대답이든지 해주길 바라는 추기경의 기대와 달리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침묵은 늙은 추기경에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놀랍게도 꼿꼿했던 추기경의 허리가 점점 구부러졌습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핏기 없는 추기경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습니다. 추기경은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열었습니다. 그를 풀어주며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지상에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라고 외쳤습니다. 이상은 러시아의 대문호Dostoyevsky의 책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제 5편 다섯 번째 단락에 수록收錄되어 있는 “대신문관”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추기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하셨을 때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체포했습니다. 대질하는 과정에서는 사탄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했습니다. 뻔뻔하게도 사탄의 손을 잡고 세상을 지배했어야지, 도대체 왜 자유를 주었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사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가장 큰 대적 사탄과 손을 잡았습니다.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파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한편,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을 심판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고 했던 빌라도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후안무치의 죄인으로 역사에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입을 맞추셨습니다. 추기경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심문관”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방식을 완벽하게 다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무게감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기는 추기경이나 저와 여러분이나 일반입니다.
다른 점이 있습니다. 추기경은 자신이 배반자라는 사실을 알고 시인하며 용서를 바라지만, 오늘의 저와 여러분과 교회와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보다는 당장의 허기를 달래줄 빵과 고통을 한 번에 날려버릴 기적과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부귀와 권세를 원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얼굴에 얼마나 두꺼운 철판을 깔았는지 마치 유다처럼 “주님, 제가 당신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요? 저는 아니지요? 저라고요? 아니 제가 그렇다고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중국 명대明代의 사상가이면서 문학가였던 그李贄LiChih는 “나는 오십 이전에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왜 짖느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실실 웃을 뿐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솔직한 고백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모릅니다. 동시에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인 그Friedrich W. Nietzsche는 인간은 반드시 세 단계의 정신을 거쳐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먼저, 낙타입니다.
어떤 저항도 없이 사회 관습 일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입니다. 실제로, 낙타는 주인이 등에 올린 짐을 어떤 저항도 없이 실어 나릅니다. 두 번째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낙타와 다릅니다. 사자의 의지 없이는 어떤 짐도 올릴 수 없습니다. 짐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악의 경우 사자를 죽여야 합니다. 사자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는, 아이입니다. 아이 정신은 반드시 가져야합니다. 특히, 아이 정신의 핵심은 솔직함입니다. 당당함입니다. 이는 맹목적으로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새로운 내일을 창조할 수 있는 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7)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솔직하고 당당한 아이 정신은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가 빠진 상태에서 물질적인 축복만을 외치는 것은 이유도 모르는 체 짖고 있는 개와 같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유 등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모할 정도로 좋은 것이라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다면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해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기반성, 솔직한 죄의 고백, 반드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비록 죄송하지만 당당하게 드리는 회개는 저와 여러분을 영원히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온전하게 회복시켜줍니다. 견고하게 세워줍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신의 허물과 죄를 솔직하게 당당하게 고백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절대로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거듭나는 복된 삶, 순간순간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