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애지문학상 후보작품 시부문
---김기택 수염으로 칼날 깎기, 엄재국 백비탕, 최병근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장옥관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공광규 겨울동화, 신대철 땅 껍질, 반칠환 즐거운 동티, 조용미 먹으로 휘갈긴 문장, 박분필 나의 고도를 찾아서, 이선희 바퀴 달린 가죽가방, 박성우 은행나무 길목,
수염으로 칼날 깎기
김기택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언제 나에게 와서
얼굴이 되었니
나도 모르게
나였던 것들도 모르게
깎아도 깎아도 매일 얼굴이 되고 있었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만 년 수백만 년 되풀이하고 있었니
수억 년 전의 것과 같은 허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풀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어둠에서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지금도 쉬지 않고 어딘가로 가서
또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있니
검은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줄도 모르는 되풀이
시야에 가득한 햇빛처럼 쏟아지고 있는 되풀이
바람처럼 불고 있는 되풀이
죽는 줄도 모르는 죽음
태어나는 줄도 모르는 얼굴
무한인 줄도 모르는 무한
거울 볼 때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흰지 검은지 모르는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번쩍 한 얼굴
슬쩍 한 슬픔
그토록 무량겁 무량겁 투명했으면서도
투명인지 모르는 투명
---애지 가을호에서
백비탕
엄재국
누가 불 지폈을까?
부글부글 살구꽃 한 세상이 담장을 넘쳐 흐른다
건더기 없으면 넘치지 않을 맑은 물의 봄
사람들은 봄빛에 지쳐 쓰러지는데
약 없는 세상
누가 저 담장너머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애지 가을호에서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최병근
간판 없는 공장은 그의 1인 놀이터였다
수령 오백 년 보호수 발치에
기와 정자 하나 빈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주름진 나무 옆구리에 붙어 있는
볼트 공장 사장을 만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한 치 오차 없이 여름을 깎아
가을의 힘줄을 한껏 조여야 할 그의
볼트
이순에 늦장가 들어 세 살 딸아이를 둔 그는
나무 그늘을 나이테처럼 둥글게
둥글게 땀 흘려 깎고 있었다
그와, 그의 필리핀 아내와
저녁이 여전히 무서운 딸아이
웃음만으로 세상이 어찌 환해질 수 있겠는가
나는 처음 보았다
느티나무가 수만의 푸른 눈동자로
그의 볼트 공장 지붕 그늘을 완성한
한여름 그 오후를
----{애지}, 2024년 가을호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장옥관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기라. 봉제사 접빈객이 헌법이고 족보가 경전인 경상도 땅인기라. 꿈에도 생각 몬 해본 배교(背敎)는 오직 분선이 이모 때문이제. 이모는 내보다 딱 한 살 더 뭇는데 분해서 분서이, 다섯째 딸인기라. 우에 히는 필선(必宣)이고, 그 우에 히는 필조(必助). 삼신할매한테 우짜든동, 우짜든동, 손바닥 닳도록 치성 드리가 얻은 아가 또 딸인기라. 낳자마자 웃목에 던져짔던 분서이는 큰히의 큰아들인 날 딴 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겼을끼라. 외가 가믄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기라.
내가 어무이 뱃속에 들앉아 있을 때 이모는 외할매 몸에서 불안한 숨 몰아쉬었을 끼라. 부른 배 때매 사우 피해 츠마 밑으로만 댕깄다는 할매, 한 지붕 아래 뒤뚱뒤뚱 딸내미와 어매가 서로 마주치는 거도 을매나 민망시러운 일 아니었겠노. 누가 등 떠민 것도 아인데 또 아를 가진 할매, 고마 죽은 아들 손잡고 저세상으로 가시뿌고. 분서이는 뺑덕어마이 눈칫밥이 떠밀어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대처로 떠났는기라. 큰히의 아들은, 아부지 어무이 다 잃고 교복 차림으로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는데 이모는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기라.
그 후에사 말해가 뭐하겠노. 우째우째 내가 얼치기 박사 따고 교수 되는 동안 이모는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사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가고 말았으이,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와 남자 그 한 끗에 누린 것들,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 미안코 미안해 때늦게 신앙 고백하는기라. 수지븜 많았던 이모는 외가 삽짝 밖에 핀 분꽃을 닮았었제.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기라.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2019.
----애지 여름호에서
겨울동화
- 공광규
아이들 키를 덮을 만큼 눈이 내려
아이들도 어른도 보이지 않는
지붕을 흰 눈이 푹 덮은
바이칼 겨울 호변 마을은
나무들이 눈뭉치를 들고 서서
눈싸움 놀이를 한다
어느 나무는 얼굴에 눈덩이를 맞아
얼굴을 수그리고
어느 나무는 허리에 맞아
몸을 타원으로 휘었다
붉은 벽돌집과 검은 나무담장
자작나무와 소나무와 관목에
이르쿠츠크 행 열차속도로
눈보라가 비껴가는 호변 마을
----애지 여름호에서
땅 껍질
신대철
화악산 꼭대기 주목 군락지에
텐트 치고 한 달간
미군 레이더 기지 경비를 섰다.
대원들은 틈만 나면 주목 그늘에 벌렁 누웠다. 새도 바람도 햇빛도 푸르게 그늘지어 넘어갔다. 고향에서 온 구름이 내가 모르는 곳으로 하얗게 물결쳐 갔다. 그 물결을 타고 바둑판 이야기가 흘러 들었다. 몇 백년 된 주목을 자르라니! 나는 아름드리 주목 사이를 산책하는 듯 서성이다 미군들이 화악리 캠프로 내려가던 저녁, 서울 불빛을 보며 주목을 생각했다. 우리보다 더 빛을 어둠을 알고 우리보다 더 땅과 하늘을 알고 오래 지구를 버텨 줄 나무들. 정들인 생명붙이 나무들을 돌며 오늘은 이 나무 내일은 저 나무, 매일 바둑판 재목을 바꿨다. 마침내 술 기운으로 톱질하던 고참 대원은 ‘우린 군인이야, 미안해, 미안해요’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속살 불그레한 나이테 옆에서 남은 숨처럼 두근거리고 있었을 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상부에서는 나무 아래 토막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흔적없이 태우라고 했다. 철수하던 날, 대원들은 용담리로 내려갔고 나는 트럭을 인솔하여 화악산을 내려왔다. 가평 헌병대 검문에 재목이 발각되었지만 어디서 온 전화 한 통화에 하룻밤만에 풀려나왔다.
전역이 꿈이었던 고참 대원은
어디에서 꿈을 이루었을까?
안개 자욱한 날
숨통 터 주던 그 높은 숨결
쿵 하고 쓰러지던 그 높은 나무
땅 껍질
기억 속에 으스러져 박혀 있는
가로 42cm, 세로 45cm* 화악산
*바둑판 표준 규격.
----애지 2024년 봄호에서
즐거운 동티
- 멸종의 기쁨
반칠환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먹으로 휘갈긴 문장
조용미
반곡역 가는 길에 지났던 황새쟁이 사거리, 황새와 사람을 말하는 쟁이가 만나 황새쟁이가 되었나
황새처럼 큰 사람 황새처럼 다리가 긴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닐 텐데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는 황새가 옛날부터 좋았다 목과 다리를 쭉 뻗고 일자로 나는 그 자세가 나는 더욱 좋았다
검은색 날개깃은 먹으로 휘갈긴 문장 같아
겨울에 찾아오는 귀하고 보기 드문 조용한 황새가, 멸종위기종이 된 황새가 나는 좋았다
이른 봄 밭둑에서 만나는 황새냉이도 솜털 같은 북극황새풀도 좋았다
올겨울은 황새를 보러 어디로 가야 하나 황새 날개를 보면 또 먹을 듬뿍 먹은 붓을 들고 무언가 그리고 싶겠지
희고, 검고, 붉은 황새는 아주 크고 아주 고요해서 가까이 갈 수 없겠지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나의 고도를 찾아서
박분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다시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낭떠러지에 걸린 철길 위로 벽도 창문도 없는 열차를
타고 철컥철컥 협곡을 지나 협곡으로 접어드는 길
접어들수록 세상이 아득하다
나의 고도를 찾아서
하늘 끝에 닿아있는 아슬아슬한 시월의 산
너무 높아서, 번개가 내리칠 때는 머리보다
배꼽을 조심해야 한다는 산이 배꼽을
감았던 구름을 한 겹 한 겹 풀어낸다
산꼭대기에 태양이 걸린다, 어제 쏟아진 함박눈이
하얀 외뿔고래처럼 헤엄치고 파랗게 담긴 시간이
넘실대고 단풍은 완벽한 색채의 춤사위다
산이 대뜸, 위풍당당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협곡바닥 푸른 물속에 발을 담근다
물에 비친 마음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에 마음을 닦는 일과
순수한 저 여유로움이 나의 고도였을까
사람이 늙는 일과 단풍으로 물드는 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 모두 물이었으니까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애지 2024년 봄호에서
즐거운 동티
- 멸종의 기쁨
반칠환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바퀴 달린 가죽가방
이선희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을
무엇을 쑤셔 넣으면 한없이 들어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비뚤어지게 서 있는 것이
희끗희끗 때 묻은 것이
울퉁불퉁 늘어진 것이
벌써 여러 곳을 거쳐 왔을
바퀴 달린 가죽가방
여행의 경유지나 기착점을 모른 채
속이 열릴 때까지 지퍼를 닫고 굴러갈
바퀴 달린 가죽가방
낡은 바퀴로 끝까지 가 보겠다며
공항 대기실, 의자 옆에 손들고 서 있는
바퀴 달린 가죽가방
----애지, 2024년 봄호
은행나무 길목
박성우
초저녁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두 정거장 더 가서 하차해야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내려 걷는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정육점에 들러 삼겹살 한 근 산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17년을 살아온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서른 중반에 신혼살림을 차려
딸애 하나 낳아 그냥저냥 잘 살다가
쉰 살을 넘겨 떠나려 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 해가 꼭 사과 같아!
뜨겁고 달콤한 것들만 품고 이곳을 떠나야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
주말부부를 하던 신혼 때 들르던 빵집이며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이며
언제 찾아가든 문이 열려있던 집 앞 세탁소까지
저녁 식탁 위에 도란도란 꺼내놓고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백색 사원
이병연
황금 사원에서는
제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빛을 잃는다.
무릎 꿇고 엎드린 사람들
오직 빛나는 것은 황금뿐
백색 사원에서는
초라한 차림새도 빛이 난다.
사뿐히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
색색의 꽃이다.
하얀 눈 위에
촘촘히 보석처럼 박아 놓은 작은 유리 조각들
그 안에 들어앉은 햇살이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삶의 파도에 휩쓸려 생기를 잃은
사람들의 눈빛이
설원에 빛나는 호수처럼 되살아난다.
사원은 배경이 되고
사람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주인공이 된다.
부처님의 얼굴이 대보름 보름달처럼 환하다.
----애지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