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마음속에 돌을 던지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발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설명을 듣고 또 걷고, 다시 멈춰 서서 집중하는 흐름 속에서, 몸보다 마음이 더 긴장하고 있었다. 단순한 탐방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엉켜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성’이라는 말이 남았다.
‘아성’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성 안의 성'이다. 하지만 오늘 들은 말은 그 이상의 울림을 주었다. 칠성대 이야기 속에서 “아성은 자기 자신이에요.”라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무언가 또렷이 자리 잡았다.
그 말을 경계로, 오늘 걸었던 모든 길이 새롭게 느껴졌다. 단순한 골목 탐방도, 문화 유적 해설도 아니었다. 제주라는 시간의 지층을 밟으며 걷는 동시에, 내 안의 중심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문탐 13회차는 시작부터 끝까지 각인되는 하루였다.
출발은 산지천.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물의 이야기. 과거에는 복개되어 3층 상가가 세워졌고, 하천은 썩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철새가 날고, 물고기가 유영하는 생태 하천으로 되살아났다. 서울 청계천 복원의 모델이 이곳이라는 설명에 모두 놀랐다.
“청계천도 원래 이렇게 흘렀던 거예요.” 도시가 스스로 숨 쉬는 것. 그렇게 복원된 산지천은 제주의 생명선이자 회복의 상징이었다.
광장과 웃음, 그리고 별
탐라광장으로 이동했다. 문화 거점으로 조성됐지만 생각보다 조용했다. 선생님은 솔직히 말했다. “사람은 안 모이고, 노인만 모여요.” 묘하게 진심 같아 모두가 웃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를 지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늘을 찾았고, 해설을 들으며 그늘 아래 조용히 섰다. 그 순간, 햇살과 표정 사이에 피어난 미묘한 웃음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칠성로. 그냥 거리 이름인 줄 알았지만 그 안엔 실제 '별'이 있었다. 북두칠성 7별을 본떠 만든 칠성대. 일도 3개, 이도 2개, 삼도 2개. 총 7개의 별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각각은 12지신의 띠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아성'.
단순한 지명이 아닌, 자신이라는 존재의 상징. “별을 따라 걷는다는 건, 결국 자기 안의 중심을 찾는 일입니다.” 그 말이 하루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무, 전쟁, 그리고 기억
녹나무가 자리한 광장. 예전엔 큰 나무들이 즐비했지만, 조성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고 시간이 지나 다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최근 팽나무들이 시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제주 자연의 미묘한 변화 신호처럼 들렸다.
을묘왜변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1555년, 왜군 1,000명이 제주에 상륙했고, 단 70명의 별동대가 기습 공격으로 맞섰다. 이후 성이 확장되었고, 일제는 그 성의 돌을 항만 공사에 사용했다. 지금은 기상청 담장 아래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해녀복과 광해우
해녀복의 기원은 공동체 윤리였다. 1700년대까지 남녀가 함께 물질을 했고, 그 풍경은 외부 시선에는 문란하게 비쳤다. 그래서 노출을 줄이고 실용성을 더한 잠수복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지금의 해녀복으로 이어졌다. 제주 여성들의 실용성과 자존감이 옷에 담겨 있었다.
광해군의 유배 이야기도 남는다. 제주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왕. 장례가 치러진 날 큰비가 쏟아졌고, 지금도 매년 7월 즈음이면 그 비가 내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광해우’라 부른다. 장소와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전설은, 이 땅이 단지 땅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임을 증명했다.
시장, 신념, 그리고 발걸음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동문시장.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있었다. “비가 와서 물이 들어와도 절대 이사 안 해요. 왜냐면, 물이 들어와야 복이 들어온다고 믿거든요.” 모두 웃었지만, 그 안의 신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유독 발이 아팠다. 예전엔 20km 올레길도 거뜬히 걸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설명을 듣고, 또 걷고, 멈춰 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몸은 더디고 마음은 더 깊어졌다. '오늘은 그냥 관광이 아니라, 반성문 쓰는 하루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더 깊은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나를 비추는 빛 하나
돌아오는 차 안, 그리고 집에 돌아와 조용히 앉아 있을 때까지도 그날 들은 말이 자꾸 맴돌았다. 나 자신을 들여다본 하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삶이 있다. 나는 무엇을 따르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문탐 13회차는 정보가 아닌 감각으로 남는다. 별과 성, 물과 돌, 시장과 나무. 그리고 그 중심에서 마주한 건 바로 내 마음 깊숙한 한 조각이었다. 어쩌면, 오늘 내가 찾은 것은 별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첫댓글 제주사람들은 별에서 내려와 살다가
죽으면 다시 별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별의 나라, 별의 도시
그래서 칠성대촌이 생겨납니다.
그 중심에 ‘나’라는 별
[아성-我星]이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철학적 사고가 참 놀랍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ㅎㅎ
소소한 얘기 하나라도 허투루 듣지 않고, 그 의미를 새기며 성찰해나가려는 상미님의 태도와 습관이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크게 칭찬하며 상미님의 제주삶을 응원합니다~^^
제주에서의 하루 하루가 너무 좋습니다. 더불어 이곳에서의 의미와 성찰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응원감사합니다^^
북두칠성(北斗七星) 북쪽에 있는 국자모양의 7개 별자리 라고 알고 있었는데,
한자 斗 국자 두, 영어 Big dipper, Plough 모두 큰 삽 모양의 어원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별 7개를 모아 별자리 이름를 만들고 12 간지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제주 사람들은 그 별자리로 칠성대, 칠성로를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별 볼일 없는 男子에서 별 볼일 있는 我星으로 깨달음을 준 상미님의 글도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참 새롭고 깊었는데,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너무 반갑습니다.
‘별 볼일 없는 남자에서 我星 있는 사람으로’라는 표현이 너무 멋져서 저도 한참 웃었습니다 :)
앞으로도 별 하나, 나 하나를 연결해보는 글을 계속 써보겠습니다. 따뜻한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