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45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현)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낚싯줄 길게
(千尺絲綸直下垂 )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
일파재동만파수
(一波載動萬波隨)
야정수한어불식
(夜靜水寒魚不食)
만선공재월명귀
(滿船空載月明歸)
낚싯줄 길게 펼쳐
바다 속에 드리우니
파도는 일파 만파
일렁이며 흐르는데
고요가 겨운 밤 물만 차가울 뿐
고기는 입질도 없고 물지 않아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되돌아오고 말았네.
"
어쩌면
인생(人生)이란
어떤 면에서
빈배(空船, 일엽편주)와
같은 것이다.
욕구충족을 위해
아무리 배(船, 일엽편주)에
짐(負, 하루하루)을 싣듯 실고,
실어 보아도
모두가
부질없는 것임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되는
것이다.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禪師) 스님(僧, 沙門)의
이 게송(偈頌)은
읽는 이(讀者)의 마음(心)을
비우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가을 달밤에
어떤 이(人, 衆生)가
배(船, 일엽편주)를 타고
낚시를 하러 갔다.
그 사람이 간 곳(處所)이
바다(大海, 大洋)라 해도 좋고
큰 호수(湖水)라고 해도
상관없는 곳이다.
물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漁)가 물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가운 수면(水面)에
파도(波濤)가 일렁이며 일고
달빛은 교교한데
아무리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고기가 입질을 하며
물지 않는다.
밤은 이슥한데
물고기(漁)는 낚아질
기척이 없어
할 수 없이 낚싯대를 거두고
빈배(滿船空)로 되돌아온다.
만선의 꿈은 사라지고
뱃전에 달빛만이 교교하게
부서질 뿐이었다.
흔히
도(道, 일심성불도)는
텅 비어(空, 無, 虛) 있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노자 도덕경(老子 道德經)에도
나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諸法)은
모두 실체(實體的 存在)가
없는(無常) 것으로
우리들의
의식(意識 알음알이)에 의해
분별(分別, 差別)되어지는
환영(幻影)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영(幻泡影)이
사람을 그렇게도 애타게 만들며
못 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想念)의 파도 속에서
살고 살아 간다.
생각(思念) 그 것은
사실 번뇌(煩惱, 망상)인데
한 생각(一念)이
일어나면(卽 生起)
천 가지 만가지 번뇌(煩惱)가
일어나는 것이다.
연쇄반응으로
서로 서로 관계하면서
기쁨과
슬픔 희비(喜悲)의
쌍곡선(雙曲線)을
이루다가
연기(燻)처럼
사라지고(생노병사 消滅) 마는
존재(存在)들 !
그 본 바탕에는
일체 그 어떤 것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이다.
서양의시인(詩人)
칼 붓세(1872-1918)는
"
산너머 하늘 저 멀리
행복(幸福)이 있다고 하기에
찾아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
라고 하지 않았던가 ?
물론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 링크
(1862~1949)가 1908년에
지은 희곡
프랑스어 제목
《L'Oiseau bleu.》
파랑새 이야기도 있다.
어떻거나
우리는 자신(自己自身)이
텅 비워질 때
비로소
모든 것(諸法空常)에서
막히고 걸림이 없이(無碍)
자유(自由)로워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아관념(自我觀念)의
상(相)을 떠나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면
모든 것(諸法)은
이미 해결(解結)되어 있고
모든 것(諸法)은
이미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禪師) 스님(僧, 沙門)은
당(唐) 나라 때
스님(僧, 沙門)이지만
생몰연대(生歿年代)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에
수록(隨錄)된
야보(冶父 ,
아버지 '부'자가 사람이름으로
쓰일 때 보로 읽는다.)의
송(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야말로
읽는 이(讀者)로 하여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이 송(偈頌)도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에
나오는 선시(禪詩) 가운데(中)
하나(一句)이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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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