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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 18-21
그 형들이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적절하게 위로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8-19절은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 의 종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입니다.
1) 이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친히 엎드리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말은 지극히 자신들을 낮춘 태도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같은 인간적인 기회를 역이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찾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2) 혹자는 요셉이 이 말로써 자기에게 표한 경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마땅한 경의를 자기에게 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 개연성이 없는 것은 요셉은 가끔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형제들 역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유한한 인간에게 양도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부터 꺼려하고 있다는 점을 요셉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셉이 처벌을 부과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식의 해설 역시 반대합니다.
요셉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복자가 되어 주실 것을 바라는 뜻에서 자기가 받은 상처에 보복을 가하는 것을 삼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여기에 대해서 제 삼의 의미, 곧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의미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과 가까운 것으로 보는 만큼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해설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5) 우리는 오히려 네 번째 의미를 좋아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탁하트) 라는 단어에는 '....... 대신에' (in stead of) 의 의미도 있지만, '종속'(subjection)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문사만 아니라면 이 문장은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 '아래' 있는 만큼이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 의미는 '두려워들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 밑에 있는 몸입니다' 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인 만큼 길을 인도하는 것이 자기 임무가 아니라 따라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의문사 ' ' 가 이 단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유한한 인간인 그가 감히 하나님의 경륜을 뒤바꾸는 일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라는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로는 해석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에 있어서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요셉은 신령한 섭리의 의도를 곰곰이 살피는 가운데 그들이 자기를 너무 추켜 세우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자기 감정에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사실 온유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달래는데 있어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배 밑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훌륭한 방법이 따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복수심이 발동할 경우 우리는 우리 모든 감정을 동일한 권위에 굴복시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뜻에서 자기 형제들이 평안하게 지낼 것을 바라고 있는 만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지도자로 모신 가운데 그분의 뜻에 복종할 뿐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온건한 사람을 우리 지도자들로 삼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력하게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다닐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분노를 꺾어 주시지 않는 한 그에게로부터 수천 번 죽음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처지가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권리를 쥐고 계시는가 하는 점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 분노를 달래는 유일한 처방이듯이 우리 마음이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 제 아무리 불같은 격정이라도 충분히 누그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본문 20절 첫부분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입니다.
본 절에서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섭리를 십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요셉으로서는 용서를 베푸는 일과 그들에게 혜택을 끼치는 것을 일종의 강제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의 언어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요셉은 형제들의 슬픔을 달래고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온갖 수단을 다 기울여 그들의 죄악을 덮어 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좀 더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그들의 잘못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요셉이 그 형제들의 표리부동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앞에서와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경륜에 의해서 애굽에 이끌려 오게 된 것은 자기 형제들의 생명을 보전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려면 이 목적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형님들의 생명을 저에게 맡기셨는데 만약에 제가 제 손에 맡겨진 은혜를 충실하게 나눠주지 못한다면 저는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사람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라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동시에 요셉은 하나님의 집행에는 인간의 어떠한 악(惡)도 달라붙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만사가 그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의 악한 꾀와 하나님의 뛰어난 공의를 잘 구별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팔아 넘긴 잔인성과 배신은 정말 가증스러운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으로서는 결코 하늘의 경륜과 무관하게 팔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눈감아 주었다가 나중에 가서 이 사건을 이용하려는 뜻에서 잠자코 계셨거나 그들의 악의의 고삐를 풀어주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그가 확고하게 의도한 행동의 순서를 정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악한 동의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팔렸다는 점을 하나의 기정 사실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이 온당한 말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탐욕과 관계되는 것을 전부 인정하셨다는 의미에서의 공동작업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아우를 죽이려고 음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부터 요셉과 이 형제들의 구출을 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것도 그분의 뜻과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모두 인정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계획을 다스리며 그들의 뜻을 휘어잡고 그들의 노력을 원하는 대로 돌려놓으며 만사를 통제하시고 제어(統御) 하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시도할 경우 그분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활기를 넣어주시며 감동시키기 때문에 그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그분에게서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단과 불경건한 자들이 횡포를 부릴 경우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악한 행동이 장본인들에게 돌아가고 그것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전가되도록 하십니다.
신실한 자들이 성령의 충동에 이끌려 올바른 행동을 하는 방법으로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각자의 악의 주모자요 사단을 그들의 지도자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 죄악의 흑암 속에서도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결코 그의 행동에 대한 공정한 원인이 없지 않듯이 인간들은 각자 사악한 뜻에 따라서 죄책의 쇠고랑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악한 기대와 부당한 욕망을 죄절시켜 버리신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적잖은 위로를 받습니다.
무례한 자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멋대로 바삐 쏘다니며 실컷 성질을 부리며 하늘과 땅을 뒤범벅으로 만들게 내버려 둡시다. 그들이 그들의 광분을 통해서 얻는 것은 전무할 것입니다.
그들의 격렬한 행동은 무기력한 것으로 입증될 뿐 아니라 그들의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요, 그 결과 그들은 그들로서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지만 우리 구원을 꾀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무슨 독을 뿜어내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선택자들을 위한 약(藥)으로 뒤바꿔놓고 마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기대에 반해서 그가 죽음으로 가득 찼을 뿐이었던 시초의 여러 사건들로부터 즐거운 결말을 이끌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받은 자들의 음식을 독(毒)으로 뒤바꾸고 그들의 빛을 흑암으로 뒤바꾸며 그들의 식탁을 덫으로 뒤바꾸는 한마디로 그들의 생명을 사망으로 뒤바꾸는 하나님의 처사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공의와 정직에 입각한 것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으로서는 이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인 주제에 교만하게 그들을 주물러 만드신 분을 상대로 으시대기 보다는 겸손하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신비를 칭송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3. 본문 20절 끝 부분은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입니다.
요셉은 자기 직무가 하나님 섭리의 의도에 종속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이 온건을 개발하는 가운데 각자가 신앙의 눈을 통해서 저 높은 곳에서 세상 통치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각자 직분의 한계를 지키며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의 권고를 받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살피고 각자 임무를 스스로 수행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이유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광신자들처럼 혼잡하게 날뛰는 가운데 이리 저리 배회하는 일이 없도록 삼가야겠습니다.
자기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도록' 신령하게 선택받았다는 요셉의 말을 애굽인들에게까지 확대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이 말의 범위를 야곱 가족에게 국한시킵니다.
요셉은 교회 후손이 자기 수고를 통해서 파멸로부터 구출되는 상황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돌리며 그것을 여기서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수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후에 일으켜 세우신 막대한 무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후손은 그 숫자가 불어나기 전에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4. 본문 21절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입니다.
1) 요셉은 시종일관하여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신의 의지를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요셉은 그 형들이 행한 악한 행동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서 결과적으로 도리어 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20절).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에 근거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가 지금 뿐 아니라 그들의 장래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말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2) 악의와 상처를 끼치는 일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뿐 아니라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것'(롬12:21)이 거짓 화해가 아니라 확고한 화해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도움을 줄 위치에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할 계기가 와 있는데도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 행동을 통해서 그가 아직도 상처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보복을 하지 않을 경우 그것으로 남의 과오를 용서해 준 것으로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움을 베푸는 일에서 우리의 손을 떼는 것이 곧 앙갚음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처사입니다. 가령 형제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를 돕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꼭 필요한 경우에 도움을 간청하는데도 그가 우리에게 불친철한 행동을 한 일이 있다 해서 그를 버린다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돕지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학대한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만이 우리는 우리 마음에 완전히 악의가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마음' 에 깊이 간곡하게 이야기했다는 말은 그가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함으로써 그들의 모든 염려를 말끔히 씻어 없앴기 때문입니다.
세겜이 디나를 유혹하면서 그가 그녀에게 끼친 수치는 망각하고 그녀와 결혼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그녀의 마음에 대고 간곡하게 이야기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4) 이렇게 요셉에게는 우리 주님에게서나 기대되고 맛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 아래 자신을 놓을 때 이런 은혜가 그 사람을 통하여 공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가는 일이 자기 임무일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심도 있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절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된다는 사도바울의 말이 그런 뜻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런 내용이라고 믿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 위에 쏟아 부으시는 은총의 의지는 지금도 우리의 위로와 격려의 내용이고 장래에도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그런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