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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스 8: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스 8:20)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기간 중에는 성전 예배가 사실상 폐지되었었기 때문에 레위 자손이 해야 할 특별한 임무가 없었으나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는 유다인 들에게는 제사 직무를 감당해야 할 레위 자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본국으로 귀환할 유다 백성들을 아하와 강가에 모으고 삼 일 동안 장막에 거하며 출발 준비를 하던 에스라는 귀환자들 중에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레위 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다시 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들이 귀환하고자 모인 무리 중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본토로 귀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운데 레위인이 하나도 없었다는 충격적인 일은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이 자신들의 성역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충한 처사였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된 직분에 있을 때, 그리고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을 때 더욱 근신하여 자신의 사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자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본국으로 귀환할 백성 중에 레위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안 에스라는 모든 족장과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가시뱌 지방에 가서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 자를 불러 데라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합당한 사람은 언제든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군들을 찾아 그들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성전 봉사자들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에스라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군들을 부르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직접 그들을 찾아가 일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 형제를 찾아가셨고,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친히 죄인들을 찾아가십니다. 우리의 영혼은 물론 생활 깊은 곳까지 찾아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일군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일군들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40년 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부름 이후에 아라비아에서 3년 간 훈련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은 훌륭한 일군을 탄생시킵니다. 성도도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서 그 직임을 다하는 자가 됩니다. 훈련은 고되고 힘드나 그것을 통과한 자에게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우리도 성도의 훈련인 고난의 시험을 믿음과 인내로 이겨내야 하나님의 선한 일군으로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일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훈련을 통과한 일군들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보내십니다. 일꾼들이 가야 하는 곳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입니다(행 1:8). 가는 자는 보내는 자의 뜻을 따라 세상에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곳입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선교사들을 다 내쫓고 성경을 불태워 버렸다합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기독교를 장사 지냈다고 선언했지만, 성령까지 그 땅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중국 땅에 지하 교회를 남겨 두셨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보면 1982년 둥이라는 한 자매가 여자 죄수들만 600여 명 갇힌 감옥을 천국처럼 변화시킨 간증이 나온다합니다. 감옥에서 새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성경을 원하자 성경을 몰래 갖고 있는 자매들은 낮에 무려 10시간이나 힘들게 노동한 후에도 밤에 다른 죄수들이 다 잠든 틈을 타 이불 속에서 전등 빛을 비춰 필사적으로 성경을 노트에 베끼고 또 베껴서 다른 사람에게 줬다. 이렇게 손으로 베낀 성경이 한 권 한 권씩 각 호실로 전해지면서 자매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밤에 이불 속에서나 화장실에 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합니다. 그리해 감옥은 성령의 역사로 점차 놀랍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말씀과 기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굶주린 자들을 찾으십니다. 기도에 목마른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보내소서 하며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성전의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길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성전에 수종들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신 손길로 일꾼들을 도우시는데 사랑의 손길로 도우십니다. 병자들을 어루만지시고 죄인들을 감싸주시며,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으시는 손입니다. 때로는 굶주린 무리들에게 떡을 떼어 먹이셨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시면서 흘리신 눈물을 닦으셨던 손입니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를 향한 모든 사랑을 실천하신 손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은 봉사의 손이었습니다. 그는 공생애 기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봉사는 묵묵히, 그리고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진정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희생은 가장 고귀한 사랑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포기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희생이 있을 때 사랑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사랑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못 자국 난 손입니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입니다. 그리고 그 손은 피 흘린 손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은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 손을 우리에게 펼치시고 죄인을 부르십니다.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죄인들은 모두 죄 사함의 은총을 받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께 의해 주도되어 진행됩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크게 '구속 역사'와 '일반 역사'로 나뉘어집니다. 구속 역사는 성경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구속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진행되며, 일반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구속 역사'의 주체로서 '일반 역사'의 한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주님의 오심은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으로 역사는 A.D.(주후)와 B.C.(주전)로 획을 긋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이 더욱 막중한 것임을 깨닫고 감당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역사하심을 믿고 사명 감당 하는 성전의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백성 중에 성전에서 봉사할 자들이 없음을 안 에스라가 그들을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을 때 에스라의 요청에 응한 사람은 약 40여 명의 레위 사람과 220명의 느디님 사람이었습니다.
느디님이란 본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온 노예로서 다윗 시대에 레위인에게 '주어진 자'들로 하나님의 전에서 여러 가지 잡일로 봉사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성전의 종들, 그것도 이방의 혈통을 가진 느디님 사람들의 명부가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영적으로 주님의 성전된 자체가 혈통이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는 그가 비록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내 모습 이대로 드리며 쓰임 받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적당한 모델을 찾아 빈민가를 두루 돌아다니던 어느 화가가 마침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거지에게 그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 보상을 하겠다고 하여 쌍방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그 거지가 화가를 찾아와 '저와 약속하셨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그를 살펴보던 화가는 '뭔가 잘못 생각하셨나 봅니다. 저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 저는 이 시간에 어떤 거지를 만나기로 했을 뿐인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제가 그 거지입니다.' 라고 하자 '당신이? 아니 어떻게 된 것이요?'라고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실은 모델이 되려면 몸치장을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라고 변명하자 '나는 본래의 당신 모습이 필요했던 것이요.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었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D. L. Moody-
우리도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헌신하기를 원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뜨대로 쓰임 받게 됩니다.
레위인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다윗 시대부터 3계급으로 나뉘어 제1계급은 제사장에 직접 봉사하고, 제2계급은 성전에서 풍류 잡는 사람들과 같이하고, 제3계급은 성전과 그 문을 수비했습니다(대상 24-26장). 또한 그들은 백성들의 교사가 되어 율법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해 48개 읍과 가축 먹일 땅이 분배되었으며(수 21장), 국내의 농산물과 가축의 십일조를 차지하며 그것의 십일조를 여호와의 거제 물로 제사장에게 돌려졌습니다(민 18:21-31).
그런데 레위 인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레위는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아들(창 29:34)인데 그는 형제 시므온과 함께 누이동생 디나의 불행을 분히 여겨 세겜 족속에게 복수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야곱과 레아의 몸에서 태어난 디나가 하루는 세겜 성의 여자들을 보기 위해 밖에 나갔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약 15-6세 정도로 세겜 여자들의 옷치장과 그들의 춤추는 것과 무엇이 유행되고 있는가를 보러 나간 것 같습니다. 또 한편 자기를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분방한 행동이 잠시 이어질 강간 사건의 간접 원인 제공이라는 사태를 부른 것입니다. 외출 나간 디나는 세겜 성의 추장 세겜의 눈에 띄었습니다. 하몰가의 아들 세겜은 한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었는데 야곱의 딸 디나를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반하였고 디나를 강간하였습니다. 디나를 욕보인 세겜은 그 마음이 깊이 연련하며 디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고 자신의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를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디나의 강간 소식을 최초로 접한 사람은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그 아들들이 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들끓는 분노를 삭였습니다. 야곱과는 달리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수치에만 마음을 빼앗겨 거의 이성을 잃고 격분하였습니다. 세겜의 요청에 따라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찾아왔으나 그는 아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없이, 그리고 피해자이며 당사자인 디나의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야곱에게 청혼하였습니다. 하몰은 청혼만을 한 것이 아니라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어떠한 빙물과 예물을 원할지라도 다 들어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두 아들은 동생인 디나를 아내로 달라는 세겜의 제안을 교묘히 악용하여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을 비롯한 하몰가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즉 종교적 이유를 들어 결혼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역 제안을 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가를 속이고 원수를 갚기 위해 다름아닌 종교적인 문제를 이용하여 세겜과 디나의 혼인에 할례가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속여 그들 모두가 할례를 받도록 제안한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의 할례의 요청을 좋게 여기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습니다. 세겜은 자기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고 신속히 할례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세겜 족속들이 일제히 할례를 행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시므온과 레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가지고 성을 엄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후에 다시 야곱의 여러 아들이 가서 재물과 가축들을 노략하고 그 성의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아들들의 만행 소식을 접하고 심한 근심에 빠졌습니다. 즉 야곱은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쳐들어올 때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자신이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을 인하여 두려워한 것입니다. 레위의 이러한 과격한 복수 행위는 아버지 야곱에게 누를 끼쳤고 그로 인해 야곱은 임종시에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습니다
(창 49:5-6)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레위의 자손으로 하여금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선택하셔서 성전의 봉사자로 세우셨습니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이는 죄인 된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일군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는 아무리 큰 범죄를 행한 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자신의 사역을 잃어버린 레위인들을 찾아 다시금 그들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는 에스라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주십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질척거리는 흙길을 마차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 사정이 얼찌나 안 좋던지 마차를 끄는 말들이 한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진흙탕물이 여기저기로 마구 튀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창문을 내다보던 황제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지 노인의 모습이었는데, 그의 차림은 다 찢어진 옷에 허름한 모자, 그리고 닳아빠진 구두,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걸친 것 중 어느 하나도 그의 몸을 비로부터 보호해 줄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황제는 마차를 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 들고 마차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때 시종이 황제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습니다. "어차피 저 거지가 비를 맞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황제님의 신발을 벗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에 황제는 시종을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마차를 타고 있으므로 신을 벗거나, 신거나 발이 비에 젖지 않는 것은 같지 않겠느냐. 내게 필요 없는 것을 저 노인에게 주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황제는 마차에서 내려 손수 거지에게 신발을 신켜준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황제는 자신에게 있으나 마나한 신 발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예구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 삼아 주심에 감사하며 성전의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끊어졌던 여호와 제사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부름에 응한 사역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고, 잃어버린 신앙과 그들의 직임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전 예배의 최고 봉사자인 제사장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는 속죄 제사가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그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물을 가지고 중재역을 담당하는 제사장을 통하는 나아가는 길입니다. 죄인이 사유함을 받는 방법은 오직 희생 제물을 통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희생 제물 없이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재 역할을 담당하는 일로 봉사하는 직임이었습니다.
에스라가 제사 직무를 수행할 레위 자손을 찾은 것은 하나님의 전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제사장의 중보 역할은 불완전한 것으로서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인간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인도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히 9:6-12)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헌신하는 일꾼 된 줄 믿고 더욱 겸손히 사명 감당하는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가 작가였던 로버트 로빈슨은 한때 타락의 길을 걸었었다합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그 옆에 앉은 할머니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 ' 이 노래를 듣자 로빈슨은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곡이 바로 자신이 지은 곡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문득 자신의 타락한 삶을 되돌아 본 그는 더욱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습니다. 그 후 그는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평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도 죄악된 자라에 있을 때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기억하고 회복의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유명 하였다고 합니다. '드레퓌스'는 부당하게 체포되어 부당한 재판을 받은 후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어 온갖 고통을 겪으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운명에 놓였는데 작가인 '에밀 졸라'는 그의 결백을 믿었으며,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신이 지위와 명성을 잃었을 뿐 아니라 추방을 당하면서까지 노력한 결과, 승리하여 '드레퓌스'에게 자유를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에밀 졸라'가 죽자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드레퓌스'를 친구들이 말렸는데 반대자들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으나 그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내 가슴 깊이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합니다.
우리도 어떠한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나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구속하사 자녀 삼으시고 일꾼 삼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사명 감당하는 성전의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