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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반석과 대적의 반석
(신 32:28-31)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고별 설교이자 노래입니다.
역사상 모세처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많이 체험한 사람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세 구절은 모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0-12) 이와 같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긴박하고 진실하겠습니까?
마지막 노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반석’입니다. “그는 반석이시니”(신 32:4).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신 32:13).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신 32:18).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신 32:30).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신 32:31).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신 32:37).
반석은 ‘큰 바위’(rock)라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본문을 읽으면서 이 본문에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를 묵상할 때, 그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찾고 그 단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모세가 여섯 구절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반석을 경홀히 여기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원수와 대적들에게 팔아버리셨습니다. 원수들 한 명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 천 명을 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방 나라의 신들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렸고 징계했기 때문입니다. 31절에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반석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대적의 반석은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그들의 신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적들도 스스로 판단해서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도 ‘대적의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이방인들의 섬기는 신에도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여 스스로 굳게 살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역경과 환난이 오면 어두운 곳에 가서 쓸쓸히 울고 말 것입니다. 외롭고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의지해야 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 거짓된 모조품 반석
모든 인간에게는 반석이 필요합니다. 그 반석이 참된 반석인지 거짓된 반석인지, 의지할만한 반석인지 넘어지는 반석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들은 반석을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종류의 이름을 가진 신들을 섬기면서 그 신들을 자기의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수많은 신과 사상은 대체로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론(atheism, 無神論)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사상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예배에 참석하긴 했지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 무신론자에게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섯 살 된 이 아이가 그만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내가 의사도 포기한 불치병에 걸렸는데 혹시 나를 기적적으로 고쳐주실 하나님이 계실까요?” 그 때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안 계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아빠. 내가 죽으면 죽은 후의 세계가 있을까요?”라고 물어도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그런 세계는 없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아빠. 내가 죽은 후에 부활해서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고 해도 무신론자 아빠는 “아니. 그런 일은 없을거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아빠. 그러면 내가 죽으면 끝인가요?”라고 묻는다면 결국 무신론자 아빠는 죽어가는 아이를 향해 “그럼. 끝이지”라고 쓸쓸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신론은 사람이 의지할 반석이 아닙니다. 이런 담을 의지하다가는 담도 넘어져서 자기도 다치고 말 것입니다. 무신론은 우리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범신론(pantheism, 汎神論)입니다. 범신론자들은 이와 같이 주장합니다. “나는 신을 믿습니다. 나도 신이요, 당신도 신이요, 우리 모두가 신입니다. 산천초목도, 일월성신도, 나무도, 바람도, 해와 달도 모두 신입니다.” 이들은 땅에 침을 뱉으면 왜 신의 얼굴에 침을 뱉느냐고 따집니다. 소를 잡아서 갈비탕을 끓여먹으면 왜 신을 잡아서 갈비탕을 끓이느냐고 따집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힌두교가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이라고 섬기면서 소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돼지는 잡아먹으니 이 얼마나 모순되고 허무맹랑한 사상입니까? 우리 조상들도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달이 휘영청 밝은 날이면 정화수 한 대접을 떠서 상 위에 놓고 자녀들과 가정의 만복을 빌곤 했습니다. 또 산에 올라가서 오래된 나무에 새끼줄과 색색의 댕기 줄을 두른 후에 돌을 잔뜩 쌓아놓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범신론의 일종입니다.
모세는 이와 같은 범신론을 어리석다고 평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21절). 하나님이 아닌 허무한 것을 섬기는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합니다. 이처럼 범신론도 우리의 기댈 언덕과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셋째로 이신론(deism, 理神論)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신론자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이런 사상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교육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신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신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기만 하셨을 뿐, 더 이상 돌보시거나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시계를 만든 사람이 시계의 태엽을 한 번 감아놓으면 태엽 감긴 것이 풀리면서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칙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자연법칙을 따라 저절로 잘 돌아간다는 것이 이신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신론의 신관을 ‘시계태엽신관’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신 분이기 때문에 선지자를 택하여 계시를 주신다거나,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시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세계 역사를 통치하시거나 병든 사람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시는 일 등도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이신론자들은 계시가 이방 미신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 마술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신론이라는 말 자체가 신을 이성으로 만들어낸 허황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 엄격한 삶을 살기로 유명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사람들이 이신론자였습니다.
이신론은 우리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갈 길을 몰라서 기도해도 이신론의 신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습니다. 병이 들어서 죽게 되어도 이신론의 신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멀리 가서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18절)라고 말하며 이신론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불신론(infidelity, 不神論)입니다. 불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성경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불신론자들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15절)
우리나라에는 불신론자들이 많은데, 이들을 가리켜 무종교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강인철 교수님이 펴낸 「한국 무종교인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무종교인 비율이 세계에서 1위입니다. 무종교인의 비율이 무려 45%입니다. 네덜란드가 36%로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작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종교인들은 결국 무신론자로 전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잘못되는 이치입니다.
한 아버지가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조깅하러 공원에 나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두 개의 운동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15만 원짜리 고급 운동화였고, 다른 하나는 만 원짜리 싸구려 운동화였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 신고 공원에 와서 아들과 조깅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신의 발을 쳐다보며 웃고 지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해서 발을 쳐다보고서야 그만 운동화가 짝재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그만 운동화를 짝재기로 신고 왔구나. 네가 얼른 집에 가서 운동화를 좀 가져다줘야겠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아들이 왔는데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빈손이었습니다. “아니? 운동화는 어쩌고 그냥 왔니?” 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아무 소용없어요. 집에 있는 것도 짝재기던데요?” 짝재기라도 들고 와야 나머지 짝을 맞출 수 있는데 착각한 아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잘못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무신론이나 범신론, 이신론이나 불신론은 모두 넘어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의지할 반석이 되지 못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과 37절은 각각 이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35절).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고 그들에게 복수를 할 때, 그들이 피하던 바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37절)고 말씀하십니다.
2. 참된 반석이신 하나님
인간이 의지하고 피할 수 있는 반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라는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사무엘을 낳은 한나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뿐만 아니라 다윗도 시편을 통해 “주는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높은 요새”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시 18:31).
그렇다면 모세는 반석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을까요?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바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서있고 변함이 없습니다.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동일합니다. 이처럼 바위는 진실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거짓과 어두움과 굽은 것과 숨긴 것과 삐뚤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반석에 부여한 첫 번째 의미는 신실함(Sincerity)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며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거짓된 존재는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거짓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신실한 존재라야 의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구원자(Savior)입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십니다.
세 번째 의미는 축복의 근원(Source of blessings)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신 32:13). 반석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바위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을 보면 바위가 소출해 내는 것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바위를 쳤더니 생수가 나왔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저는 등산을 가도 흐르는 물은 잘 마시지 않습니다.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마십니다. 그것은 약수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위는 꿀을 냅니다. 먹는 사람에게 힘과 영양을 공급하는 최고의 토종꿀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저보다 10년 선배이신 동기생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방학 때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마치시는 날에 그만 불고기를 먹어버렸습니다. 원래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장이 꼬여서 사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불고기를 먹고도 살아났습니다. 궁금해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도 불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대답인즉, 자기가 금식기도 하기 전에 강원도에 가서 큰 병에 담겨 있는 토종꿀을 앉은 자리에서 혼자 다 먹은 적이 있었답니다. 토종꿀 한 병을 다 먹고 나니 혀가 굳어져서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그만 졸도하고 말았는데, 3일 만에 깨어나니 놀랍게도 몸이 너무 가볍고 피로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배도 부르고 힘도 나는 김에 금식기도를 시작했는데 40일을 하고 나서 불고기를 먹어도 위장이 튼튼하고 아무런 탈도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처럼 꿀은 먹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얻게 해줍니다.
또한 바위에서는 기름도 나옵니다.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욥 29:6).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고, 구원자이시며, 모든 생명의 축복의 근원이시라는 의미로 반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반석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로 성도들은 반석을 피난처(Refugee)로 삼습니다. 등산하는 중에 광풍이 불고 벼락이 치면 큰 나무 밑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늘 아래로 피해야 합니다. 반석은 피난처가 되므로 거기에 가면 안전합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올 때, 인생의 폭풍우가 불 때 우리는 반석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시 61:2-3)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께 피합니다. 나를 더 높은 바위로 이끌어 주시고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가 되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반석에서 새 힘을 얻습니다(Refreshment). 반석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피곤한 자에게 꿀과 기름을 주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살아갈 용기를 잃고 좌절하신 분들이 있다면 반석으로 나아가십시오. 방석 한 장 들고 강대상 앞에 나와 일주일 동안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꿀과 생수와 기름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순복음교회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건축업을 하셨는데, 학교도 지어서 이사장까지 지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IMF 때문에 사업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빚 독촉으로 시달리던 장로님은 어느 날, 자신의 승용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무작정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갔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름이 떨어지는 곳에서 죽으리라’고 생각하며 달리다가 옥천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산길을 따라 달리던 도중 작은 침례교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그냥 그 교회에 들어가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작정 앉아 있었습니다. 목마르면 물을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데 목요일쯤 되니 자기의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용기가 생기고 토요일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라는 음성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더니 친구들이 몰려와서 자신을 도와주고 빚도 갚아주는 바람에 건축업도 다시 일으키고 학교도 다시 세워 이사장도 되었습니다. 재기한 후에 이 장로님은 옥천에 있는 그 조그만 침례교회에 헌금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옥천 교회의 목사님이 산 속에 예배당을 지어놓으니까 이런 일도 다 있다며 좋아 하시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반석에서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들은 반석에서 휴식(repose)을 얻습니다. 반석은 휴식처가 되어 줍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신약에서 재확인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인생을 살다가 지치신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 앞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작고하신 이중표 목사님께서 사모들을 대상으로 쓰신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님 두 분이 어느 날 함께 산기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산에 올라가자마자 방석을 깔고 “주여! 부흥을 주시옵소서”라며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교회에 내려갔습니다. 반면에 다른 목사님은 산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이불을 깔고 자리에 누워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내려가셨습니다. 푹 쉬고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잠을 푹 잔 목사님의 교회는 부흥되고 밤새 철야기도를 한 목사님의 교회는 별 변화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기도하신 목사님은 날마다 피곤한 표정으로 설교를 하는 바람에 성도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한 반면에, 잘 쉬면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은 늘 밝은 얼굴로 설교하고 심방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이 많이 모인 탓이었습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이중표 목사님은 사람에게 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셨습니다. 반석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
이시며, 우리의 휴식처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반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이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예수님께서도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헬라어로 베드로는 ‘페트로스’, 즉 작은 바위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작은 반석이 아닌 큰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페트라’, 즉 큰 바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교회의 반석이 되시니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반석이 되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십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3). 여러분들은 반석에 걸려서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인류의 역사는 이방신을 섬기고 의지하는 일이 축복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피난처와 축복의 근원과 휴식처가 되어주십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이를 증명합니다. 한일합방과 을사조약 이후,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하나님께 모여서 기도하고 회개할 때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피해야 합니다. 죄악이 몰려와서 우리를 유혹하고, 원수가 몰려와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며, 폭풍우가 몰려와서 우리를 절망시키고자 할 때, 어느 때든지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피해야 합니다. 반석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수와 꿀과 기름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파는 개인과 국가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렘 2:13). 모세의 마지막 노래처럼 반석을 경홀히 여기거나 떠나지 말고 반석을 시시때때로 의지하며, 반석 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와 꿀과 기름을 맛보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