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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1940년대 말∼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한 동향.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 후, 미국에서 알프레드 바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36)의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R.코츠가 H.호프만의 전람회명(46)에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J.폴록, J.뉴먼, M.로스코, C.스틸, W.데쿠닝, F.클라인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채의 場의 회화)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되었다.
또 이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한 조각에도 사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과는 이질적인 동향에 주어진 이 용어는 편의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그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인 요구에 호응한 것이다. 한편, H.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이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린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팝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팝 아트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구상미술의 경향.
1950년대 초 영국에서 그 전조를 보였으나 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구상미술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술평론가 L.앨러웨이가 54년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팝 아트가 비평용어로 채택되기 이전에 팝 아트적 징후를 상기시키는 작품이 영국에서 나타났다. 즉 49년부터 F.베이컨이 작품에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팝 아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나 베이컨은 팝 아트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으며, 54~55년 겨울에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공동작품 및 그것과 관련된 토론 가운데 팝 아트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관심 아래 조직된 전시가 56년에 열린 ‘이것이 내 일이다’이며, 이 전시에 R.해밀턴이 출품한 《오늘날 우리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팝 아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팝 아트는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의 근친성을 보여준다.
영국 작가로 해밀턴을 비롯 P.블레이크, D.호크니, R.B.키타이, E.파올로치 등이 있으며, 특히 해밀턴이 바람직한 예술의 성질로 열거하고 있는 것들, 예컨대 순간적, 대중적, 대량생산적, 청년문화적, 성적(性的), 매혹적, 거대기업적일 것 등은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대로 압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팝 아트의 성격은 미국적 사회환경 속에서 형성된 미술에서 더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세대인 R.라우션버그와 J.존스는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각종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활용하였는데, 이들의 작업이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로 불려졌고, 그 외에 신사실주의, 신통속주의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미국 팝 아트의 대표적 작가는 A.워홀, R.리히텐슈타인, T.웨셀만, C.올덴버그, J.로젠퀴스트 등과 서부지역의 R.인디애너, M.라모스, E.에드워드 키엔홀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작가가 워홀이다. 그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스타나 저명인사들을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묘사하거나 임의적인 색채를 가미함으로써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고 예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팝 아트는 텔레비전이나 매스 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 고속도로변의 빌보드와 거리의 교통표지판 등의 다중적이고 일상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코카 콜라, 만화 속의 주인공 등 범상하고 흔한 소재들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적 구조를 불식시키고, 산업사회의 현실을 미술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발원하는 반(反)예술의 정신을 미학화시키고 상품미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적 대안의 제시보다 소비문화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절대주의
지상주의(至上主義), 절대주의. 러시아혁명시대에 화가 K.S.말레비치가 창시한 선구적 추상회화의 이념이다.
큐비즘의 사고방식을 깊이 파고들어 ‘절대적으로 순수한 기하학적 수상’을 표방하여 1913년 말 모스크바에서 흰 바탕에 검은 정사각형을 두 개 연필로 칠한 그림을 전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 비대상적(非對象的)·비(非)재현적인 순수한 감각 내지 지각을 ‘지상(至上)’의 것, 다시 말하면 회화예술에 있어서의 구극적(究極的)·최후적, 혹은 결정적·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선 사각형을 요소로 하고, 그 뒤 다시 원형·십자형·삼각형 따위를 곁들여, 기본형태만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러한 주장은 15년, V.V.마야코프스키와 그 밖의 다른 전위시인(前衛詩人)의 협력을 얻어 쉬프레마티슴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작품도 《흰 바탕은 흰 방형》(1919)으로 정점에 달한 느낌이 있었으나 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전하여 소련 정부의 미술정책에 따라 부정되었다.
그러나 국외에서는 환영을 받아 27년에는 이전의 선언을 자세히 설명한 쉬프레마티슴 회화론이 《비대상적 세계》라는 이름으로 바우하우스에서 간행되는 등 독일을 위시한 다른 많은 나라에 영향을 미쳤으며, 같은 계통의 비대상주의(르도첸코), 구성주의(타트링) 등과 함께 추상예술의 원천적 계보를 이루었다.
말레비치 Malevich, Kazimir Severinovich (1878.2.23~1935.5.15)러시아의 화가. 키예프 출생. P.C.몬드리안, V.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
다다이즘 (Dadaism)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H.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인 T.차라, R.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8년부터 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23~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우표 등에서 우모(羽毛)·철사·성냥개비·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24년에 초현실주의(surr럂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7)이냐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는 R.리히텐슈타인, J.팅게리, C.올덴버그, H.로젠버그 등을 들 수 있다.
뒤샹 Duchamp, Marcel (1887.7.28~1968.10.2)프랑스의 화가·조각가. 블랭빌 출생.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운동.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로 고쳤다고 한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24년부터이며, 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寫實)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 작풍(作風)에도 추상화의 경향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초현실주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다이즘에서 찾아야 한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기성의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기원을 더 먼 곳에 찾아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입체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술운동 속에서 야수파나 표현주의 이상으로, 입체주의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파나 표현주의가 원색주의를 택하고 강렬한 감정표현을 주체로 삼았다고 한다면, 입체주의는 종래의 회화를 부정하는 순수한 이념화(理念化)만을 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한 개의 화면을 완벽한 평면으로 보는 관점이며, 일찍이 세잔이 추구한 원근법이라든지 전경·후경의 배치와는 별도의 구성, 별도의 공간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초현실주의 공간은 많은 경우, 상상적 공간이며 비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간접적으로 입체주의의 계열을 잇는 공간파악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때까지 빙산처럼 수중에 가리어 있었던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렸다. 즉, 이성(理性)의 반대의 극점, 합리의 반대쪽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술은 이성과 감성, 정신과 마음이 합치는 지점에 그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미 예술은 그러한 조화·통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아는 밝음과 어두움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자아의 확대라는 문제에 제일 먼저 눈뜬 것은 낭만주의였다. 여기에 미술사가들이 지적하듯, 낭만주의에서 직접 초현실주의로 맥을 잇는 정신의 계보가 있다. 한 예로서 독일 낭만파의 노발리스, L.티크, W.H.바켄로더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술환상》의 저자인 바켄로더는 끝없이 감미로운 도취상태에 그의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티크는 격렬한 자아의 분열상태 속에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티크의 대표작인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상의, 이 끝없는 동요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나의 마음을 살짝 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그 부드러움이 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려준다면, 나는 행복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게 되고 예술가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억압할 수가 없다. 불가항력이라고나 말해야 할지. 나의 계획·희망·신념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감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또한 《푸른 꽃》의 저자인 노발리스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꿈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했던 사람이다.
독일 낭만파 문학에서 영향받은 독일 낭만파의 회화는 O.룽게나 C.D.프리드리히의 회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동경을 그 특질로 삼고 있다. 또 그들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초현실주의는 종교감정 대신에 프로이트의 리비도설(說)이 도입된다. 따라서 인간의 숨겨진 부분에 상상력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보아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인 V.위고는 그의 데생에서 이미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여류작가 G.상드가 풍경화 속에다 이끼나 꽃 같은 것을 붙인 것도 일종의 콜라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무형체를 지향하였다. 창조력이란 그것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현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비구상(非具象)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는 자아를 절대시하고, 그것에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했을 때에 비로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의 갖가지 시도는 시·회화·사진·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연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모순된 현실과 결부되어 예술일반의 인식을 비약시키고 20세기 특유의 환상예술을 발흥(勃興)시키게 된다.
특히 미술의 경우 초현실주는 종래의 공간의식과는 별도의 비현실세계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였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M.레이의 레요니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와 같은 테크닉이 충격의 효과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R.마그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그 밖에 Y.탕기, M.뒤샹, A.자코메티, 레오노르 휘니, J.B.파렝, 투아이앙 등을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운동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하나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의 파괴적인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브르통, L.아라공, P.엘뤼아르, F.수포, A.페레, R.데스노스, 크르베르 등이 《쉬르레알리슴 혁명》지(誌)(1924∼29)를 통해 문학 운동을 펼쳤다.
영감(靈感)의 발생을 천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힘의 찬양, 자동기술(自動記述)에 대한 깊은 신뢰, 초현실적 사실의 열렬한 탐구와 평행하여 사회생활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모든 것의 금지를 문제삼고 혁명을 통한 자유의 도래를 그려보며 영원히 온갖 제약을 파기하고, 종교적·정치적 신화를 타도하고 사회의 명령에서부터 해방된 개인의 승리를 보장하려 했다. 또한 문학·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종교·정치의 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주의로서 형성되었다.
1924년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선언》의 발표와 기관지 창간 이후의 수년간, 이 운동의 불길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문체론》, 엘뤼아르의 《고뇌의 수도》, 브르통의 《나자》 등이 이 운동의 실험에 있어서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새로운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이 창간되고, 초현실주의와 초합리주의가 일체를 이루는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공동작 《무원죄수태》, 브르통의 대표시집 《자유로운 결합》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일파의 혁명적 야심은 점차 인간의 미적·윤리적 개념의 전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정치면에서의 직접 행동으로 옮아갔으나, 초현실주의의 이론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치에 실패하여, 이 운동은 분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열린 국제혁명작가회의에 참석한 아라공은 소련에서 정치시(政治詩) 《적색전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후일 이 시가 프랑스에 전해지자 이른바, ‘아라공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택한 아라공은 다음해 이 그룹에서 제명되었다.
30년대에 접어들자, J.위녜의 《쉬르레알리슴 소시선(小詩選)》, 브르통의 《새벽》,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시집 《민중의 장미》, 화가인 S.달리의 《비합리의 정복》이라는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나옴으로써, 문학·회화 양면에 걸쳐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초현실주의는 국제선전운동으로 나타나, 36년에는 런던에서, 38년에는 파리에서 브르통, 엘뤼아르가 중심이 되어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이 열렸다. 그 사이 브르통의 《미친사랑》, 엘뤼아르 시집, 로트레아몽의 《전집(全集)》이 출판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브르통은 36년의 에스파냐내란 이래로 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엘뤼아르와 드디어 결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재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과 신화의 인식과의 방향으로 쏠렸다. 대전중에 브르통, 베레, 달리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에서 초현실주의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47년 귀국한 브르통이 파리에서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을 열고 공산당과 실존주의자들에 대한 집단선언서 《즉시결렬》을 발표하였다. 이 방향에서 나타난 전후의 대표적 작품은 브르통의 시집 《샤를 푸리에에게 주는 오드》가 있다. 유파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일단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미학적인 면에서의 영향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크다.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의도를 나타낸 대표적 기법으로, 가능한 의식(고정관념,이성들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손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움직임과 형태를 작품화한 것이다. 에른스트가 발견한 프로타주와 오스카 도밍게즈가 작품에 이용한 데칼코마니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의 오토마티즘은 미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구절들을 이성의 통제없이 무의식적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을 말한다. 초현실쥐의 미술의 초기인 1920년대에 이 기법이 주로 쓰였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마송과 미로가 있다.
에른스트가 1925년 여름에 마룻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한 기법으로, 나무 파편이나 나뭇잎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질러 그림이 떠오르게 하는 수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 아니라 몇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서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 자체의 우연성을 중시하는 프로타주로 제작한 초기의 34점의 작품은 에른스트는 박물지 (historre naturelle)라는 책자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형상들은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헝겊 따위가 인간의 머리,괴물,바다 풍경등으로 변모된 것이다.
원래는 도기나 유리기구등에 특수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옮겨서 염색하는 기법으로, 회화에서는 미끄러운 성질의 종이에 물감을 칠하고 그것을 접었다가 다시 피거나 또는 다른 종이를 그 위에 대고 눌렀다가 뗄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작품에 이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기법에 따른 우연한 형태 - 산맥, 산림수목, 인간장기 등 - 에 부분적으로 가필을 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영상을 표출하도록 한다. 1935년 오스카 도밍게즈가 그의 과슈작품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에른스트도 2차세계대전 직전에 종종 이용했다. 예전의 그림붙이기에 사용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리 즉, 완성된 그림을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얼굴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문학에서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로트레아몽의 싯귀는 데페이즈망의 적절한 예라 하겠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는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으므로써 꿈속에서 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이는 심리적 충격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데페이즈망의 대표적 작가로는 마그리트를 들 수 있으며 꼴라주와 오브제도 일종의 전위라 할 수 있는데 이 방법들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기여했다.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감광 재료 위ㅣ해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 속에서 추상적 사진을 찍은 것이다. 포토그램과 같은 것으로 파리에 있던 미국의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3년 블룸이란 잡지 4월호 표지에 발표하면서 이 명칭을 붙였다. 후에 그는 자작집에서 레이요그래프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1921년 자비로 출판의 한정판으로 레이요그램 작품을 트리스탄 짜라의 시와 함께 발표한 바 있다.
화면에 인쇄물,천,쇠붙이,나무조각,모래,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질을 붙여 구성하는 기법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도 기성품에 손질을 가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물체끼리 조합시키므로써 별개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비유적,연상적,상징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으로 쓰인다. 에른스트는 1919년부터 초현실주의적인 꼴라주작품을 시도했는데, 그의 작품은 잡지,카탈로그, 삽화등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오려 아무 관련성없이 재배치하여 부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세계를 일깨운다. 또한 1924년 <두 어린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랐다>라는 작품에서는 문짝,손잡이 등의 사물을 꼴라주하여 초현실주의 사상에 부합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예술과 관련없는 물견,또는 그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 용도에서 떼어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재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발견된 오브제, 환영 오브제, 봉상적 기능의 오브제, 존재적 오브제 등
막스 에른스트
1919년 꼴라주 작업을 했는데 이는 무의식에 이르기 위한 최초의 시도로서 여러 가지 기계도면이나 식물학 도판 그리고 옛 판화와 삽화등을 임의로 오려내어 자유롭게 배치한 작품이다. 손과 겹쳐진 눈동자, 얼굴 부분에 독수리 머리 사진을 붙인 누드의 여인, 사람 형태로 변형된 기계 부품등 평범한 이미지들이 콜라주되어 기이하고 놀라운 상황을 연출한다. 1924년작 < 꾀꼬리에 위협받는 두 아이 >에서도 작운 문틀등의 오브제를 이용한 꼴라주기법으로써 무의식적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1925년에서는 프로타주 즉 나뭇결, 나뭇잎 등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연필로 문질러 우연적 이미지를 얻은 기법을 발견하였으며 숲 연작등에 이를 도입하였다. |
앙드레 마송
마송이 회화에서 의도한 것은 브르통의 자동기술과 같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려지는 자동묘사 그림이다. 주로 드로잉적 회화, 물감·모래를 혼합한 모래 그림 작업을 한다. 브르통과 알게된 직후 1923-24년에 그는 재빠른 선묘에 의한 드로잉 작품을 통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자신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나타내었으며 그의 드로잉은 기이한 동물,신화적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
호앙 미로
추상적이며 자동주의적 표현방식에 열중한 작가로서 붓의 미끄러짐,회화적 재질감, 행위와 기호의 유희를 통해 독특한 생물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밑그림없이 직접 캔버스에 작업을 기도하여 영혼의 움직임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의 화폭을 자아의 순간적 투영의 장으로 만든다. |
살라도르 달리
1930년 편집광적 비평이란 방법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는데 이 기업은 극사실적 묘사에 의해서 체계를 갖는 망상으로서 내용은 비합리적이나 진실인 것 같이 매우 논리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중형상,위치전환,성질전환을 통해서 풍경이나 공간의 공포,변태적 에로티즘,음식에 대한 강박관념등을 소재로 그렸다. |
르네 마그리트
마그리트는 벽지 제조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26년 문학가들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형성하고 1927년 이후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중이미지의 우연한 만남이나 환상세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그려지는 대상의 세부확대,연관성없는 두 개 사물의 만남, 무생물을 생명있는 미술로 도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물체 변형 등으로 제작된다.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거나 사물이 갖는 고유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전혀 다른 의미의 초현실 이미지를 화면속에 탄생시키는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작가이다. |
파리파
파리화파는 양차대전사이에 관용 분위기속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파리에서 실행되었던 모든 종류의 미술 - 형식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창조 그룹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이르기까지 - 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브라크, 레제, 마티스, 피카소 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화파의 대표자로 칭해진는 것은 '악마들' 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이다. 이탈리아 출신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 수틴, 프랑스 출신 모리스 위트릴로, 불가리아 출신 파신 등으로 가난과 소외속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며 비참하게 산 저주받은 보헤미안 들이었다.
모딜리아니 회화공간을 한정한 탈인상주의와 색채를 제한한 큐비즘의 방법을 이용하였으며 아프리카, 그리스, 중세 초기 조각에서 보이는 인물상, 두상 에 관심을 보인 초상화의 대가였다. 그의 초상화들은 개성적인 우아한 선이 길게 늘여 구사되고 있으며 원시 미술에서 유래한 형태를 사용하였다. |
카임 수틴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정작 ‘라 루슈’라고 알려진 낡은 저택에서 만난 화가들을 통해 그의 길을 찾은 수틴은 인상주의 분파를 대표하는 보나르 나 루오를 좋아했다. 수틴 작품의 표현주의적 본질은 직관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으며 외견상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면서도 대단히 묘사적인 붓놀림으로 표현되었는 데 이는 월렘 드 쿠닝과 가깝다. 또한 지나치게 격정적인 기질로 인해 고통받은 고흐계열의 화가이다. 그는 부셔지고 찢겨진 듯 한 풍경화 <뒤틀린 나무> , 불안하고 애처로운 듯 뒤틀린 초상화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충격적이고 혐오스런 정물화 <정육점 수소> 와 같은 작품을 그렸다. |
줄스 파신 파신은 초기부터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삽화가와 풍자화가로 재능을 보였으며 독일에서 더 명성을 얻었다. 1912,3년 낭만적 분위기의 인물화를 그렸으며, 우아하고 분위기 있는 색조의 그림속에서 유쾌하게 인생을 이끌려 하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1914년에 20년 때에는 미국에 있어서의 모더니즘 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모리스 위트릴로 어릴때부터 알콜중독과 같은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낸 위트릴로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루소의 재능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의도적으로 소박한 형식의 회화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그가 자란 몽마니의 교외와 몽마르트 교외를 그린 것으로 거친 필치의 질감과 차분한 색채의 경향을 보인다. 그 뒤 그는 피사로의 후기 회화를 연상케 하는 인상주의 단계로 들어갔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을 계속 반복해서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하며 살았다. |
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新卽物主義)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반(反)표현주의적인 전위예술운동. 신현실주의 또는 독일어로 노이에 자흐리히 카이트라고 한다.
이 명칭은 1923년 만하임미술관에서 미술관장 하르트라우프가 기획하여 열린 전람회의 이름에서 나왔다.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에만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파악을 등한시하고 비합리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데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한 실재감의 회복을 기도한 운동이다.
주동한 화가로는 베를린의 다다이즘운동에 가담한 G.그로스 및 O.딕스가 있다. 그로스는 처음 디자인 관계의 일에 종사했고, 또 신문이나 잡지에 풍자적인 데생을 발표하여 인정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사회에 직면하자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독일의 군국주의와 부르주아지에 대해 통열한 비판자가 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아들인 딕스는 사회의 암흑 속에 사는 인간의 비참함과 추악함을 박진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폭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크라나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밖에 주목되는 화가로는 실내나 정물을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G.슈림프, 기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A.카놀트 등이 있다. 25년 평론가로는 이 운동을 포함한 후기 표현파의 양식을 마적(魔的)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하였다.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이 운동은 박해받아 소멸하였다.
그로스 Grosz, George (1893.7.26~1959.7.6)독일의 화가. 베를린 출생. 베를린 미술공예학교에서 수학하였다. |
딕스 Dix, Otto (1891.12.2~1969.7.25) 독일의 화가·판화가. 라이프치히 근교 게어 출생.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장식화가로서 수업을 하였다. |
플럭서스
플럭서스는 196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플럭서스 미술가에게는 사회적 목적이 미적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의 주된 목적은 부르조아적인 판에 박힌 미술과 생활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이 용어는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조지 매키우너스가 처음 사용했으며 여러나라의 언어에서 ‘흐름’이나 ‘변화’란 의미를 내포하는 플럭서스 미술은 양식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플럭서스 미술가들의 전형적인 제작 방식은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많은 미술 형태가 동시에 그리고 불협화음처럼 전개되는 플럭서스 이벤트는 동시대에 등장한 액션이나 후에 나온 해프닝과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플럭서스 이벤트는 산책하거나 나무를 태우는 단순한 동작에서부터 미니 텔레비젼으로 만들어진 브래지어외에는 거의 걸친 것이 없는 샬로트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무어맨과 백남준의 공동작품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플럭서스는 공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미술가들은 ‘우편미술’을 시도했는데 이는 우편 제도를 전달 방법으로 이용하는 미술로 엽서형태의 콜라주와 그 밖의 소규모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플럭서스에서 탄생시킨 또 다른 미술은 때로는 우편 미술과 협력하여 행해지는 ‘고무도장미술’이다. 플럭서스 미술작품은 기상천외하며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그 밑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의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작가로 요셉 보이스, 게오르게 브레히트, 로베르 필라우, 요코 오노, 샬로트 무어맨, 백남준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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