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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를 구원할 방주의 필요성>의 줄거리:
교회를 구원할 방주의 필요성
(고전16:1~24 )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교회를 구원할 방주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교회를 구원할 방주의 필요성!
우리는 흔히들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구원의 방주다’라고.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 구원의 방주가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존립한 기간이 사실 그렇게 만족할만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것처럼 그렇게 침몰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고, 그리고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경우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구원해야 될 방주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구약에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는 선민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선택을 하셔서 선민이 생겨났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얘기하실 때 복의 근원이 되겠다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결국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선민이 형성이 되고 그 선민에 의해서 이방인들 까지도 하나님의 선택받음의 영역 안으로 끌어 들어오게 하시려고 선민을 있게 하신 것이고,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근데 그 선민이 타락을 합니다.
도저히 세상에 대해서 구원을 위한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라를 잃게 하고 성전을 없애버리셨다가, 온전히 그들의 어떤 돌이키실만한 요소가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 구원사를 이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에 의해 나라가 회복 돼서,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가 형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유대교가 또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로마교회를 중심한 서방교회로 발전하게 되면서, 중세에 이르러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같은 영적 현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유대교 시절에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로마의 정부와 결탁을 하고 타협을 하면서 자기들의 위치를 지켜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이 세속권력에 눈을 뜨면서 세속권력자들과 타협을 하거나 딜을 하거나 경쟁을 하는 관계에 돌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유대교화 되어버린 서방교회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현재 교회 상태는 뭐 미국교회 할 것 없어요, 예외가 없습니다.
한국교회 앞서가고 있고요.
또 하나의 새로운 유대교와 같은 경직된 영성의 상태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의 방주가 아니에요, 기능상.
교리상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맞습니다마는, 현재 교회 상태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방주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교회의 현실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고린도교회로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심각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지 않는, 단지 편지를 마무리하는 단계인 것 같아서 의례적인 인사로 채워져 있을 것 같은, 이 마지막 16장에서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해져오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뜻하는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스스로에게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지금의 교회는 더 이상 방주가 아닙니다.
구원의 방주가 아니고 구원받아야 될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 호와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연보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연보.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고린도교회 내부에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권면해 주고 깨우쳐줄 것을 요구해서 전달하지 않습니까?
그 문제들 중에 마지막 문제가 바로 연보의 문제에요, 헌금의 문제입니다.
근데 그 헌금의 목적이 뭐냐 하면,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을 당해서 핍절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음을 알고, 이방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복음의 발언지인 예루살렘교회에 대하여, 그러니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빚진 그 예루살렘교회에 대해서 물질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근데 이게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사도바울이 세웠던 모든 교회에 예루살렘교회의 핍절한 상태가 알려져 있었고, 형편이 허락하는 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는 것이 모든 교회의 과제였던 것 같아요.
근데 이것이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문제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심각하다는 얘기입니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게 되는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구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것이 얘기해 주고 있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뭐냐?
지금 사도바울이 이 마지막 16장에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거론하고 있는 지역과 교회들이 있는데, 그 지역을 다 통틀어 보면, 팔레스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북쪽으로 안디옥교회, 이방교회의 시작인 안디옥교회로 해서 갑바도기아 지방 지금의 터키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터키의 중부에 있는 갈라디아, 그리고 터키 반도의 마지막 에게 해와 인접해 있는 지역의 에베소교회에 지금 사도바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게 해를 넘어서 그리스반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그리스 반도가 바로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이삼십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사도바울에 의해서 이렇게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엄청나게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이에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전하지 않았어도 이미, 그리스 반도를 넘어서 로마에도, 이탈리아 반도에도 기독교인들이 생겨나고 있을 때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이 교회들이 다 하나의 교회로 보이는 겁니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공간적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그리고 그때는 요즘처럼 한 자리에 백 명 이백 명 천 명 만 명이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모두가 다 가정교회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갈라디아교회라 그러면, 오늘 본문에도 ‘갈라디아교회들에게 연보에 대해서 가르친 것과 같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왜 ‘갈라디아교회들’이라 그랬습니까? 갈라디아라고 하는 도시 안에, 가정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이 여럿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역의 교회들이 다 그렇게 있었던 거예요.
로마도 로마교회들, 고린도도 고린도교회들이 있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테바나라는 사람의 가정에서 이루어진 교회가 있었고… 그렇게 가정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지역 지역마다, 가정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교회들이, 지역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모두가 다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것에 대한 증거가 뭐였냐 하면, 제가 이건 지은 이름입니다만, 하나의 교회인 것이 드러나게 되는 증거는 바다수면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바다수면의 원리.
바다수면의 원리는 뭡니까?
바다수면은 유럽에 있는 지중해나, 인도양이나,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모든 수면의 높이가 똑같습니다.
주님의 교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느 지역에 있는 교회든지 간에 결국은 끊임없이 교회가 살아있다면 교회 내부의 움직임이 보이게 되는데, 교회 내부라는 것은 보편적 교회를 말하는 겁니다, 지역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교회 내부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게 되는데, 그 움직임은 물이 높은 곳에 있으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바다수면의 원리에 의해서, 높은 곳에 있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움직임이 있게 돼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었다면.
그 바다수면의 원리가 뭡니까?
오늘 연보로 표현 된 것이에요.
그리고 연보 얘기 그 다음에 나타나는 디모데와 아볼로의 파송문제에 대한 언급도 바다수면의 원리에요.
연보는 물질에 적용되는 바다수면의 원리라 그러면, 아볼로나 디모데를 교회와 교회 사이를 순방하는 자들로 파송하려는 것은, 신앙적 영적 지적(知的) 바다수면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자! 이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하나씩 하나씩 짚어가면서, 얘기를 자세하게 해 주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
근데 연보 얘기가 맨 마지막에 나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냥 일회성으로 한 번 구제하고 끝날 이야기로서 연보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모든 교회의 공통적인 과제, 교회를 하나로 현상적으로 묶어주는 과제가 있었다 그러면, 예루살렘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과제였습니다.
이 과제로 모든 이방교회가 하나로 묶여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연보문제가 마지막에 나왔다는 것의 의미가 뭐냐 하면, 앞에서 교회내의 문제가 돼있었던 모든 문제들이 다 고쳐지고 정상화 되어서, 영적으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회복이 될 때에, 눈에 보이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증거가 뭐냐 하면, 바다수면의 원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지역 간에 교회 간에 부자 교회나 여유 있는 교회가 있으면, 이곳은 높은 곳이라서 여유 없는 교회를 향하여 물질이 물처럼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의 교회가, 보편적 교회로서 지역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로 묶여있다는 증거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면, 뭔가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라 이겁니다.
본질적으로 금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이거에요, 이 바다수면의 원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교회다운 모습으로 시작될 때, 제일 처음에 나타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증거요 현상은 유무상통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이론의 기초로 삼았지마는,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교회와 예루살렘교회와 그리고 그 이후에 이방교회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 바다수면의 원리가 적용되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어제 본 부활신앙에서의 영성적 삶, 그 영성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때에 가능한 일로서의 경제적 평준화를 말하는 겁니다.
공산주의적, 그러니까 있는 자를 대적하는 마음으로, 계급투쟁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하는, 왜 너만 갖고 사느냐고 하는 불만과 불평과 증오로부터 나오는 평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활하는 게 최선이고,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를 내 유일한 소망으로, 가장 강렬한 소망으로 갖고 있는 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주어진 부는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인 것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결과라는 겁니다, 이 바다수면의 원리가.
부활신앙을 마지막까지 완성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부활신앙을 온전히 영성적으로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러면,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이 교회와 교회간의 바다수면의 원리입니다.
근데, 지금 교회가 어떤 상태입니까?
교회가 백억, 이백억, 천억, 이천억, 삼천억짜리 예배당을 짓고 있고, 시골에서 어떤 교회들은, 비가 내리면 비가 새가지고 양동이를 갖다 대고 비를 피해가면서, 교인들이 몰려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뭡니까?
영성에 의해서 지배되어진 교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 되어진 교회라 이겁니다, 자본주의 원리에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 가치에 의해서 완전히 먹혀 버리고 지배당한 교회가 아닌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연보문제가, 예루살렘 교회 때에 유무상통의 문제를 확장시킨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맨 마지막에 넣은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문제들, 영적인 문제들이 다~ 해결 되면, 다 영적인 문제가 온전해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이 회복되었음에 대한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물질의 바다수면의 원리에 의한 이동이라는 겁니다, 그 증거가.
그것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온전한 영성적 차원을 회복했다 그러면, 영적으로 교회가 교회답다 그러면 나타나는 증거, 현상이 바로 그런 현상이라 이겁니다.
전혀 안 그렇잖아요?
그리고 ‘디모데와 아볼로를 보낸다 만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이 얘기를 합니까?
똑같아요.
신앙 안에서의 지적자산, 신앙 안에서의 소프트웨어, 이것들도 물질과 마찬가지로 바다수면의 원리를 통해서 평준화돼야 된다는 겁니다.
나누어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교회가 하나이기 때문에.
지역을 넘어서서 모든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교회 안에서는 바다수면이, 인도양은 수면이 높고 태평양은 낮고 이런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수면이 돼야 되는, 그 한 수면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움직임이 교회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완전히 먹혀 버렸습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어느 그 개척교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들었는데 설교세미나의 1년 등록금이 500만 원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근데 엊그저께, 또 다른 개척교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500만 원이 뭡니까’하고 웃어요, 천만 원이래요 천만 원, 일 년 등록금이.
그렇게 해서 그 설교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목사님은 빌딩을 다 샀답니다.
뭐 빌딩 산 거 좋아요, 빌딩 산 거 좋아요.
그런데 만약에 천만 원씩이나, 그것도 전~부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에요, 대부분이.
어떻게 하든지 좀 교회를 한 번 키워보겠다고, 없는 돈 심지어는 그 말씀을 듣는 중에, 사택 전셋돈을 빼가지고 등록을 한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교회를 어떻게든지 좀 한 번 부흥시켜 보고 싶은 그런 열망 때문에.
그런 돈들을 받아 가지고 빌딩을 샀다는 거예요.
진짜로 천만 원을 내고 배울 정도로 그 설교 방법론이 대단한 것이라 그러면, 그냥 주는 게 옳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분명할 테니까.
근데 반드시 돈 천만 원을 받아야 되겠다면, 그건 사기에요.
그 설교 방법 들어도 절대 설교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받은 게 아니라, 자기가 고안한 것이니까.
스피치 방법, 말하는 것, 수사학, 이런 것은 고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말을 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3초 만에 설득시키는 방법 이런 거, 돈 천만 원 받아야 된다 그러면 자기 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영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는 아무상관 없는 일이니까 목사님들 속지마세요.
절대로 그렇게 배운 설교 때문에 한 사람도 더 오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도 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진짜로 천만 원을 받고 가르쳐 줘야 될 만큼 그 설교의 방법이 대단한 것이라 그러면, 반드시 거저 줘야 됩니다.
그러면 나는 뭘 먹고 사느냐?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리시는 섭리에 맡길 일이지, 내가 돈을 받아가면서 그 설교학을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근데 이러한 모~든 신앙세계 안에서의 지적자산들이 다~ 돈으로 환산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망조에요, 망조(亡兆).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내게 기가 막힌 설교 방법론을 가르쳐 주셨다면, 이 두 가지가 맞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다면, 정말 설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목사님에게 거저 주시면,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다 열어 주실 것이에요.
그 목사님들이 배워서 정말 그 설교 때문에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으면, 목사님들의 마음을 다 감동시켜서, 헌금을 보내게 하실 것입니다.
근데 천만 원이라고 못을 박아요? 이건 장사에요, 장사.
교회가 방주가 아니고 완전히 자본주의 논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사상인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교회가 먹혀버린 거예요, 먹혀버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읽은 마지막에 보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게 얘기 했잖아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해서 저주를 새삼스럽게 선언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역은, 이미 다시 새삼스럽게 저주를 선언하지 않아도 저주 안에 있는 거예요, 지금 현재.
그러니까 저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세상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께서, 은총의 구멍을 내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저주받은 영역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옛날부터 돈에 먹힌 거예요.
풍요와 다산이 뭡니까?
지금 부자 되고, 숫자적으로 부흥하겠다고 하는 몸부림이 바로, 그때는 풍요와 다산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어졌던 바알우상의 숭배로 나타났던 겁니다.
교회가 지금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백억, 이백억 예배당은 절대, 절대 절대의 십 제곱 필요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적 경쟁논리에 의해서, 나의 승리의 도취된 자들의 망발이고 망동이지 아무 필요 없는 겁니다.
그 천억, 이천억, 그 수백억을 가지고 교회가, 모~든 시골교회 목사님들이 먹고사는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만큼 평준화 되어서, 오직 복음의 전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되어야 교회가 하나의 교회요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쪽에서는 수천억의 예배당이 있고, 한 쪽에서는 비가 새는 예배당이 있다는 이 현실이 뭘 말해줍니까?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고, 루터와 캘빈에 의해서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당시의 또 하나의 유대교회로 굳어져 버린 가톨릭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문제이지요?
교회가 교회다운가를 보려면 무엇을 보면 압니까?
교인과 교인간의, 교회와 교회간의, 바다수면의 원리에 의한 움직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 영화로운 영체를 입고 부활할 것을 믿고 소망하는 자들이 돈을 자기 주머니에,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게 하고 우리 교회 울타리 안에 쏟아 붓는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모~든 영적인 문제가 온전히 제자리를 다 잡을 때, 이 땅 위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신앙 안에서의 지적자산과 물질이 바다수면의 원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움직여 가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지금 우리 교회들은 결코 방주가 아닙니다.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에 침몰해 가는 이 교회를 구원할 방주를 이 시대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에 침몰해 가는 교회의 방주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교회마다 뒤집어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