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한 (1900~1979) 시인/언론인/기업인
1900년 12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안이다. 호는 송아, 필명은 송아지다. 연극인이자 시인인 주영섭의 형이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갔다. 1919년 일본 도쿄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문예동인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19년 2월호 『창조』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19년 5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신문 「우리 소식」의 편집을 담당했고,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다. 1920년 2월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9월 상하이 후장대학에 입학했다. 1924년 10월붙터 1936년 6월까지 문예지 『조선문단』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12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발간했다. 1925년 6월 후장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한 뒤 안창호가 세운 중국 남경의 동명학원에 영어교사로 부임해 1년 정도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기자로 입사했으나 1926년 9월 퇴사했다. 1927년 7월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학예부장, 평양지국장,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 논설반 기자(학예부 겸무), 편집국 촉탁 등을 역임한 뒤 1932년 11월 퇴사했다. 1926년 5월 흥사단의 국내조직 수양동우회의 실질적 기관지인 『동광』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29년 10월 이광수 김동환과 함께 『3인 시가집』을, 1930년 10월 시조집 「봉사꽃」을 발간했다. 1931년 3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서울잡지협회에 참여해 대표위원을 지냈다.
1932년 9월 『조선일보』에 입사해 편집국장과 전무취체역을 지낸 뒤 1933년 9월 무렵 퇴사했다. 1933년 11월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1934년 8월까지 잡지부장을 지냈다. 1934년 2월경 주식회사 화신(사장:박흥식)에서 조사선전부장으로 일했으며, 1937년경에는 화신사취체역(이사)으로 재직하는 한편 박흥식이 사장으로 있는 대동흥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가지 화신의 취체역을 지냈다. 1934년 6월 수양동우회 이사장을 맡았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됐다.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사건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했다.같은 해 12월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해 “이 비상시에 있어서는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1939년 1월호)이라고 발언했다. 같은 달 수양동우회를 대표해 종로서에 국방헌금으로 40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3월 ‘북지황군’위문을 위한 문단사절위문사 후보에 올랐다가 최종심에서 떨어졌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가 발기할 때 간사를 맡았다. 12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과 함께 조선문인협회 결성 피로연을 겸한 사업계획협의 간담회에서 ‘문인회관 건설, 문예상 설정, 문예의 밤 개최, 전국순회 문예의 밤 또는 좌담회 개최, 내지문단과의 교류’등을 결의하는데 참석했다. 1940년 10월경 내선일체운동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별인 일본어보급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황도사상’전파를 위한 단체인 황도학회의 결성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전쟁협력단쳋인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결성식에 참여해 상설기관화를 위한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이 자리에서 “금일의 시국에 대하여는 말보다 실행이라고 하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금일의 전쟁은 사상, 경제, 무력 등으로 하는 이른바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의용봉공은 논의보다도 실행에 있고, 또 본 기관을 상설기관으로 함으로써 전시봉공의 의용화운동에로 매진해야 할 오늘 저녁,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삼천리』1941년 11월호)고 발언했다.
임전대책협력회가 1941년 9월 ‘채권가두유격대’를 꾸려 경성부 11곳에서 “총후의 봉공은 채권으로부터”를 외치며 1원짜리 애국채권을 팔 때 서대문대원으로 참가했다. 같은 달 임전대책협력회와 응하보국단 준비위원회가 통합해 전시체제기 최대의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발족할 때 경성지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 파견위원으로 신의주에서 강연했다. 같은 해 11월 수양동우회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41년 12월 14일에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전선국민대회가 열렸을 때 저녁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미영타도대연설회에서 ‘루스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서 “그대들의 악운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해방성전의 용사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1942년 1월호)라고 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주최로 ‘미영타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시하 생활쇄신운동 및 군수자재헌납운동협력’을 내세운 ‘부인결전 대연설회’가 부민관에서 열릴 때 연사로 참가했다.
1942년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싱가폴함락가」로 추축되는 ‘싱가포르함락’관련 가요의 작시 사례금을 2월 17일 종로서에 헌납했다. 같은 달 이틀간 국민총력 경성부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주관으로 실시된 경성부 순회 저축강연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이해 5월 일본 각의에서 1944년부터 ‘조선인징병제도’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같은 달 15일에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마련한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무적 황군의 일분자’가 됨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①국체에 철저하여라 ②팔굉일우의 대이상을 깨달아라 ③충절을 다 하라 ④사생을 초월하라 ⑤곤고를 견디어라”(『대동아』1942년 7월호)고 했다.
1942년 12월 3일 조선문인협회 연극문화협회 동양극장이 공동 주회한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 이 날 『매일신보』에 김은호가 그린 「영봉에 엉킨 일억일심」과 함께 발표된 「성전찬가」가 바로 대상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에서 “아아 위대하다 이 날이여/ 어마어마하다 이 부름이여/ 복되어라 이 생각이여/ 태양의 깃발 앞서는 곳에/ 따르나니 10억의 대동아 겨레와 겨레”라고 노래해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3년 2월 징병제 실시를 1년 앞두고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반도개병가’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아 「우리는 제국군인」과 「어머니의 기원」을 당선작으로 선발했다. 같은 해 8월 경성 부민관 대강당에서 시상식과 발표연주회를 주관하면서 심사위원을 대표해 경과보고를 했다.
같은 해 4월 16일 ‘미귀의 잔학성을 폭로한다’는 주제의 라디오 좌담회에참석했다. 같은 달 조선총독부의 짓로 조선문인협회/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국민시가연매 네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 겸 시부회장을 맡았다. 같은 달 경성을 방문한 일본인 남방종군작가 이노우에고분과 우에다히로시를 맞아 개최한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환영교환회에 출석해 의견을 나누었다. 1943년 8월부터 조선에 해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자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과 국민총력 경기도연맹/경성부연맹이 공동 주최한 해군지원병제 실시 기념 미영격멸대강연회에서 ‘다섯 가지 사명’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이 연설에서 “해군특별지원병제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반도민중이 완수할, 세계사적,동아적,일본적,향토적,인간적인 위대한 다섯가지 사명”(『신시대』1943년 6월호)을 강조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해군을 찬하는 시 낭독회’에서 「제2차 특별공격대」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했다.
1943년 6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 일행의 전선시찰종합좌담회에 조선문인보국회 측 인사로 출석했다. 7월 조선문인보국회와 국민총력조선연맹선전부가 공동주최해 경성 체신사업회관에서 일본 저명 잡지사 편집장으로 구성된 조선시찰단과 조선지역 문화인들이 간담회를 열 때 ‘싸우는 반도의 실태’를 두루 시찰하는 일행에게 조선의 문학,음악,영화,아동문학,잡지,미술 등 각종 문화부문의 실정을 소개하는 데 참여했다. 7월 일본의 신극배우 마루야마 사다오가 경성방송을 통해 조선지역 시인들의 시를 낭독할 때 조선인 지원병 최초의 전사자인 이인석상등병을 기린 주효한의 시 「첫 피」도 낭독했다. 같은 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을 발간했다. 조선인 징병제가 1943년 8월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앞당겨지자 8월에 조선총독부 제1육군지원자훈련소 소장인 가이다 가나메 육군 대좌와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의 기쁨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라디오 대담을 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에 출석해 보국회 지부규정을 심의하는 6인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천거됐다. 임시특별지원병제 곧 학도병 지원제에 대한 감사, 추지, 철저, 응모권유를 위해 종로 유지를 중심으로 임시특별지원병 도익찬위원회가 결성되자 실행위원으로서 적격자 가정방문, 격문발송, 응모격려회 개최 등으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11월 13일 ‘분기하라 우리 학도여’라는 연제로 라디오 강연을 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보국회와 경성 소재 잡지사 주최 출진학도격려대회에 참가하여 강연과 시낭독을 통해 ‘출진학도’의 사기를 앙양했다. 12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서 만주신경에서 열리는 결전예문전국대회에 참석했으며, 조선문인보국회 봉사대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협의회에 출석했다.
1944년경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데 관여해 이후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경성부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3월 기존의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에서 보국회 시부회기관지로 재발족된 『국민시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과 증산파견원으로 결정됐다. 같은 달 시집 『손에 손을』로 도쿄 신태양사가 주관한 제5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한 뒤 4월 명치정 자운장에서 시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재직중이던 주식회사 화신의 상무실에서 열린 『국민시가』편집위원회를 주도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을 맡았으며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하고 조선군사령부, 국민총력조선연맹,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가 후원해 경성 부민관 중강당에서 열린 ‘결전태서즉응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8월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적국항복 문이대강연회에서 ‘아세아로 돌아와’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9월 국민동원총진회발기인과 상무이사를 맡은 뒤, 1945년 2월 순회근로간담을 위해 경기도에 파견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인징병제실시에 감사하여 조선인의 정치처우개선을 촉구하는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서 ‘미영격멸에 결집--감사를 전의 앙양으로’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오늘의 처우개선은 즉 1억 동포가 다 같이 기뻐할 성사인 것이다. 대동아건설 더구나 대동아의 지도자가 될 우리는 이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미영을 격멸할 결의를 이 자리에서 더욱 높이지 않으면 안될 것”(『매일신보』1945.1.18.)이라고 역설했다. 1월말 경 대화동맹이 결성될 때 준비위원을 맡았다. 2월 언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의 발기인과 참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일본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조선예술상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6월 대화동맹의 자매당이라 할 수 있는 대의당이 결성되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의 마지막 기구개편에서 평의원으로 재선출됐다.
1940년 9월호 『조광』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통해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 시조에서 “동경서 오신 벗과 북경서 오신 벗님/ 동아의 너른 터를 한집인 듯 여기도다/ 오대주 한 뜰 될 날을 머지않아 보오리”라며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었다.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 찬양은 「동양해방」(『삼천리』1940년 12월호)에서도 계속됐다.
“쇠는 쇠로써/ 화약은 화약으로써/ 엔진은 엔진으로써/ 이윽고 터다짐이 시작된다/ 이윽고 골라진 터 위애/ 불과 피로서 다진 터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선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1942년 1월 『삼천리』에 발표한 시 「하와이의 섬들아」는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날 적군의 군함, 침몰된 자 기함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지누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 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보았으리라” 며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을 찬양했다. 같은 달
『신시대』에 발표한 「명기하라 12월 8일」에서는 “이 날에/ 영미의 세대가 끝나고/ 아시아의 세대가 시작되니라/ 오직 이렇게 그대는 써라/ 역사가야// 이날에 침략의 악몽은 막을 내리고/ 공영의 여명이 터오니라”고 노래했다. 1942년 2월 일제가 말레이반도의 요충지인 싱가포르를 점령하자마자 2월 18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싱가폴 함락기」에서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어젯날 가증하던 원수의 소굴/ 오늘부터 아세아의 미쁜 문지기/ 이름조차 장하도다 사자항구(싱가포르)여//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거만한 동양함대 단숨에 깨고/ 장난삼던 향항성도 겨우 18일/ 마래(말레이시아)전선 천 킬로가 두 달도 못 가//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라고 했다. 또 「마음속의 싱가폴」(『신시대』1942년3월호)에서는 “여보게!/ 싱가폴이 함락되었다네/ 하지마는/ 자네 마음속에 아직 함락 못된 것이 없는가/ 동아에 새론 날이 오는 적에/ 자네 가슴에는 아직 낡은 물이 고여 있지 않는가/ 아메리카와 영국의 유물이/ 자네 머리에 녹슬어 붙지 않았는가/ 자유니,권리니,이익이니,행복이니/ 자기니 개성이니 향락이니 성공이니/ 그 따위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있지 않는가/......//광대무변한 황은을 가리고 있지 않나”라며 ‘황국신민’으로서 가져야 할 정신자세를 강조했다.
침략전쟁 찬미는 자연스레 전쟁의 주요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42년 2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산문 「영미의 동아 침략」에서 “대동아천지에 있어서 영국이 제해권을 잡게 됨으로부터 그의 침략의 마수는 세 가지의 모양으로 나타났으니 첫째 영토를 빼앗아 원주민을 노예로 만든 것……둘째 영토를 빼앗아서 원주민을 쫓아버리고 미국처럼 백인의 나라를 건설한 것……셋째 경제적 침략에 의하여 반식민지를 만든 것”이라 말했다. 또 1944년 10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산문 「적, 미국의 사상모략」에서 “동아를 사상적으로 분열하여 그 수호자인 일본을 말살하고 영원히 동아인을 그들의 번영의 희생을 만들고자 함이 그들의 말 아니하는 전쟁목표다”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1942년 2월호 『조광』에 발표한 시 「상해조계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에서 “왕군아/ 우리공조계가 오늘에 우리 황군의 손에 들어왔다/ 중국의 경제를 결박하였던/ 황포탄 78층 양옥들은 빈 집이 되고/ 국제은행단의 두려운 음모는 영국의 포함과 함께/ 황군의 대포 앞에 깨어져 버렸다”라며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의 단결을 주장했다.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은 생산을 위한 ‘총후’의 국민된 자세를 강조하는 글쓰기로도 나타났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전력증강을 위한 물자절약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각오를 새로이 하여」(『신시대』1942년 12월호)에서 “소비규정은 더욱 철저하여야 할 것이다. 물자의 공출은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남녀노유가 한 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이 생산에 출전하여야 할 것이다.……모두가 생각부터, 생활부터 전시체제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고난의 파쇄」(신시대/1943년 1월호)에서는 “경제적으로 보아서 ①아직도 통제는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②소비규정은 일층 일조직화할 것③전력증강은 방생산확충에서 올 것④국민의 의식주는 아직 더 긴축할 여지가 있는 것⑤아직도 동원하여야 할 유한인이 남아 있는 것, 이런 문제가 18년도(1943)의 전력강화운동의 제재되는 동시에 한낱의 예언도 되는 것이며 또 국민의 각오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 시 「」(『신시대』1944.7)에서는 “우리들은 보고 듣고 또 전신으로 느꼈다/ 소집되어가는 각모/멈뻬의 행진/ 젊은 여성의 땅을 울리는 보조를/ 흰 수병복의 소년단/ 애국반상회의 창기대/ 눈 내린 새벽의 요배식을”이라 하고 총부봉공을 위해 바삐 뛰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작가의 총후봉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 선동하는 일이었다. 중일전쟁 개전 4주년을 맞아 1941년 9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산문 「임전보국」에서 “우리 일본제국의 자유는 우리 일본국민의 피로써야 살 것이다.……오늘날 그때가 왔다.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지 그것은 알 필요가 없다……오직우리는 부르실 때 바칠 뿐이다. 익서이 우리의 의무요 감사요 자랑이요 물려줄 것이다”라며 지원병 응모를 선동했다. 1941.3 「신시대」에 발표한 「첫 피-지원한 이인석에게 줌」에서 1939년 6월 22일에 전사한 이인석의 입을 빌려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페하만세를/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형아 아우야/ 나는 안다/ 대륙에서/ 대양에서/ 넘쳐흐르게 될 줄을/ 나는 안다”고 하면서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이 되어 죽억5kf 것을 선동했^다. 이 시는 1943년 7월 12일 일본의 신극배우 마루야마사다오가 경성방송을 통해 조선지역 시인들의 시를 일본어로 낭송할 때 「최초의 피」라는 제목으로 낭송됐다. 시 「댕기」(『국민문학』1941.11)에서는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라며 젊은 여성들도 간호부로써 전쟁에 참여하도록 했다.1942년 5월 일본 각의가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실시를 결정하자 1942년 6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산문 「징병령 실시와 조선청년」에서 “이제사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됐다. 우리의 두 어깨에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영광의 책임이 메어졌다. 대동아공연권의 건설에 있어서 우리들의 적혈로써 그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1943년 5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실시가 결정되자 「아침햇발--해군지원병제 실시 발표된 날에」(『매일신보』1943.5.13.)에서 “산에 가면 무덤에 꽃도 피건만 바다에 흩는 용사 표적도 없어/ 6대양 험한 물결 나의 집이오 표적 없는 무덤이 내 고향이라//……// 살아옴을 바라리 특별공격대 시방 떠납니다 다만 한마디”라고 쓰고 ‘가미가제’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했다.
1943년 10월 학도병제가 실시되고 같은 해 11월 20일로 학도병 모집마감이 임박하자 11월 1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산문 「나서라 지상명령이다」에서 “나는 확신한다. 출진학도의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런 의미로서의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제국은 강요한자가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자가 아니었을 것이요, 오직 제군의 애국심이었을 ㄱ서이고, 동포애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110억 아시아인의 부르짓는 소리가 제군의 귀를 울린 때문이었을 것이요, 1억 동포의 엄숙한 명령이 제군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까닭 뿐”이라고 강박했다.
이와같이 지원병 징병 학병 등을 선전 선동하면서 ‘천황과 대동아전쟁’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목숨을 바치길 요구했다.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의 꽃」에서 조선의 지원병 학병 여자정신대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했는데, 이들 모두가 ‘천환’을 위해 죽어 도쿄 구단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도록 하자는 의미를 지녔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5년 1월 3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파갑폭뢰---박촌상등병에게 드림」에서도 폭뢰를 가지고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 박촌 상등병을 기리며 이를 따르자고 선동했으며, 1945년 5월 2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전 국민이 육탄으로」에서는 이른바 ‘본토결전’준비에 발맞추어 조선에서도 조직하려는 ‘국민의용대를’선전하며 조선인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했다.
이 밖에도 많은 친일 글을 남겼다. 시로는 「손에 손을」(『국민문학』41.11) 「팔굉일우」(『신시대』41.1) 「대동아행진곡」(『춘추』42.2) 「동아의 새봄」(『매일신보』42.2.23) 「승리의 태평양」(춘추42.4) 「노무와 의용화문제」(대동아 42.5) 「우러르보는 태양 천장절을 축하하며」(경성일보 43.4) 「12월7일의 꿈」(신시대 42.12 ) 「남쪽 나라에」(녹기43.5) 「바다로 가리」(춘추 43.6) 「욱일의 군함기를」(국민총력 43.6) 「천년을 넘어서」(아사히신문 43.8.4) 「푸른 하늘」(반도의 빛 43.9) 「제3원-공군병사가 되려고 하는 소년에게」(춘추 43.11) 「젊은 시절」(신태양 43.11) 「12월 8일의 다짐」(경성일보 43.12.8) 「북에 있는 벗이여」(국민총력 44.1) 「분노의 세월」(흥아문화 44.4) 「우후」(신시대 44.5) 「사이판의 소리」(국민총력 44.8.1) 등이 있다.
그리고 「시인은 모르지기 미래를 파악하라」(매일신보 41.11.25~27) 「태평양의 시대」(매일신보 42.1.7) 「국민시가의 경향」(매일신보 42.1.8) 「향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국민문학 42.1) 「춘원 요한 교담록」(신시대 42.2) 「영국에 유린된 동양」(반도의 빛 42.2) 「대동아권과 문화의 문제」(매일신보 42.3.23~27) 「전필승, 공필취」(신시대 42.2) 「산본 개조사장의 인상」(대동아 42.5) 「징병제 실시즉음」(경성일보 42.5.14) 「백성 자신」(국민문학 42.6) 「소집되는 아이들」(녹기 42.6) 「도의와 문예인」(매일신보 42.12.11) 「최저생활의 실천-모든 물자가 군수품이다」(신시대 43.3) 「자성과 실행」(녹기 43.3)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국민문학 43.6) 「출범의 정신」(신시대 43.7) 「선서식」(신시대 43.8)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매일신보 43.8.3) 「불타는 희망」(신시대 43.9) 「직장 도장 전장」(신시대 43.10) 「비약의 시대」(신시대 43.12) 「조선의 ㅇ리본적 부흥」(녹기 43.12) 「천인침」(매일신보 44.1.19) 「신경여행」(국민문학 44.1) 「결전하 만주의 예문상태」(신시대 44.1) 「나의 결전 좌우면」(신시대 44.1) 「싸우는 연극의 자세」(신시대 44.3) 「시단 30년」(신시대 44.4) 「아메리카의 모략폭쇄」(경성일보 44.8.20) 등의 산문과 단가 좌담이 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무역회사 흥한회사, 1946년 상호무역, 1947년 영풍 기업사를 설립하고 1946년 한국무역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창설에 관여하는 한편, 한국무역협회 초대 부회장에 취임했다. 1946년 10월 초순 전후 이광수, 김대우, 계광순, 최린등과 함께 ‘흥사단 국내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1948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경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조만식을 당수로 한 조선민주당의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54년 국제문제연구소를 설립했으며 흥사단 기관지 월간 『새벽』을 창간했다.
1957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1958년 제4대 민의원선거에 서울 중구 갑구에서 출마,당선했다.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장관을 지냈다. 1963년 『안 전서』를 출간했다.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 상미위원에 임명됐고, 1968년 『대보』회장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1970년대 들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고하송진우기념사업회 등 각종 기념사업회와 납북인사송환추진운동 크리스찬아카데미운동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 등 사회단체에도 관여하는 한편, 과학기술회관기성회 타자교육연구회 한국노사문제연구소 한글전용국민실천위 평안남도행정자문위원회 등에서도 활동했다. 경제계에서도 주도적으로 활동해 1970년 이후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이어 수석부회장 한국선주협회회장(68) 한국특허협회회장(73) 한국능률협회 회장(75) 등을 지냈다. 1979년 11월 17일 사망했다. 같은 20일 전국실업인장으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
첫댓글 일본제국의 찬송가를 온 정신으로 써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