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글들
2008-10-22 11:59:17
아우에게 편지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얼마 전부터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자꾸 나를 재촉하고 있다네.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써야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펜을 들었네.
12년이라는 세월은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고 그를
탈바꿈시키는 데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되네 .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누가 인도하는 지는 알았던 아브라함처럼
우리 역시 그분을 따라 둥지를 떠나 이렇게 떠돌아다니게 된 걸세.
처음 7~8년간은 꿈결같이 지나갔었지.
몸부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께서 내려주신 하늘의 만나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수로 갈증을 달래며
멋진 꿈을 꿀 수 있었네.
그분은 우리를 가나안 땅에 인도해 들이고 꿈에서 깨어나게 하셨네.
만나도 그치고 반석은 더 이상 생수를 내주고 있지 않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가나안 거인들 속에서 살아보라고 하신
그분이 야속할 때가 왜 없었겠는가?
시간은 어이 그리 더디 가고 거인들과 비교해 우리 모습은
어찌 그리 초라해 보였는지?
우리를 부모와 친척이 있는 고향, 보금자리에서 불러내신
그분이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없었더라면
결코 견뎌낼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세 인연이 있네.
어머니와의 인연, 박선생님과의 만남, 그리고 아우와의 사귐이
바로 그것이지.
그분께서 아우의 소원대로 아이를 주시고 걸맞은 지위를 차지하게
하셨더라면 아우에게 빚지고있다는 이 아련한 아픔은 없었을텐데!
그랬더라면 아우를 쉽사리 잊고 나머지 두 인연의 매듭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겠지?
홀로 나이를 먹어 가는 자식 때문에 애타하시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큰 빚을 지고서도 갚지 못하는
무능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한다네.
맘에 쏙드는 며느리와 손자를 그 품에 안겨드리고 싶다는
소원을 그분께서 모르실 리가 없는데,
그리고 아우 부부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지 않으셨을 리가
없을 터인데 ... ... .
아우와 어머니께 빚지고 있다는 이 느낌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를
알 수가 없기에
여기엔 반드시 그분의 어떤 계획,
선한 뜻이 있으리라는 기대도 날로 커져가고 있지만.
아우를 만나보고는 이런 나의 느낌이 더욱 짙어졌나 보네.
그것이 이렇게 글을 쓰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아우가 안쓰럽고, 아우에게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고마운 마음도 있었음을 고백해야겠지?
그분께서 우리를 비슷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아우의 모습을 보고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면
아우의 기분을 상할지 모르겠지만.
종종 편지를 띄워보고 싶네. 오늘은 이만.
96. 4.4 愚兄 吉守.
#가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