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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증거인멸 재발방지 성막>의 줄거리:
드디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성막 재건의 지시가 주어집니다. 약 3500년 전에 있었던, 지금은 사라져버린 성막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조금도 변함 없이 살아있는 성막의 의미는 증거인멸 재발 방지를 위하여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대체 무엇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늘에 계시면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안에서 그분의 주체성의 증거를 인멸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증거인멸 재발방지 성막
(출25:1~4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성막 내부인 지성소에 있어야 할 법궤에 대한 양식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속죄소를 만들 것을 지시하시고, 지성소 바깥쪽 성소에 진설병을 두는 상과 등대에 대해서 지시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이렇게 성막을 지을 것을 지시하시는 25장 전체의 말씀을 중심으로 <증거인멸 재발 방지 성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증거인멸 재발 방지 성막’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짓게 될 성막의 설계도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예외 없이 지시를 하십니다. 인간의 재량권이 성막의 재건에 끼어들 여지가 없게 만드셨는데 그 성막이 지금은 없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법궤도 없고, 속죄소도 없어져서 실물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모양을 만들어 낼 수는 있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 낼 수는 있지만 실물로서는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오늘날과 무슨 연관이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 그 당시의 바벨론, 앗수르, 애굽 같은 민족들이 다 없어졌고, 신성로마제국도 없어졌고, 중국에서도 수없이 많은 나라가 없어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다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 말씀 자체는 3500년의 다사다난한 인류 역사의 굴곡을 관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은 한 마디로 ‘거룩한 텐트’로 그 의미는 ‘다시는 너희가 증거인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증거인멸입니까?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증거인멸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지은 첫 번째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이 죄를 다른 말로 하면 증거인멸의 죄입니다.
‘증거인멸’은 범인이 자기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범행을 증명할만한 증거들을 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체성의 증거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의견이 있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말씀으로 지으신 세상 안에서 말씀하시므로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싶어 하셨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살면서 그것이 결코 나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증거를 없애버린 것이 인간의 삶의 현실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으신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리가 말을 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예가 주인의 집에서 자기가 관리하는 곳간과, 농사짓는 밭의 농산물의 주인은 자기가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신 세상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으로 한 마디로 내가 말을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말씀으로 지으신 세상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내용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결정체입니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탄소결정체인 것처럼 그 내용이 말씀이기 때문에 하늘을 보면서 내가 말할 수가 없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느끼는 대로 말한다면 말대꾸를 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 말씀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보고 내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말대꾸하는 것으로 산은 하나님의 말씀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해서 내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말씀에 대꾸질을 하는 것으로 그 자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말씀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모든 인간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말의 주인이 될 수는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그 상황을 선악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네가 말하고 생각하고 네가 판단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판단과 말과 생각의 주인이 되지 말고, 오직 노예들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판단하는 것과 나의 말을 받으라.”라고 한 것이 아담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바깥에서 증거를 인멸한 상태에서 살게 되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그 상황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증거인 선악과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몰랐다는 핑계를 대며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나는 몰랐어. 그래서 내 생각대로 살고 내 판단대로 살았어.”라고 이야기할 것인데 이것이 증거인멸의 죄로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주체성입니다. 선악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신다는 증거였는데, 그 증거를 인멸한 죄에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고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도 창조하신 피조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체적인 하나님이 주인공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참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체성’이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의 판단으로 행동하는 성질입니다.
사장님이 사업장에서 돈에 대한 지출의 결재를 할 때 이 지출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결재를 한다면 이것이 주체성이고, 사장님이 80살 노모에게 전화를 해서 결재를 해야 되는지 묻는다면 주체성이 없는 것으로 그 때에는 어머니의 주체성이 받아들여져서 결재를 하게 됩니다. 자식을 키울 때에 이 학교가 좋은지, 저 학교가 좋은지를 내가 판단하면 서 행동하면 이것이 주체성인데, 우리는 판단이 내 것인 상태에서 살도록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주체성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인멸한 상태에서, 내가 판단해야만 한다는 상황을 정당화시키며 모든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선민을 택하셔서 이제 그들을 자녀 삼으시고 백성 삼으셔서 그들이 당신을 남편처럼 여기며 마음을 주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기 위해서 제일먼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바로 성막재건으로 핵심 내용은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두는 법궤에서부터 살을 붙여나가는 것입니다. 핵심은 바로 그 말씀의 돌판 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내 행동에 대한 지침을 갖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체성은 자기 스스로 상황에 대해 판단해서 행동하는 속성인데, 하나님이 나의 행동을 규정하시기 때문에 나는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이고, 주체성의 자유가 없어서 주체성을 누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이 주체성을 갖고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한 증거를 다시 복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떻게 살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요5:30절에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듣는 대로 심판한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합니다. 사업하시는 선민 사장님께 적용을 한다면 “나는 회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이 회사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고, 선민 엄마에게 적용을 한다면 “나는 자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오직 자녀에 대해서 하나님께 듣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고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고, 이게 바로 그 말씀 판이 이런 의미를 담고 법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대할 때에 그 문자대로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를 염두에 둘 것이 아니라, 십계명이 문자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증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체성을 갖고 계신 존재라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성을 갖고 계셔서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내 행동에 대한 의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신 세상 안에서 내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져서 행동하지 않으면 나의 환경이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말씀과 충돌을 일으키고 그래서 인생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악인들의 삶이 있다면 그 삶도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나를 중심으로 해서 인도해 나가시는 것으로, 마치 요셉을 형들이 팔았을 때에 그 악인의 행동을 요셉에게 맞추어서 이끌어 나가셨던 것과 같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을 때에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악인이나 상황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므로 나만 잘하면 됩니다. 나만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행동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오늘 이 속죄소와 진설병과 등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법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증거 판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핵심입니다.
말 자체도 증거의 판, 증거의 궤, 증거의 장막이라고 하는데 무슨 증거입니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5감각으로 접촉 불가능한 하나님이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바로 돌판이라는 것입니다. 그 돌판을 보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소원한다면 그 때에 속죄가 일어납니다. 법궤가 있고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죄는, 말씀으로 증거 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마음속에서 인멸해버린 것으로 그 주체성을 인정할 때에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제 내가 생각과 판단의 주인이 아니고 무슨 일이 주어져도 이 상황과 사태에 대한 판단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마음대로 쌀독에서 쌀을 퍼서 자기가 먹을 밥을 지을 수가 없는 것처럼, 언어의 항아리로부터 내가 쌀 퍼내듯이 언어를 마음대로 퍼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판단과 행동과 생각이 다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판단도 언어로 하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야”라고 한다면 ‘돈’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이기에 이 기준에서 볼 때에 지금 어떻게 행동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마음속에 있는 언어가 생각이고 입 밖으로 나오면 말이고 기록되면 문자입니다. 주체성은 언어를 통해 표현이 되므로 나는 언어의 주인이 아닙니다. 노예가 주인이 먹을 밥을 짓고 남는 것을 먹어야 되는 것처럼, 나는 언어의 쌀독에서 언어를 마음대로 퍼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 사실을 깨달으면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면 진설병의 역사로 배부름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원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판단과 생각은 상당히 객관적으로 무미건조해보이고 아무런 부피가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만, 언어의 주인이 아닌 노예의 상태에서 “내게 언어를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에 말씀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데 진설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는 그 사실에 대한 증거를 십계명 돌판으로 주셨으므로 그 증거를 보고 마음속에서 인멸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면 이상하게도 배불러집니다.
‘배불러진다’라는 것은 이제부터 딴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으로 성막은 이상한 터널과도 같습니다. 성막에 있는 법궤와 속죄소와 진설병과 등대의 내용을 거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굶주려있고 무엇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기근입니다. 잘 사는 나라를 보세요. 미국 영화를 보면 마약 이야기가 안 나올 때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알코올 중독이 되고 심지어는 일중독(workaholic)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가 된 것은 모두가 다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세상은 너무나도 발전했고 먹을 것도 풍성하고 부족한 것이 없어도 내 마음이 도대체 채워지질 않기 때문에 마약이라도 해야 할 만큼 다 굶주려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의 주인이 아닌 하나님이 말의 주인이시라는 증거를 인정하고(십계명 돌판) 말의 주인께 이 상황에 맞는 말과 판단과 생각을 달라고 기도하면 배가 부릅니다. 성막 안의 내용물들의 의미를 터널을 지나듯이 거쳐서 세상에 서면 배가 든든해서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없어집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셨어요? 지금은 돈, 명예, 부흥, 자식의 형통, 건강, 명품 등 갖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성막에서 법궤 안의 증거판과 속죄소를 지나서 진설병에 이르게 되면 갖고 싶은 것이 없는 세상으로 확 바뀌게 됩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해서 거식증처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배가 불러서 못 먹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내가 보리떡을 먹고 배불러서 산해진미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산해진미가 보리떡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진설병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등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먹고 난 후 갖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보니 모든 사물이나 상황,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판단이 계속해서 물 흐르듯이 흐르는데 그 모든 판단이 다 정확해지고 올바르게 됩니다. 돈이 최고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최고라는 기준이 생긴 상황에서 돈과 연관된 문제를 볼 때에 이제 정확하게 그 현장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나를 통해 또렷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 모든 성막의 내용이 주님의 십자가에 다 함축되어서 순도 100%로 성취되어지고 완성되어 집니다. 십자가 붙잡고 죽는 것을 생활화하면 성막이라는 터널을 지나 우리를 딴 세상으로 인도하는 과정들이 다 이루어집니다.
성막의 존재 목적은 증거인멸 재발 방지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없는 그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내 행동과 판단의 주인이시라는 것의 증거가 돌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내가 해야 될 행동에 대해 의견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말의 주인이 아니므로 판단과 생각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언어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먹을 때에 속죄가 이루어지는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주체성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죄의 습성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으로 내가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기도 하는데 이것은 증거인멸의 죄를 연장시켜가는 것으로, 하나님은 생각할 줄 모르고, 판단할 줄 모르고, 보실 줄도 모르는 분이라서 내가 상황을 판단하고 내 판단대로 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 상황에 대해 죽으라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체성의 증거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이신 분이 육체가 되어서 오신 분으로 당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체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인정하시고 마음에 받아들이시면서 당신께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연합하면 증거인멸의 죄가 없어지는데, 나는 생각하면 안 되고, 나는 언어의 주인이 아니고, 나는 판단도 생각도 불가능하므로 언어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언어를 통해 판단과 생각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언어만 주실 뿐더러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기다릴 때에 그 언어를 말씀하시는 인격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므로 진설병으로 배불러지고 등대로 불이 밝혀지듯이 세상의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후1:19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억만 가지의 추측과 억만 가지의 소망이 없어지고, 잘못되게 배고프고 세상에 대해 굶주린 상태로부터 벗어나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은 세상을 맞이할 때에는, 우리의 움직임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우리의 움직임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표현 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를 생활화함을 통해 이 경지인 전혀 다른 세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선민의 한 가운데에 성막을 지으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막의 완전한 성취되신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아담이 하나님의 주체성이 증거를 인멸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불행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