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가요는 시대의 요원이며, 시대를 포용하는 흐름을 보여 나왔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한 시기, 대중가요는 나라 잃은 설움과 해방의 기쁨을 노랬으며, 6.25 전쟁 이전부터 삼팔선으로 절단된 분단의 현실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 대중가요는 전국민의 생이별과 아픔을 보듬어 주었다. 1965년부터 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맹호, 청룡부대 등 우리 장병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기 시작하면서 60년대 중후반은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소위 진중가요들이 군사정권의 지휘아래 양산되었고, 대중들은 이 노래들을 즐겨 부르며 특히 더 사랑하던 시기도 있었다.
1960년대 당시 군과 월남을 소재로 히트를 기록했던 노래는 이시스터즈의 ‘여군 미스리’와 건장한 남성중창단들의 힘찬 노래들이 유독 많았다. 쟈니 브라더스는 앞서 소개했던 공군주제가 ‘빨간 마후라’와 ‘수평선’을, 봉봉사중창단은 육군주제가인 ‘육군 김일병’과 해병대 주제가인 ‘브라보 해병대’, 그리고 인기의 여성트리오 이시스터즈와 함께 부른 파월장병주제가 ‘맹호들은 간다’를 통해서 60년대 진중가요시대를 이끌었다.
이 가운데 봉봉사중창단이 불렀던 ‘브라보 해병대’는 지금도 ‘해병대 곤조가’로 군에서 애창되는 불멸의 노래가 되었다. 국군의 파월과 더불어 월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세아레코드에서는 1966년 [월남특집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맹호들은 간다’, ‘우리는 청룡이다’, ‘월남가신 우리아빠’, ‘무운을 비옵니다’, ‘남십자성’ 등 12곡이 수록되었다. 노래를 담당한 가수는 남일해와 황인자, 최정자, 쟈니 브라더스, 아리랑 씨스터즈 등이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인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 여자는 다 그래)’는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와 함께 모차르트의 3대 희극 오페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2막으로 구성된 ‘코지 판 투테’는 눈앞에 마주 한 유혹 앞에서 주인공이 부르는 아리아 ‘폭풍우에도 꿋꿋한 바위처럼(Como Scoglio Immoto Resta)’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오페라를 마주하다 보면 두 곡의 대중가요가 연상된다. 하나는 심수봉이 부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이며, 다른 한 곡은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이다. 심수봉의 노래는 ‘코지 판 투테’와 반대의 경우인 ‘남자는 다 그래’라고 노래했으며, 김추자는 ‘폭풍우에도 꿋꿋한 바위처럼’보다 더 순수하고 유쾌하게 믿음을 지닌 사랑을 노래했다.
1969년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음악을 통한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고 회상한다. 미국에서는 우드스턱 페스티벌이라는 전대미문의 야외 페스티벌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국내에서는 영국가수 클리프 리차드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엄청난 열정으로 들쑤셔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중음악 사상 가장 섹시한 여가수로 평가받는 김추자가 등장했다는 점은 1969년의 상징성이라고 할 만한다. 김추자는 현대적인 춤을 노래에 최초로 접목시켜서 대중가요가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시도했으며, 신중현의 지휘 아래 한국적인 록음악과 싸이키델릭을 접목시킨 진일보한 노래를 통해서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은 아직도 높게 평가하는 대목이다.
총 10곡이 수록된 김추자 데뷔 음반의 구성은 1면 6곡은 모두 김추자의 노래로 수록되어 있으며, 4곡이 수록된 2면에는 ‘소주병 난자사건’으로 악연을 맺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출신의 매니저 소윤석과 락 밴드 바보스와 샤우터스 출신인 김선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추자의 육감적인 춤사위와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시켰다. 명곡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늦기 전에' 2곡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을 정도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에서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외에도 한국 사이키델릭의 숨겨진 명곡으로 손꼽히는 김선의 '떠나야할 그 사람'도 놓칠 수 없는 명곡이다. 김추자와 소윤석, 뉴덩키스 등을 자켓에 등장시키며 재반을 지속적으로 발매했듯이 이 앨범은 엄청난 판매를 기록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1971년 신영균을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비슷한 제목으로 오은주와 하춘화가 부른 ’월남가신 우리아빠‘도 존재한다.
김추자 베스트 20 베스트
목포일보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남진의 아버지는 목포의 거부이자, 야당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큰 형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자, 자신은 영화배우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을 해서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남진은 작곡가 한동훈의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Autumn Leaves’ 등을 부르며 맹연습을 했다.
남진은 당시 연기를 하고자 하는 마음에 노래를 한다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학원의 여학생에 반해서 음악을 선태갛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남진의 데뷔 앨범 [서울푸레이보이]는 1964년에 발표되었다.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던 가수는 현미와 한명숙, 최희준 등 목소리가 허스키였던 이들이 주를 이뤘다. 그들과 달리 남진의 깔끔한 목소리는 결국 큰 주목을 이끌지 못했다. 더해서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본격적인 활동도 펼쳐보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데뷔음반은 소리 소문 없이 지하로 흔적이 지워졌고, 실물구경이 힘든 진귀한 음반이 되었다. 이후 데뷔음반의 존재가 자신의 기억에서마저 사라진 남진은 한동안 자신의 데뷔곡을 ‘서울프레이보이’가 아닌 빅 히트곡 ‘가슴 아프게’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데뷔음반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당시에는 스플릿 형식으로 하나의 앨범에 여러 가수들이 등장하거나, 그 앨범 한 트랙을 통해 데뷔하던 것과 달리 남진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집으로 데뷔 음반을 제작되었던 것이다.
타이틀 곡 ‘서울프레이보이’는 영화 ‘그 순간을 참아라’의 주제가였다. 남진에게 가수로써 찾아온 행운은 오아시스레코드의 손진택 사장을 만나면서 다시금 만개한다.
전속 계약을 맺은 남진은 ‘연애 0번지’를 앞세워 1집의 실패를 만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면서 그의 2집 앨범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의에 빠진 그를 위로하러 올라 온 남진의 어머니는 “남진아 어매는 영번진가 허는 노래보다도 ‘울려고 내가 왔나’, 그 노래가 좋드마잉.”이라는 명언을 남긴다.
여러 장르의 음악에 욕심을 내던 남진은 트로트곡이었던 ‘울려고 내가 왔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진은 1965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록된 ‘울려고 내가 왔나’를 통해 인기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트로트에 중심이 된 활동을 시작하게 된 남진은 지구레코드로 전속을 옮겼고, 1967년 박춘석 작곡의 ‘가슴 아프게’가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대형가수로서의 확실한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남진은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배우로써의 가능성도 보여주기 시작했다. 월남에서 군복무를 마친 남진은 1971년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 당시부터 나훈아와 선의의 라이벌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로커빌리 스타일의 ‘마음이 고아야지’, 새마을운동과 함께 동반 히트를 기록했던 ‘님과 함께’ 등을 발표하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몰이를 이어가면서 대중가요 최초로 인세를 받는 가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1976년 가수 윤복희와 결혼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던 남진은 조용필의 등장과 신군부의 등장 속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미국 이민을 떠나게 된다. 1983년 귀국한 남진은 ‘빈잔’을 히트시키며 자신의 입지를 다시 다지게 된다.
이후 ‘둥지’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2008년 초대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대중음악 발전에 큰 기여를 해 나왔다.
1966년 당시. 국내 최초의 시사교양 주간지인 주간한국은 ‘키다리 미스터김’으로 MBC10대 가수 등 각종 대중가요 상을 휩쓸었던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를 그해 최고의 인기가수로 선정했다. 이에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금빛 찬란한 골든디스크를 제작해서 이금희에게 수여했다.
세시봉이 제작한 골든디스크의 존재에 대한 확인은 반세기동안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한국대중음악사의 발굴이다. 1966년, ‘가요계의 기인’으로 통했던 제작자 황우루는 당시로서는 ‘키다리’로 대접받았던 키 180cm가 넘는 30여명의 남자들로 국내 최초의 팬클럽을 결성했다.
팬클럽의 주인공인 이금희의 대표곡 ‘키다리 미스터 김’은 갑자기 1년 동안 방송금지가 된 적이 있다. 단신의 박정희대통령을 의식해 방송관계자들이 알아서 금지를 시켰던 이유 때문이다.
이금희는 미8군 무대와 대학축제, 다운타운의 클럽을 통해 외국의 유행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해준 1세대 여성 팝 메신저였고, 부동자세로 노래를 하던 정적인 당시의 가요계에 춤바람 열풍을 불러 일으킨 최초의 댄스가수로 기록된다.
풍만한 몸매로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한 그녀는 무대를 폭발시킬 것 같다는 의미인 ‘미스 다이나마이트’란 별명으로 불렸다.
불멸의 트롯가요 8집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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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하와이로 이민을 갔던 가수 쟈니리는 2015년 4월에 78세의 나이에 자신의 대표곡인 ‘뜨거운 안녕’의 후속곡인 ‘또 다시 안녕’을 발표하며 기염을 토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서 미군의 양자로 키워졌던 쟈니리는 극단 쇼보트의 단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1961년부터 8군 무대에서 활동하며 정식 데뷔를 했다.
1966년 쟈니리는 '뜨거운 안녕', '통금 5분전', '내일은 해가 뜬다'이 수록된 독집 음반 [쟈니리 가요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량인 35만장이 판매되며 쟈니리를 단숨에 국민가수로 끌어 올렸다.
수록곡 가운데 ‘뜨거운 안녕’의 빅히트로 그는 서울 집값이 300만원에 거래되던 당시에 한 곡당 1만 5천원을 받는 엄청난 출연료를 받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뜨거운 안녕’보다 더 이슈를 낳은 노래가 자리한다.
바로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노래다. 이 곡은 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에 의해 널리 불린 구전가요 ‘사노라면’의 오리지널 곡이다. 길옥윤이 작곡하고 김문응이 노래 말을 썼고 극장 쇼의 슈퍼스타였던 쟈니리가 불렀던 이 노래는 ‘뜨거운 안녕’의 인기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1967년 노래제목이 현실 부정적이란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하면서 사장되다시피 했다.
금지 사유는 ‘왜 해가 오늘 뜨지 않고 내일 뜨냐?’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 금지되었던 ‘내일은 해가 뜬다’는 15년이 지난 1980년대 초반에 대학가 운동가요집에 원제목과 가수의 이름없이 작자미상의 구전가요 ‘사노라면’으로 기록되어 불려졌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멸의 명곡으로 각인시킨 일등 공신은 들국화의 전인권이다. 그는 1987년 연극 ‘철수와 만수’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던 이 노래를 뛰어난 편곡과 발군의 가창력으로 열풍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솔로앨범과 라이브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부르며 최고 명곡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가요박물관 1집 (CD5)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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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987 추억 들국화기타 기능
조영남은 학창 시절부터 재미난 면이 많았다. 지방에서 수재로 인정받다가 어렵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 성격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입학과 동시에 밴드부와 교지 창간, 교회 성가대 반장 등 자신의 끼를 마구마구 발산하기 시작했던 조영남은 고교 시절에 이미 인생의 오랜 인연으로 남게 된 이장희, 윤형주와 친분을 쌓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양대에서 주최한 ‘전국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심사진들의 눈에 유독 띄면서 한양대 음대에 특차로 입학하게 된 조영남은 학내를 떠들썩하게 스캔들을 일으키고서 학교를 중단하게 된다.
이후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조영남은 세시봉에서 활동을 하면서미8군 무대에도 오르게 된다. 당시 톰 존스의 ‘딜라일라’를 처음 부른 이후에 히트를 예감한 동양방송 측의 오더로 당대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에 출연하게 되었고, 방송 이후 조영남은 하룻밤 사이에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하게 된다.
흔히 알려져 있기로 ’딜라일라’를 조영남의 데뷔곡으로 알고 있는데, 엄밀히 ‘달라일라’는 조영남의 첫 히트곡이다. 순수음악을 전공하던 대학생 신분이었던 이유로 한동안 조영남의 데뷔음반은 노출이 그다지 되지 않은 편이었다.
독집은 아니었지만 1966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한 [노래의 성좌시리즈 1집]에 ‘밤하늘의 트럼펫’으로 레코드 데뷔를 이뤘으며, 이 앨범에서 조영남은 고철이라는 필명으로 ‘바람쟁이’와 ‘다시 오라고’라는 곡을 번안해서 작사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조영남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몇 개 소개한다. 먼저 와우아파트와 관련된 에피소드요. 1970년 4월 8일 현재의 홍익대학교 근처에 건설되었던 와우아파트 중 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서 33명이 목숨을 잃었던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다음 날 조영남은 김시스터즈의 귀국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그 어느 때보다 ‘신고산 타령’을 열창한다. 그는 기존의 가사를 ‘신고산이 와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라고 개사해서 불렀고 한 달 후 자진해서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입대 이후 조영남은 여러 곳에 불려 다니며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어느 날 일 년 만에 갖는 부대의 중요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가 VIP로 자리했다고 한다.
뭔가 좀 특별한 노래를 부르는게 분위기에 맞겠다 싶어서 조영남은 ‘각설이 타령’을 불렀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가 반복되었고, 일 년만에 부대를 방문한 대통령 앞에서 죽지도 않고 다시 온 각설이를 신나게 부른 조영남은 다음 날 헌병대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된다.
심문의 사유는 ‘1. 왜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을 불렀느냐. 2.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도대체 누구를 뜻하는 거냐.’였다.
김인배 편곡집 - 조영남의 내 사랑 딜라 일라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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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던 윤복희는 1967년 ‘윤복희 스테레오 1집’으로 정식 데뷔했다. 이 앨범은 당시 미니스커를 입은 앨범 재킷 사진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던진 기념비적인 음반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와 ‘웃는 얼굴 다정해도’가 히트를 기록한 이 앨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보니엠이 히트시킨 ‘써니’라는 곡이다. 윤복희가 부른 ‘써니’는 보니엠이 발표한 1978년보다 무려 11년이나 앞선 버전이다.
댄스 풍이었던 보니엠의 곡과 달리 윤복희는 바비 헵의 원곡에 충실한 블루스 스타일로 가창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더블 자켓으로 발매되었다. 윤복희는 1961년 6살의 나이로 데뷔했던 하춘화보다 앞선 1956년 10살의 나이에 음반 취입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어린 가수의 음반에 대한 상업적인 불안감 때문에 녹음까지 했던 ‘보고싶은 엄마’는 아쉽게도 발매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윤복희는 4~50년대 대표적인 악극단 쇼인 ‘부길부길쇼’를 이끌던 윤부길의 장녀이자, 키보이스의 멤버로 시작해서 솔로 가수로 인기를 구가했던 윤항기의 동생이다. 윤부길은 황정자의 노래 ‘처녀 뱃사공’을 작사하고, 국내에 최초로 뮤지컬을 도입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서 재능을 지닌 엔터테이너였다.
5살의 윤복희는 양철 필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서 무대에 세워주지 않으면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결국 아버지를 설득해서 무대에 오르게 된 윤복희씨가 처음으로 불렀던 노래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중에서 아들레이드의 넘버였다.
루이 암스트롱의 내한 공연 이후 ‘대한 뉘우스’에도 소개될 정도로 집중 조명을 받던 윤복희는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며 유학을 추진했던 루이 암스트롱의 제안을 여러 사정으로 뿌리치기도 했다.
이후 필리핀에서 활동하던 당시 영국 프로모터 찰스 메이더의 제안으로 4인조 여성 그룹 코리안 키튼즈를 결성해서 영국의 BBC 투나잇 쇼에 출연해서 ‘아리랑’과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며 ‘비틀즈 이상의 개성을 지닌 뮤지션 집단’이라는 호평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후 독일과 아일랜드를 거쳐서 윤복희는 미국에 입성해서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냈다.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슈프림스(Supremes), TLC 등을 능가하는 뮤지션으로 기록되었을 윤복희는 여러 정황상 더 큰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쳐야 했다. ‘제 주제에 안 맞게 너무 다양한 삶을 살아 왔다.‘고 이야기하는 윤복희는 아티스트 중의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Time After Time - 80년대 추억 속 음악 이야기 (영화 '써니' 주요 삽입곡 모음)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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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음악 1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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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0일 급성 뇌막염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요절가수 차중락의 대표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록밴드 키보이스의 리드보컬 시절인 1966년에 처음 발표된 가을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잘 생긴 얼굴에 미스터 코리아 대회에서 2위에 입상할 정도로 건장한 몸매, 그리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차중락은 1960년대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당대의 인기가수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차중락은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서 영화감독을 꿈꾸던 건실한 청년이기도 했다.
1964년 사촌형인 가수 차도균의 권유로 록밴드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며 인생의 전기를 마련한다. 미8군 무대에서 인기몰이를 시작하던 즈음 이화여대생이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실연의 상처를 겪게 된다.
당시 비슷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던 소속사 신세기레코드의 사장 아들 강찬호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의 멜로디에 자신의 자작시를 붙여서 차중락에게 건넸고, 이 노래는 결국 차중락을 대표하는 노래로 남겨져 있다.
사실 이 곡은 첫 독집음반을 준비 중이던 쟈니리를 위해 신세기레코드에서 준비하고 있던 노래였지만, 강찬호가 자신처럼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차중락이 안쓰러워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의 최초 버전은 1966년 늦가을 록밴드 키보이스의 연주로 쟈니리, 서정길, 김선, 남석훈, 점블시스터즈 등 여러 8군 가수들이 함께한 컴필레이션 음반 [그 밤과 같이]에 수록되어 있다.
1967년 밴드를 탈퇴해서 솔로가수로 독립했던 차중락은 이 노래를 다시 불러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짧은 활동으로 많은 곡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차중락은 대표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사망 2개월 전인 1968년 9월 23일에 취입한 유작 ‘낙엽의 눈물’이 모두 낙엽을 소재로 한 공통점으로 ‘가을의 전령’으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한편 크라잉 넛과 함께 홍대 인디씬 1세대로 통하는 그룹 노브레인의 창단 멤버이자, 문샤이너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차승우는 차중락의 동생인 차중광의 아들, 즉 차중락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차중락 힛트 앨범 베스트
통기타 까페의 추억 (추억으로 봉한 음악편지) 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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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곡]Zwei Kleine Sterne [트윈 폴리오 '두 개의 작은 별' 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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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노래한 ‘안개’는 국내 최초로 국제가요제에 입상한 명곡이다. 사실 ‘안개’의 오리지널 버전은 가사가 완벽하지 않은 미완성 형태로 정훈희 이전에 남성사중창단 쟈니 브라더스가 먼저 취입했다. 이봉조의 색서폰 연주와 함께 허밍으로 ‘안개’만을 수없이 반복하는 다소 코믹스러운 버전이었다.
‘안개’는 김수용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 윤정희가 주연으로 등장했던 동명의 영화OST이기도 하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이 영화는 서울 개봉관인 아카데미 극장의 관객집계로만 1만 3천 600명을 기록한 당대의 흥행작이다.
또한 한국영화의 표현영역을 한 차원 높인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어 “노래도 걸작, 영화도 걸작, “소설도 걸작”이라는 ‘트리플 걸작’의 신화를 남겼다. 정훈희의 데뷔앨범은 발매 즉시 재발매를 거듭하며 무려 40만장이 팔려나갔다.
명곡 ‘안개’의 하이라이트는 노래 발표 3년 후인 1970년 11월 20일 38개국 44개 팀이 경연한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다. 정훈희는 국내가수로는 최초로 국제가요제에 출전해 데뷔곡 ‘안개’를 열창해 ‘월드 베스트10’에 입상하며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 수상자로 등극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 대회에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혼성보컬 그룹 아바(Abba)가 참가해서 탈락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극중 송강호는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우리 삶 속에서 여전히 호흡하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가수는 적지 않다.
그 중 대표적인 가수가 바로 ‘핸섬보이’ 배호와 ‘하얀나비’ 김정호 그리고 8.90년대의 대표적인 ‘가객’ 김현식과 김광석이다. 김광석을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11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치명적인 서정성과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네 사람의 음악은 짧다 하기엔 너무 깊고 아름다운 노래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이 외에도 장덕과 장현, 유재하, 서지원, 김성재, 터틀맨 임성훈등도 우리 곁을 먼저 떠난 안타까운 음악인들이다. 배호의 대표 곡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3년에 이미 작곡된 곡이다.
당시 삼각지는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입체교차로가 생기나기도 전이다. 작곡가 배상태는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까지 출퇴근하면서 삼각지 부근에서 비가 내리는 어느 날 한 사내가 쓸쓸하게 돌아가는 모습이 떠올라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여러 가수에게 구걸하듯 전달되며 레코딩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남일해는 바쁜 스케줄로 연습만 몇 번 하고 녹음은 진행하지 못했고, 가수 금호동도 구닥다리 노래라며 퇴짜를 놓았다.
잘나가던 신인가수 남진에게도 녹음을 의뢰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아세아레코드의 전속 무명가수 김호성이 처음으로 녹음을 했지만 음반으로 제작되지는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배호에게 악보를 건넸다.
건강 때문에 거동조차 힘들었던 배호 역시 처음에는 노래취입을 사양했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가래를 뱉어가며 취입을 강행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67년 빛을 보았다.
오리지널 버전은 박자가 일부 끊겨 있고 목소리 역시 병색이 완연하다. 그 때문에 대중은 '병자의 노래, 깡패소리 같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4개월 후 KBS 대구방송 가요차트 8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응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이후 장장 5개월 동안 정상을 석권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했다.
1972년 정미조가 ‘개여울’을 발표했을 때 ‘소월의 시가 50년 만에 대중가요로 탄생했다’고 기사에 인용될 만큼 한국인은 김소월의 시를 사랑해 왔다. 노래는 물론 김소월의 시가 지닌 우수한 감수성으로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노래 ‘개여울’의 오리지널 가수는 정미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미조보다 5년 앞선 1967년 킹레코드에서 발매된 이희목 작품집에는 ‘개여울’의 최초 버전이 담겨 있다. 이 음반에는 정미조의 또 다른 빅히트 곡인 ‘파도’의 최초 버전까지 실려 있기에 이 음반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앨범에서 언급한 두 곡을 가창한 이는 모두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1963년 KBS 노래자랑대회에서 손석우에 의해서 KBS 전속가수 6기로 데뷔했다. ‘개여울’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4주 동안 KBS 라디오 인기가요 차트 정상을 지켰던 히트곡이었다.
작곡가 이희목은 KBS 전속 신인가수 김정희의 담백한 노래가 큰 반응이 이끌어내자 1966년 아마추어 작곡가 콘테스트에 출품해 당당히 1등상을 수상해서 방송용으로 녹음한 음원으로 음반을 제작했다.
비정상적으로 세상에 던져진 이 음반은 김정희의 짧은 활동으로 노래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쉬움이 컸던 작곡가 이희목은 1972년,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정미조에게 ‘개여울’과 ‘파도’ 2곡을 리메이크시켜서 빅히트를 터뜨렸다.
대중은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한 정미조의 히트 버전에 익숙하겠지만, 김정희 버전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매력과 60년대의 낭만적 분위기가 가득하다. 한편 김정희의 막내아들 박영수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바로크메탈밴드로 손꼽히는 그룹 지하드(Zihard)의 기타리스트이자 리더로 활동 중이다.
미인시대(美人時代)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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힛트총결산 - 사랑과 계절 / 사랑의 바닷가 베스트
나훈아하면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여러 개 있지만, 그의 인기와 가수로서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2007년 이른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변호사 김용철은 자신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건희 회장 일가의 파티와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책 내용에 따르면 이 파티에는 가수는 물론 여러 연예인들이 출연해서 보통 3,000여만 원의 개런티를 받고 무대에 섰다고 한다. 워낙에 거액이다 보니 이러한 제의를 거부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는데, 오로지 나훈아만이 삼성 쪽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거절 사유는 “나는 대중 예술가다. 내 공연은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행해진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에서 표를 끊고 들어라.” 아티스트다운 자세와 자부심이 엿보이는 일화이다.
어린 시절 고향 부산에서 대학생 형을 따라 1965년 상경한 나훈아는 서라벌예고에 입학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데뷔를 이루게 된다. 그의 데뷔 년도는 지금까지 정확하게 판명되지 않았다.
당대의 언론 자료와 현재의 각 인터넷 포털 사이트 프로필에 명기된 나훈아의 데뷔곡은 1966년에 발표된 ‘천리길’로 등록되어 있다. 문제는 ‘천리길’이 수록된 음반의 발표 년도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천리길’이 수록된 음반의 발표 년도는 모두 1969년이다. 그러나 1969년 이전인 1968년에 발표된 음반이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이 개관을 하면서 2장이나 발견되었다. 노래 제목도 ‘천리길’과 비슷한 ‘파도 넘어 천리길’과 ‘내 사랑’이다.
가수의 역사는 음반으로 공식화되고, 기록이 시작된다. 음반으로 확인된 나훈아의 데뷔 년도는 1968년이고, 데뷔곡은 ‘파도 넘어 천리길’과 ‘내 사랑’, 둘 중의 하나다.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의 제작사는 오아시스레코드로 같지만, 음반번호가 오아시스와 성음의 번호로 각기 다르기에 정확한 판명이 쉽지 않다.
확인된 나훈아의 음반은 100장이 넘지만, 정확하게 몇 장을 음반을 발표했는지도 오리무중이란 점에서 나훈아는 흥미로운 가수다. 데뷔 당시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던 나훈아는 1968년 작곡가 김영광의 ‘사랑의 눈물의 씨앗’을 통해 대중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히트한 ‘강촌에 살고 싶네’와 ‘님 그리워’를 통해 나훈아는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남국인 작곡 제2집 (사랑은 꽃잎인가 / 후회없이 가련다) [디지털복원] 기타 기능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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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서울에 처음으로 등장한 전차는 1969년에 이르러서 모두 철거되었다. ‘마포종점’은 마포구 도화동에 살던 작사가 정두수가 구슬픈 종소리와 함께 서민의 애환과 정취를 실어 나르던 전차가 사라진다는 아쉬움에 연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덧씌워서 만든 노랫말에 작곡가 박춘석이 곡을 붙여서 완성된 노래이다.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이 발표된 1968년은 서울의 전차가 운행이 중단되고 철거 공사가 막 시작되던 해였다. 서울 도심에서 사라진 추억의 교통수단인 전차와 노래의 2절 가사에 등장하는 당시의 여의도는 1963년에 개장한 김포공항으로 인해 군사비행장으로만 사용되던 곳이었다.
또한 여의도는 1971년 폐장 후 사라진 국내 최초의 비행장이 있던 공간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가속이 붙었던 당시 서울에 대한 로망이 극심했던 시골 처녀 총각들의 이농현상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였다.
상경 러시를 이루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을 시작한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은 서울의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와 공장 밀집 지역인 마포와 한강 넘어 영등포였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은 아련하건만, 돌아오지 않는 슬픈 정서를 노래한 마포종점은 변두리에 거주했던 당시 서민들의 애틋한 삶의 정서를 담아낸 명곡이다.
지금은 차를 타고 마포대교를 통해 여의도를 지나 영등포로 건너지만 당시는 배를 타야만 했다. 마포는 서울 도심을 누비던 서울의 전차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종착역이자, 서민들의 삶에 희노애락이 배인 장소였다.
수영 선수였던 언니 배인순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시작하면서 동생 배인숙도 함께 음악을 하게 되었던 여대생 걸 그룹 펄시스터즈는 1968년 한국 대중음악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동네에서 활동하던 보컬 그룹이 8군 무대에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따라 갔다가 관계자의 눈에 띄어 즉석 오디션을 보며 데뷔했던 펄시스터즈는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했다. 활동 당시 허벅지가 드러나는 요염한 핫팬티를 선보이는 섹시한 이미지로 남성 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으며, 1968년 발표된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과 ‘님아’는 걸 그룹 사상 최초로 가수왕 타이틀을 안긴 당대의 명곡이다.
1962년부터 한국적 락을 시도했지만 대중들에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월남으로 떠나려 했던 신중현은 펄 시스터즈의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신중현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한국 대중음악계는 오디오형 가수 세대에서 무대와 비디오 지향형 가수의 시대로 전환될 수 있었다.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은 엄밀히 온전한 의미의 독집은 아니다. 1면에 수록된 6곡은 신중현의 창작곡들이지만, 2면은 60년대의 히트곡들을 신중현이 리드한 락 밴드 덩키스가 재해석한 연주곡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빅 히트곡 ‘커피한잔’, 또한 1964년 한국 최초로 발표된 락 창작앨범에서 리드보컬 서정길이 ‘내속을 태우는 구료’로 이미 발표했던 노래였다.
1970년 발표된 노래 ‘웨딩드레스’는 ‘하와이안 웨딩송’과 함께 당대에 결혼 축가로 많은 사랑을 받던 곡이다. 정인엽 감독의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로도 사용되었던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는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다양한 버전의 노래가 존재하는 흥미로운 사연을 지니고 있다.
엄밀히 노래를 부른 가수와 가사, 그리고 제목은 같지만, 정작 길옥윤과 정풍송이라는 2명의 작곡가에 의해 각기 다른 멜로디로 발표된 노래이다. 방송국에서는 신청엽서를 받으면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서 애를 먹은 적이 잦았으며, 한상일 본인 역시 신청곡으로 ‘웨딩드레스’를 무대에서 불러야 할 때 두 곡을 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해프닝을 벌여야만 했다.
지금의 대중이 기억하고 여전히 리퀘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버전은 이희우가 작사하고 정풍송이 작곡한 멜로디의 ‘웨딩드레스’이다. 대학시절 이미 마리오 란자(Mario Lanza),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 프랭크 시나트라 등에 심취해 4중창단을 결성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던 한상일은 1966년, 칸초네 ‘Carissimo Pinocchio(피노키오의 편지)’를 기가 막히게 부르며 KBS 전속가수 1기생으로 발탁되었고, 1967년 데뷔곡 ‘내 마음의 왈츠’를 발표하면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다.
뮤지컬에도 출연을 했던 한상일은 ‘대춘향전’에서 패티김과, ‘빠담빠담빠담’에서 윤복희와 함께 연주와 연기를 담당하며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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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벅스 뮤직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