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누구이고 내가 태어난 고장은 어떤 곳인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고 생각이다. 이번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후손들의 소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의성김씨 수당공 김영선가'라는 책을 발간하여, 내가 자란 고향 합천 노파의 역사와 여러가지 유적에 대한 내력을 알게 되어 뜻 깊다.
오랜 세월 동안 각종 기록들을 소중하게 간직한 후손들도 대단하고,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귀중한 책자를 발간하여 노파 마을의 뿌리와 근원을 알 수 있도록 하여 준 한국국학진흥원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느낀다.
"합천 노파 의성김씨 마을의 역사"
옛 행정구역상 합천군 봉산면 노파리의 의성김씨 마을은 합천댐의 조성으로 1988년도에 수몰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하지만 수몰되기 전 이 마을에서 출생하고 자란 40대 이후의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생각이 항상 마음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후대 세대는 부모와 조상들의 터전(뿌리)에 대하여 잘 모르고 알기도 쉽지 않다. 비록 마을이 수몰되어 없어졌지만 400여년 이상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마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남겨서 혹시라도 뜻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의성김씨의 시조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석(金錫)이며, 중시조는 9세손인 첨사 김용비공
이다. 합천군의 의성김씨 첫 입향조는 시조의 16세손인 김헌공이다. 김헌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으로 재임하시다가 기묘사화에서 정암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합천으로 이거하였다.
합천으로 이거한 이유는 고조부인 남파 김광부공(시조의 12세손)이 가수현(현재 삼가면)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곳이고 처가가 이 곳이기도 하여서다.
그리고, 김헌공의 조부가 괴정 김숙검공(시조의 14세손)으로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형님인 김전과 함께 한 집안에서 세분의 제학을 배출하여 3제학이라고 한다.
김헌공의 아들은 김윤우공(시조의 17세손, 의흥위대호군)이고, 손자는 김수일공(시조의 18세손, 첨지중추부사)이다. 김수일공의 아들이 덕탄 김두남공(시조의 19세손)이다. 김두남공은 김극민, 김극형의 두 아들이 있고, 김극민공(시조의 20세손, 1591~1670)의 호가 반곡으로 용주면 고품에서 반계로, 다시 옥계를 거쳐 노파에 입향하여 1620년대부터 대대로 노파에서 살게 되었다.
시조의 19세손인 덕탄 김두남공과 아들 김극민, 김극형 그리고 손자 김팔화, 김팔휴, 김팔거가 모두 효행으로 정려를 받거나 복호되는 은전을 받았는데 이들의 행적이 '육효록'에 수록되어 '육효세가'라 칭송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이후 세대를 거치면서 다섯 형제로 분파하여 5파 집안으로 형성되어 수몰되기 전에 60여호의 의성김씨가 살았다.
1800년대 말에 경주 최씨, 함종 어씨, 광주 노씨 등이 입향하여 몇 가구가 함께 거주하였지만 대부분의 거주민이 의성김씨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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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되기전 노파 마을 전경, 왼쪽으로 밀면 더많이 볼 수 있음>
마을 앞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황강이 흐르고 강변은 모래사장과 자갈마당이고, 강 가운데는 구시바위 등 아름다운 암석이 군락을 이루어 경치가 아름다웠다.
마을 뒷산은 서기산, 앞산은 호롱산 등 주변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농경지는 대부분 강 건너와 뒤쪽 시미재너머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을 앞으로 도로가 있고 1946년도에 설립한 노파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어 마을로 부터 반경 2km 이내 주변 마을들의 교육과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주요 유적"
마을의 중앙에는 백원당, 우측에는 현산정, 좌측에는 동로서당 등 한학을 강습하던 서당과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서 주변 마을의 나이든 성인들이 학문을 깨우치던 마을이었다. 수몰이 되면서 백원당은 용주면 고품리로 이전하여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고, 현산정은 봉산면 봉계리로 이전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삼가면 양전리에는 남파 김광부공의 순절유허비와 재향을 위해 지은 재실인 인서재가 있으며, 용주면 고품리에는 덕탄 김두남공과 동생인 구봉 김도남공 형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용강정사와 아들인 반곡 김극민공과 김극형공의 사적비가 있다. 덕탄공과 구봉공 형제가 소요하며 강학하던 매학정도 이 곳에 있다.
또한, 용주면 고품리에 남파 김광부공을 비롯하여 덕탄 김두남공 형제분까지 여덟분의 신위를 배향한 세덕사도 보존 관리하고 있다. 마을은 없어졌지만 선조들의 얼이 서린 여러 유적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자료 - 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백원당의 모습이다. 의성김씨의 재실로 향계 김태명공(1661~1721)이 강론했던 곳으로, 효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당명을 지었다. 1700년에 세워진 건물로 원래는 봉산면 노파리에 있었는데, 합천댐 건설로 1981년에 합천군 용주면 고품1리로 이전하여 후손들에 의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백원당의 뒷 야산에 덕탄공, 반곡공 등 조상들의 산소가 있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덕탄 김두남공(1567~1615)과구봉
김도남공(1579~1656) 형제가 소요하면서 강학했던 곳인데, 원래는 현 용강정사가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1885년에 이 곳에 중수했다고 한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242-1이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덕탄 김두남공과 구봉 김도남공 형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64년에 창건했다. 원래 서원으로 지어 "용강사"라고 편액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철폐되고, 그 뒤 후손들의 발의로 현 위치에 정사로 중건된 것이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586-1이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세덕사는 남파 김광부공을 주향하고, 아들 석포 김로공과 손자 괴정 김숙검공, 증손인 월산 김안중공을 비롯하여 김안중공의 아들인 송정 김전공과 김헌공(홍문과대제학), 그리고 송정 김전공의 현손인 덕탄 김두남공과 구봉 김도남공 등 모두 여덟분의 신위를 배향하는 곳이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242-1이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남파 김광부공은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경상 도순무사로 임명되어 지금의 삼가지역인 가수현을 침입한 왜구와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고종 35년(1898년)에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 곳에 순절유허비를 세웠는데 2020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제666호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삼가면 양전리 285이다.
인서재는 남파공을 재향하기 위해 지은 재실로 1998년 옛 터에 중건되었다. 출입문의 이름은 숭절문이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삼가면 양전리 377이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남파 김광부공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용인시의 판교에 있었지만 그 터를 유실하여 뒤에 후손들이 판교에서 혼백을 모셔 이 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부인 광주이씨는 좌측에 부장하였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삼가면 동리 134이다.
<자료-한국국학진흥원국학자료목록집 74>
합천댐이 건설되면서 1988년 수몰된 노파 마을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노파망향탑이다. 탑의 여섯 기둥에는 세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로 인, 의, 예, 지, 신, 용의 6대 덕목을 지켜온 노파 예향을 상징하며, 둘째로 인명록에 있는 여섯 문중의 성씨 김, 어, 노, 최, 권, 진을 의미하며, 마지막으로 6효자를 배출한 육효세가의 명문임을 표상한다.
현재 위치는 합천군 용주면 죽죽리 산 8-9이다.
수몰된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격년으로 4월에 이 곳에서 만나 노파망향동산만남의 축제를 개최하며 고향을 기린다.
[출처] 합천 노파 의성김씨 마을의 역사와 유적|작성자 즐거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