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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1 오전 11:53
출처 :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452&aid=0000000714&viewType=COLUMN
국내축구 서호정 現 골닷컴 기자. 다양한 축구 소식을 전하는 스토리텔러
대한민국 축구의 근간을 이루는 K리그. 지구촌을 누비는 해외파들을 배출한 곳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아시아 최고로 설 수 있게 해주는 힘도 모두 K리그에 있습니다. 미래의 K리그 스타를 발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조명해주는 시간. NEXTAR-K에서 확인하세요.
한국 축구 각급 대표팀과 프로, 아마추어 경기를 보면 일반인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문제 하나가 있다. 바로 측면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다. 방향과 세기뿐만 아니라 받는 선수의 위치, 타이밍까지 계산해서 올려야 하는 크로스는 축구의 또 다른 예술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측면에 빠르고 강한 선수들이 많았던 한국 축구지만 정확한 크로스를 올려주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게 과거와 현재의 약점이다.
최근 뛰어난 크로스 실력으로 화제를 모으는 측면 수비수가 K리그 클래식 울산 현대에 있다. 13번 이명재. 왼발잡이라는 메리트까지 더해진 그는 프로 4년차인 올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왼발 스페셜리스트 이기제, 좌우 측면을 모두 소화하는 정동호가 있음에도 울산의 왼쪽 측면을 접수한 이명재는 30경기에 나서 1골 4도움을 기록했다. 4도움은 모두 예외 없이 이명재의 왼발을 떠난 큰 각도의 크로스가 동료들의 머리를 맞고 골로 연결된 것이었다.
염기훈 정도를 제외하면 확실한 믿음을 주는 그라운드의 택배 배달원이 없는 상황에서 이명재의 등장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그가 왼발이 좋은 풀백 자원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은 더 커진다. 풀백들의 공격 가담은 세계적으로 최근 전술 트렌드의 핵심이다. 이명재는 향후 한국 축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확실한 무기 하나를 갖고 있는 셈이다.
1993년생인 이명재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낳은 ‘4강 세대’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초등학생 때 누나들의 손에 이끌려 광화문에서 응원을 시작하다 확 꽂혀서였다.
“누나가 2명인데 저랑 나이 차가 많아요. 저는 이란성 쌍둥이인데 누나들과는 10살 차가 나거든요. 한일월드컵 때 누나들이 저를 데리고 응원을 다녔어요. 4남매가 열심히 축구 보러 다녔죠. 그때 축구가 너무 좋아졌어요. 쌍둥이 동생은 저랑 달라서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저는 동네에서도 공으로 하는 운동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4학년에서 5학년으로 올라가던 때에 아버지께서 정말 축구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아버지도 과거에 운동을 하셔서 제가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걸 좋게 보셨나 봐요. 당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광희초등학교 축구부였어요. 테스트를 받았는데 곧바로 감독님이 전학오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선수 생활을 시작했죠.”
이명재는 자신을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도 크게 돋보인 선수는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축구는 누구보다 좋아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었던 축구를 사랑했고,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했다. 쉬는 날에도 운동을 했다. 아버지도 열심히 도왔다. 쉬는 날 아침에 깨워 “줄넘기 하고 오자”며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한양중, 중경고 시절을 회상한 이명재는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는 건 자부한다”라며 웃었다.
중앙 미드필더와 측면 수비수를 오가던 이명재가 확실히 지금의 포지션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중경고 시절이다. 홍익대에 진학해서는 좋은 왼발을 지닌 측면 자원으로 프로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의 진로는 울산 현대였다. 공교롭게 당시 홍익대 축구부를 이끈 김종건 감독도 현역 시절 울산에서만 맹활약했던 골잡이 출신이다.
“솔직히 대학에서 더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프로 입단 얘기는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제가 부족함을 알고 있어서 1년 정도만 더 하고 갔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2학년 마칠 때 쯤에 김종건 감독님께서 짐 싸서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네? 했더니 집에 가면 알 거라고 웃으시더라고요. 아버지께서 프로로 가자며, 울산에서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울산으로 가는 건 그렇게 운명처럼 이뤄진 것 같아요.”
프로 무대 입성에 신중했던 이명재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프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까지 4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중간에 J리그의 알비렉스 니가타 임대를 다녀오며 전환점을 만들려고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울산 입단 후 첫 동계 훈련을 시작했을 때는 재미있었어요. 수준 높은 선수들과 더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어서 좋았죠. 그런데 시즌 시작하니까 프로는 분위기가 달라지더라고요. 경쟁의 수준이 달랐어요. 이전처럼 마냥 즐겁게, 열심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프로는 이겨야 하는 무대니까 경기에 나가기 위한 단계에서의 경쟁부터 치열했죠. 신인으로서의 한계였어요. 프로의 생태에 대해 무지했고요. 기회가 올 거 같은데도 마지막 고비에서 못 넘고, 경기에 들어가도 힘과 기술의 수준이 달랐어요.”
“니가타로의 임대는 운이 좋았어요. 제가 활로를 찾고 싶었어요. 반년 동안 경기에 못 나가는 게 힘들어서 에이전트에게 뛸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죠. 그러다 일본행이 급진척됐어요. 6개월 동안 했던 일본 생활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어요. 전 다른 생각 없이 오직 뛸 기회를 잡기 위해 갔거든요. 다행히 당시 그 팀에 친구인 송주훈이 있었고 둘이 의지를 많이 했어요. 원했던 대로 임대 후 초반에 5경기를 뛰었는데 그 뒤 무릎 인대에 부상이 왔어요. 많이 아쉬웠죠. 더 뛸 수 있었는데.”
울산으로 돌아온 이명재는 2015시즌 19경기에 출전해 3도움을 올리며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2016년 또 벤치에도 앉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5경기 출전에 1도움 기록이 전부였다. 그 2년 동안 이명재는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현실에 더 부딪히려고 노력했다. 때를 기다리며 노력, 또 노력했다. 그 기다림은 2017년 결실을 맺었다.
“부상을 당하고 임대를 마친 뒤 생각이 바뀌었어요. 도망가지 말고 울산 안에서 이겨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지난 2년 간 출전 기록은 부침이 심했지만 훈련장에서만큼은 기복 없이 정말 열심히 한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 기준에서는 그 열심히라는 평가는 다르겠지만 제 자신한테는 한번도 거짓말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어요. 2년 동안 제가 확실한 신뢰를 받기 위한 것을 채웠죠. 결국 올해 보상이 온 거죠. 김도훈 감독님이 오시면서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됐어요. 올 시즌은 초반에 경기를 못 뛰어도 실망하지 말고 최상의 몸 상태로 준비하자고 다짐했어요. 감독님도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동계훈련부터 지켜 주셨거든요. 그렇게 기회를 얻었어요.”
이명재의 모바일 메신저 소개글은 ‘1년만 미치자’다. 2017년 1월 1일 바꾼 글이 10개월째 그대로다. 자신과 했던 약속이었고, 프로 4년차의 각오였다.
“축구를 한 시즌을 하는 동안은 제 일에 미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그 다음 해에 또 기회가 오고, 더 좋은 상황도 생긴다는 걸 주변의 형들을 통해 봤으니까요. 그래서 1년만 미쳐서 해 보자고 한 거예요. 프로에 와서 자리도 못 잡고, 사라지는 선수가 많은데 3년 넘게 기회를 얻었으면 4년째에는 모든 걸 걸어서라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약속이었어요.”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시즌 초반에는 기존 주전이었던 이기제가 먼저 기회를 얻었지만 4월 말부터 왼쪽 측면 수비는 이명재의 차지가 됐다. 울산이 초반의 부진을 딛고 대반전에 성공한 시기와 맞물린다.
늦은 데뷔골도 올 시즌 나왔다. 지난 9월 23일 전남과의 홈 경기였다. 코너킥 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을 가슴으로 잡아 왼발로 자신 있게 때린 공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골망을 흔들었다. 전남의 골키퍼 이호승이 반응도 못할 정도의 대포알 슛이었다.
“그 경기보다 2경기 앞선 상주전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골대를 맞고 나왔어요. 그때까지 골은 의식을 안했는데 그런 장면에서 뭔가 팀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원래는 제가 더 뒤에서 상대의 역습을 대비하거든요. 그런데 자신감이 생겨서 원래 그 자리에서 슈팅을 준비하는 (정)재용이 형에게 한번 바꿔서 해보자고 얘기했어요. 코너킥 때 공이 흘러나올 때 느낌이 왔어요. 마침 공이 딱 와서 가슴으로 잡고 조금만 템포를 빠르게 해 때리자고 생각했죠. 왼발을 맞는 순간 기분이 좋았어요. 공의 궤적을 보는데 슬로우 모션처럼 상대 수비 사이를 뚫고 구석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권투에는 “왼쪽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 농구에서도 왼손잡이 슈터는 템포가 달라 상대 수비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축구의 왼발잡이 역시 그 수가 오른발잡이에 비해 적어 유리한 부분이 있다. 과거의 하석주, 고종수, 이을용이 그랬고 현재의 염기훈이 그런 것처럼 이명재의 위력적인 왼발은 한국 축구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왼발잡이였어요. 밥 먹을 때는 왼손을 쓰고, 글씨는 오른손으로 써요. 오른발은 잘 못 써요. 거의 디딤발로만 쓰죠. 저도 왼발의 희소성이 제 무기라고 생각해요. 축구를 하는 내내 메리트가 됐죠. 무엇보다 왼발 잘 쓰면 멋있잖아요.(웃음)”
“이제는 제 왼발에 확실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특히 크로스 상황 때요. 정말 제대로 보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죠. 첫 터치를 제일 신경 써요. 처음에 잘 잡아야 해요. 제 나름의 터치 노하우가 있거든요. 공을 앞으로 좀 놓고 한번에 쭉 올리는 타입이에요. 바로 올릴 수 있게 공을 제대로 놔야죠. 그것만 되면 제가 원하는 포인트로 올릴 수 있어요. (이)종호 형이 제 왼발 포인트, 타이밍이랑 잘 맞아요. 워낙 위치 찾아가는 능력도 좋고, 평소에도 둘이 계속 이렇게 하자, 저렇게 맞추자 애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잡으면 종호 형이 약속한 위치로 가 있어요.”
이종호와의 약속된 전술로 나온 대표적인 골이 올 시즌 울산이 전북을 무너트렸던 결승골이었다. 8월 6일 있었던 전북과의 원정에서 이명재가 측면에서 올린 긴 크로스를 이종호가 헤딩으로 마무리했다. 6년 가까이 전북전 승리가 없었던 울산에게 선물한 소중한 승리의 골이었다. 이명재도 올 시즌 크로스로만 기록한 4개의 어시스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제 상대팀에게 확실한 경계의 대상이 된 강력한 크로스의 풀백이지만 이명재에게는 다음 과제가 남았다. 공격 가담과 크로스가 좋은 풀백을 넘어 수비까지 확실히 소화할 수 있는 더 완벽한 풀백으로의 발전이다. 그가 롤모델로 삼는 레알 마드리드의 마르셀루처럼 공수를 넘나들며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오른발 사용 빈도도 늘릴 필요가 있다.
“마르셀루가 공격적인 플레이도 잘하지만 수비에서도 믿음을 주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이제 크로스는 자신 있지만 상대 선수들은 그걸 파악하고 나오거든요. 그럴 때는 무엇으로 그들을 파고 들어야 하나 싶어요. 아무래도 오른발을 더 써야 하겠죠. 그리고 안으로 적극적인 돌파를 해야 하고요. 오른발은 많이 노력 중이에요. 솔직히 저희 팀 왼발잡이 중에서는 제 오른발이 제일 낫거든요.”
“수비는 프로에 온 뒤 가장 지적 받는 부분이죠. 다부지고 강한 플레이가 부족하다는 얘길 계속 들어요. 제가 축구를 좀 순하고 예쁘게 해 온 걸 인정하거든요. 이제 수비도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부딪히고, 덤비고, 터프하게도 하고. 끝까지 덤비는 아스필리쿠에타처럼 끈질기게 막는 선수로 발전해야죠.”
그리고 가슴에 품은 꿈. 바로 국가대표다. 이명재의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15년 전의 월드컵처럼 언젠가는 국가대표가 돼 월드컵 무대에 나서며 또 다른 어린이들에게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해주는 게 이명재의 목표다.
“선수 생활 하면서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그리고 월드컵에서 선배님들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며 축구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목표는 국가대표팀에 가는 것이었어요.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하고 팀과 제가 모두 잘하면 기회는 한번 오지 않을까요? 이제 또 다른 목표를 기다리며 더 노력해야죠. 내년에도 1년 더 미쳐 보려고요.”
★ 팬이 묻고 이명재가 답하다
[ggol****] 크로스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우리 아들이 어떻게 하면 전남전 강슛처럼 찰 수 있냐고 제게 매일 물어봅니다. 그래서 밥 많이 먹으면 된다 말하곤 합니다.
이명재: 당연히 밥도 많이 먹어야 하고요.(웃음) 무엇보다 공을 많이 차고, 노력해야 그런 상황이 나와요. 자기만의 플레이를 만들어 가는 거죠. 그 장면은 제가 원하고 상상했던, 평소에 연습한 장면이 나온거였어요. 제가 원하던 그 장면에서 준비했던 대로 완벽하게 찬 거죠. 아드님이 즐겁게 공을 찰 수 있게 도와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ilb0****] 윙백 전문 학원 울산에 입단하지 4년차입니다. 그동안 김영삼 임창우 정동호 김태환 이기제 김창수 이용 수많은 윙백들이있었는데 어떤 선수가 제일 좋았나요.
이명재: 용이 형요. 신인 때 들어왔을 때 용이 형이 국가대표로 가고 월드컵도 나갔어요. 저랑은 보는 위치도, 쓰는 발도 반대지만 정말 크로스가 좋은 형이거든요. 형처럼 멋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지금도 가끔 연락 드려요. 지금 스포츠탈장 수술 후 치료 중인데, 항상 제가 보고 배우는 우상이니까 빨리 복귀해서 좋은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 내년 전북전에서는 용이 형과 붙어 보고 싶습니다.
[jhso****] 낚시 멤버 중 가장 못 잡는 멤버는?
이명재: 어떻게 아세요? 제가 서울에서만 살다 와서 울산 온 뒤 적응이 어려웠어요. 그러다 93년생 친구들과 취미로 낚시를 다녔어요. 낚시 멤버요? 장대희, 김용진, 저 3명입니다. 아, 용진이는 최근 개명을 해서 이제는 수안이에요. 쉬는 날이면 울산 근처로 강 낚시, 바다 낚시를 가요. 바람도 쐴 겸 해서 가는 거죠. 수안이가 제일 못해요. 걘 잘하는 게 없어요. 뭐든지 꼴지죠.(웃음)
[mugg****] P사 축구화를 신으시던데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이유가 있나요?
이명재: 제 스폰서는 아닌데, 같은 팀의 (강)민수 형이 후원을 받고 있어요. 우연히 한번 신어 봤는데 잘 맞더라고요. 올해는 계속 신고 있어요. 아직은 직접 사서 신습니다.(웃음) 저도 후원이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후원해주신다면 저는 어느 회사 축구화든 신을 생각이 있습니다.
[JDH] 올 시즌 울산 현대 시즌권 구매하고 자주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이명재 선수 팬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등번호 13번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앞으로 쭉 지금 등번호를 유지해서 13번을 이명재선수의 상징으로 삼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그러시다면 내년 유니폼에는 '13번 이명재'선수를 마킹해서 홈개막전 문수경기장 지하 버스탑승장에 싸인받으러 가겠습니다.
이명재: 처음엔 24번을 달았어요. 작년부터 제가 번호를 고를 기회가 있어서 13번을 달고 있습니다. 축구를 할 때부터 3번과 계속 인연이 있었어요. 원래는 3번을 제일 좋아하는데, 울산에서는 (정)동호 형이 이미 3번을 달고 있어요. 프로에서는 숫자가 둘 붙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고, 마침 13번이 비어 있어서 그걸 했죠. 앞으로도 울산에서, 프로 무대에서 계속 13번을 달고 싶습니다.
[오오티] 현재 뛰고 있는 같은 포지션에서 최고의 K리그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명재: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같은 프로 선수인데, 제가 최고이고 싶지 누가 최고라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요. 일부러 그렇게 생각해요. 축구만큼은 자신 있게 하고 싶습니다. 마르셀루, 염기훈 선수처럼 제가 좋아하는 선수는 있지만 그들을 따라잡아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서호정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기사제공 서호정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