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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자창제의 주체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문헌고증을 통해 명확히 밝힌 家苑 『千字文 大觀』 의 글이다.
활[弓]과 東夷族(동이족), 그 후손인 艮方(간방)의 나라, 조선
‘東夷’라는 명칭의 성립 과정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해 뜨는 동쪽의 활을 잘 쏘는 族屬(족속)이라 하여 東夷族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東夷族이란 표현을 썼을까?
'孟子' 離婁(이루)下편에서 孟子는 “舜은 生於諸馮하사 遷於負夏하사 卒於鳴條하시니 東夷之人也시니라 文王은 生於岐周하사 卒於畢郢하시니 西夷之人也시니라 地之相去也 千有餘里며 世之相後也 千有餘歲로되 得志行乎中國하시언 若合符節하니라(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에 옮기셨다가 명조에서 졸하셨으니 동이의 사람이시니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졸하셨으니 서이의 사람이시니라. 땅의 서로의 거리가 천여 리이며, 세대의 서로 뒤 함이 천여 년이로되, 뜻을 얻어 나라 가운데 행하셔서는 부절을 합한 것과 같으니라.)”했다.
순임금을 東夷人이라 하고, 문왕을 西夷人이라 하면 그 가운데의 어느 지점을 표준으로 하여 東西로 나눴을까? 地理상 절대적 중심 개념은 성립될 수 없고, 다만 상대적 중심 개념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두 분은 시대적으로도 천여 년을 앞뒤 하기에 시대에 따른 중심지역을 놓고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순임금은 당시 天子였기에 虞(우)나라가 中心國家인 中國(가운데 나라, 나라 가운데)에 해당하므로 東夷라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文王은 아들인 武王이 中心國家인 周나라의 천자가 되었으므로 주나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西夷라고 일컬을 수 없다.
따라서 순임금을 東夷라고 일컬음은 맹자 당시인 戰國時代의 관점이자 여전히 周나라가 상징적 중심국가였으므로 주나라의 관점에서 東夷라 했고, 반면에 文王은 周나라보다 앞선 중심국가인 殷나라의 서쪽인 周나라 제후였기에 은나라를 中國으로 하여 西夷라 부르는 것이다.
두 분 모두에 대해 夷族이라 일컬은 까닭은 무엇인가? 『千字文 大觀』1권의 제3節 11장 서설에서 堯制五服圖와 함께 살펴보았듯이 夷(이)는 中國인 王畿(왕기, 왕의 서울) 바깥으로 1천5백 리로부터 3백 리인 1천8백 리까지의 지역을 夷라고 일컫는다. 中國을 중심으로 5백리마다 甸服(전복)과 侯服(후복)과 綏服(유복)과 要服(요복)과 荒服(황복)을 나눴으니, 夷族은 要服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제도가 주나라에 들어서 公侯伯子男의 제도로 운영되었으니 中國을 중심으로 한 대략의 거리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文王은 殷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西夷族에 해당하고, 舜임금은 周나라를 중심으로 西夷라고 표현된다.
堯임금 때부터 있었던 檀君(단군)의 朝鮮 땅은 동쪽이기는 하나 夷族에 해당하지 않고 周나라가 鎬京(호경) 땅을 도읍지로 하여 중심국가인 中國이 되었을 때에야 朝鮮은 東夷族이 된다. 그 후 명나라와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中國은 주로 鎬京과 長安과 咸陽인 西京(오늘날의 西安)과 洛陽인 東京을 왔다 갔다 했고 [ 『千字文 大觀』 ‘제52장 序說’ 참조],
統一秦 五服제도가 무너져 앞 세대에 규정된 용어가 이후로는 고착화 되어 조선 땅을 東夷라고 불렀고, 이것이 굳어져 오늘날까지 東夷라고 부르는 것이다.
더욱이 朝鮮을 東夷이라 고착화하는 데에는 漢書와 三國志・魏志의 영향이 매우 크다. 漢書 地理地下편에 “東夷는 天性柔順하여 異於三方之外라 故로 孔子悼道不行하여 設浮於海하여 欲居九夷라하시니 有以也夫아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남서북쪽의 바깥과는 다르니라. 그러므로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슬퍼하여 가설하시기를, ‘論語 公冶長편에 바다에 떠다니다가 論語 子罕편에 구이에 거처하리라.’고 하셨으니 이 때문인가?)”하는 내용과
三國志・魏書 가운데 ‘烏丸・鮮卑・東夷傳’이다. 더욱이 魏書에서는 東夷傳 아래에 夫餘傳・高句麗傳・東沃沮傳・挹婁傳・濊傳・韓(馬韓・辰韓・弁韓)傳・辰韓傳・弁辰傳・倭人傳을 두어 東夷는 곧 만주땅과 海東인 조선과 일본 땅까지를 아우르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高句麗傳에 “國人有氣力하여 習戰鬪하여 沃沮와 東濊皆屬焉(나라 사람들이 기운과 힘이 있어 전투를 익혀 옥저와 동예를 다 복속시켰느니라.)했다.
[高句麗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뒤의 글 ' 동이족 한자창제의 근거 : 京을 통해서 본 漢字의 기원' 글 참조].
변방족의 하나를 왜 ‘夷’라고 표현했을까?
도읍지 개념인 中國의 관점에서 볼 때 변방지역은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못한 산악지대가 많다는 점이다. 산악지대의 생활의 중요수단의 하나는 사냥이다. 사냥은 말을 잘 다루어야 할 뿐만 아니라 활 솜씨 또한 좋아야 한다. ‘夷’는 글자 자체가 大와 弓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활을 잘 다룬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千字文 大觀』 ‘제15장 서설’ 참조]. 따라서 변방족 가운데 활을 잘 쏘는 族屬(족속)에게 夷를 붙였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기마민족으로 용맹하고 날래다는 점은 문헌뿐만이 아니라 舞踊塚(무용총, 아래 그림 참조) 고분벽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용총 벽화를 보면 가운데 맨 위의 사냥꾼은 白馬를 타고 달리면서 몸을 휙 뒤로 돌려 사슴의 왼쪽 허구리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다. 최고의 사냥법이다. 그뿐인가? 맨 왼쪽의 사냥꾼은 지난 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활은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고구려인의 騎馬(기마)와 활 솜씨가 매우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東明聖王은 활을 잘 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朱蒙주몽, 姓은 高)이다.
三國史記 髙句麗本紀 第一 東明聖王편에 “나이가 갓 일곱 살일 때, 영리한데다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이를 朱蒙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하였다(年甫七歳에 嶷然異常하여 自作弓矢射之한대 百發百中이라 扶餘俗語에 善射爲朱蒙이라 故로 以名云하니라)”했다.
甫(보) 크다, 겨우, 갓 嶷(억) 숙성하다, 어린아이가 영리하다
高句麗 舞踊塚(무용총) 狩獵圖. 所在는 中國 吉林省 集安縣 通溝
후대로 내려와 李成桂(이성계)를 도와 朝鮮 建國에 기여한 여진족의 왕자 퉁드란〔李之蘭〕이 여인네가 이고 가는 물동이에 활을 쏘아 활이 물동이를 깨지 않고 뚫고 지나자, 李成桂가 바로 활시위를 날려 그 구멍을 막아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어디 이뿐이랴? 활 잘 쏘는 민족으로서의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 양궁대회에서 매번 금메달을 차지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漢字에는 활과 화살인 弓矢와 관련된 글자들이 많은데 이는 고대문화에서 弓矢가 그만큼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弓矢와 관련된 글자들을 천자문에 나오는 글자를 우선으로 하여 자주 쓰이는 몇몇 글자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도 이미 공부했지만 弓矢는 글자 속에서 단순히 사냥도구가 아닌 여러 모습과 이치를 담아 널리 썼음을 알 수 있다. 弓矢가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쓰이지는 않지만 그 문화와 철학의 바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張(베풀 장, ‘16. 張’ 字解 참조), 弔(조문할 조, ‘97. 弔’ 字解 참조), 發(쏠 발, ‘102. 發’ 字解 참조), 知(알 지, ‘169. 知’ 字解 참조), 短(짧을 단, ‘180. 短’ 字解 참조), 弗(아닐 불, ‘375, 弗’ 字解 및 그림 참조), 弱(약할 약, ‘550. 弱’ 字解 및 그림 참조), 躬(몸 궁, ‘706. 躬’ 字解 참조), 矯(들 교, ‘857. 矯’ 字解 참조), 射(쏠 사, ‘914. 射’ 字解 참조), 矢(화살 시, ‘946. 矢’ 字解 참조), 矩(곱자 구, ‘969. 矩’ 字解 참조) 弘(클 홍) 强(강할 강) 弛(늦출 이) 疆(지경 강) 彊(굳셀 강) 弼(도울 필) 등이다.
위의 글자 가운데 弓矢가 직접 들어가지는 않지만 목표물을 맞히기 위한 활 쏘는 자세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글자가 射(쏠 사, 맞힐 석)이다. 몸을 잘 살펴 행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射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오 反求諸其身이니라(활쏘기는 군자와 같음이 있으니, 저 정곡을 잃고 돌이켜 그 몸에서 구하느니라. 中庸)”했고,
周易 繫辭下傳 제5장에서 “易曰公用射隼于高墉之上하여 獲之니 无不利라하니 子曰隼者는 禽也요 弓矢者는 器也요 射之者는 人也니 君子 藏器於身하여 待時而動이면 何不利之有리오 動而不括이라 是以出而有獲하나니 語成器而動者也라
(주역 雷水解䷧卦 上六爻에 가로대, 공이 높은 담장 위에 있는 새매를 쏘아서 잡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하니, 자왈, 새매는 날짐승이고, 활과 화살은 그릇이고, 쏘아 맞춤은 사람이니, 군자가 몸에 그릇을 감춰 때를 기다려 움직이면 무슨 이롭지 아니함이 있으리오. 움직임에 막히지 않는지라. 이로써 나가서 얻음이 있으니 그릇을 이뤄 움직이는 것을 말함이라.)”했다.
東夷族의 후손인 東北艮方의 나라, 朝鮮
공자는 周易 說卦傳에서 “艮은 東北之卦也니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일새 故로 曰成言乎艮이라(간☶은 동북의 괘이니, 만물이 마침을 이루는 바이고, 시작을 이루는 바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간방에서 이룬다고 함이라.)”했고, 또다시 “終萬物始萬物者 莫盛乎艮하니라(만물을 마치고 만물을 시작하는 것은 간방보다 성함이 없느니라.)”했다.
앞의 여러 補論(보론)과 附錄(부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를 東北艮方이라고 하는 까닭은 周나라가 서고, 洛邑(洛陽, 오늘날의 西安)을 地中(땅의 가운데)으로 삼아 모든 방향을 정비하고 이것이 周易에 녹아들어가면서 이를 근거로 황하문명권의 때와 방향이 정립된 것이다. 곧 後天八卦上으로 아침을 뜻하는 正東方인 木을 기준으로 할 때, 東北方인 ‘艮’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을 지칭한다. 어두운 밤을 뜻하는 정북방인 水에서 정동방인 木의 아침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終萬物 始萬物’에는 전날이 끝나고 온전히 밝은 새날이 시작되는 의미가 담겨 있다. 日(날 일)에 氏(뿌리 씨)로 된 ‘艮’은 ‘해의 뿌리’이자 ‘뿌리 根’의 뜻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해 뜨는 나라’라고 한 것은 바로 이 ‘艮方’의 의미이자 지리적으로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의 땅이기 때문이다.
中國 吉林省 集安縣 소재 高句麗 五恢墳(오회분) 4호묘 벽화 .男神이 들고 있는 해에는 三足烏가 여신이 들고 있는 달에는 개구리가 그려져 있다. 출저 http://www.koreahiti.com
한편 ‘成言乎艮’을 일반적으로는 言을 어조사로 보고 ‘간방에서 이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言을 목적어로 본다면 ‘간방에서 말을 이루다.’는 뜻이다. ‘成言’은 곧 ‘정성 誠’이다. 中庸에 “唯天下至誠이어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그 성품을 다할지니, 능히 그 성품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할 것이오,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할 것이오,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하면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울 것이오, 가히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가히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느니라.)”했다.
이러한 至誠이 민간에서는 致誠으로 전해져 東夷族의 柔順함과 信實함을 이루기도 했다. 또한 ‘成言乎艮’은 ‘말을 이룬 곳’ 곧 ‘글자를 만든 곳이 艮方이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글자의 始原인 易의 괘를 만든 伏羲氏(복희씨)와 堯(요)임금의 뒤를 이어 제도의 完備를 이룬 舜임금과 甲骨文을 만들어 쓴 殷나라의 湯임금 모두 東夷族이자 천하의 至誠인 聖人으로,
바로 天地의 化育을 도우신 분들이다. 어디 이뿐이랴?
주역의 음양오행 이치를 토대로 體가 되는 뜻글자인 한자에 맞춰 用이 되는 소리글자인 訓民正音을 創製하신 분이 바로 世宗大王이다[千字文 上권 ‘부록2’ 참조]. 뜻글자와 소리글자의 완벽한 조합을 이뤄낸 것이다.
(사진 설명 : 태양의 상징인 三足烏와 12달의 상징인 구슬, 평양 진파리 7호 무덤 출토의 고구려 금동장식.)
이밖에도 우리에게는 음양오행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檀君(단군)이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 윷의 원리[ 『千字文 大觀』 1권 ‘14. 宿’ 字解 중 윷놀이 그림 참조]와 일주일을 표시하는 ‘日月火水木金土’의 명칭은 물론이요, 음식문화에도 전해지고 있다. 음양오행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뿌리 깊은 전통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說話 속에 담긴 곰과 東夷族
설문해자에서 “能은 熊(곰 웅) 붙이니, 발은 사슴을 닮았다. 능수는 뼈대가 튼튼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賢能하면서 굳세고 씩씩한 이를 能傑능걸하다고 칭한다(能은 熊屬이며 足似鹿이니라 能獸는 堅中故로 稱이라 賢能而彊壯者稱能傑也니라).”고 했다.
곰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熊女(웅녀)가 마늘 스무 쪽과 쑥 한줌으로 스무하루(21)를 견뎌 사람이 되어 마침내 桓雄(환웅)과 결혼하여 檀君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동이족의 하나인 扶餘족이 南으로 내려와 정착한 百濟의 公州 땅에 고마나루(곰나루)가 있는데 여기에도 인간과 결혼하여 새끼까지 낳았던 熊女의 전설이 있다. 곰나루의 웅녀는 인간인 남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슬피 울다가 두 새끼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반면 백두산 아래의 熊女(웅녀)는 한민족의 수호신인 삼신할미가 된 듯하다. 그 熊女의 정성이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삼신할미에게 드리는 치성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출산 후 3・7일(21일)동안 몸조리를 해야 한다는 우리의 출산문화 역시 웅녀로부터 비롯되었다. 백두산 熊女의 기질은 동이족이 세운 殷나라의 ‘賢能’하고 ‘能傑’한 기질로 이어진 듯하며, 동시에 한민족의 성품인 精誠과 慇懃(은근, 殷勤)과 끈기로 이어진 듯하다.
우리 문화의 源流가 서구자본주의의 波濤(파도) 속에 침식당하면서 물질만능주의 속에 正道를 외면시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東夷文化와 黃河文明의 부활을 기대한다. 출처 : 『家苑 千字文 大觀』 하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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