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37-52절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장 2절에 의하면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다고 기록하고 있고, 10절에서는 명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이때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다 14절에 보면 명절 중간쯤 되었을 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논쟁을 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를 드러내시면서 저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물론 지난주 살핀 내용 속에서는 다수가 그의 표적을 보면서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믿음으로 인해, 그리고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 이런 저런 말로 수군거리게 됨으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아랫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잡을 것을 명하게 되는데, 결과는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시면 ‘명절 끝날’이 되었을 때 다시금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방금도 말했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명절 끝 날이 되어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가르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잠언 16장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의 마음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성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할 때 그들로부터 나오는 악한 마음과 계획이 실행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입을 막기 위해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잡기 위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특히 마태복음 10장 28절은 왜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사람이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악행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해서 사람이 우리 영혼을 지옥으로 던져 넣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누구만이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만이 영원한 우리의 거처를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 가르치셨다고 할 때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가면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지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도록 하는 물을 주겠으니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단지 육신의 갈증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에 있는 자들, 그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영적 목마름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만 채울 수 있는 것을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영원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로 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원에 대한 사모함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것을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가 채울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영적 목마름을 채우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에 속아 거기서 안식할 뿐 참된 안식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가 그러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마9:35). 그리고 난 뒤 어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왜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통해 영적 목마름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저들을 보면서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저들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은 이사야 55장 1절 말씀의 성취와도 같은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러니까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할 때, 그리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할 때 그 성격은 돈 없는 자도 오라고 말씀하시는 성격이고,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성격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거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자신이 목마른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목마르다고 인식하는 사람, 그 만이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고, 그 만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스스로 영적 목마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서를 통해 하신 말씀을 헛되이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목마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 단지 적대적인 감정으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38절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내게로 오라는 것은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을 때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생수의 강은 마르지 않기 때문에 결코 목마를 수가 없습니다. 이어 39절 상반부에서는 생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되는데, 생수의 강이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으로 가시면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때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여기서 ‘물과 성령’에 대한 해석으로 가톨릭은 물을 세례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세례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교리를 내놓기도 하는데, 개혁자들의 해석은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물과 성령이라고 할 때 ‘물 곧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물로 표현하는가? 물을 통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인데, 간단히 말하면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 없이는 거듭날 수 없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수의 강이란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데, 생수의 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는 성령의 어떤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생수의 강이라고 표현하는가? 다시 39절을 보시면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서 괄호 부분을 주의해서 봐야 하는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가 아직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의 완성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죽으십니다(요19:30). 그의 죽으심 이후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데, 그의 성육신부터 죽으심까지가 낮아지신 신분과 관련된 것이라면 부활 이후는 높아지신 신분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그에게 주어진 직무를 아직 다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그들, 즉 믿는 자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것은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주라 시인한다면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39절 괄호 부분은 어떤 의미인가? 믿는 자들에게는 분명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6-20) 그리고 조금 넘어가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 안에는 이미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데도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 승천 하고 난 뒤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해야지만 너희에게 맡긴 증인의 사역을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지만 또 다른 성령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한해서 특별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같은, 그러나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에게만 단회적으로 있는 그런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말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너희에게 맡긴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맡긴 사역은 철저히 성령으로 행하는 사역이고, 성령의 주도 아래에서만 행할 수 있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주체는 사도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성령을 생수의 강으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거듭남의 의미만이 아니라 거듭나서 주의 종으로 주의 증인이 되는 모든 일이 성령을 힘입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게로 온다는 것은 나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이지만, 거듭나는 것만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나를 믿을 때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의 강, 즉 성령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심으로 너의 모든 걸음 가운데 메마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그런 역사가 일반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너의 인생 가운데 메마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1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에스겔 47장 1절 이하 12절에서는 성전 문지방 밑의 물이 나와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는 말씀도 있는데, 그 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심히 많아지게 됩니다. 강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로 쓰이게 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 그를 믿는 자에게 이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끝날, 예수님께서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내게로 오라. 나를 믿으라. 그래야지만 생수의 강, 다시 말해 성령이 너희 속에서부터 계속해서 역사하여 너희로 하여금 결코 메마르지 않는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나를 믿는 자에게는 신령한 것에 있어서 결코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코 고갈되지도 않고 흐름이 중단되지도 않는 생수의 강이 너희 속에서부터 흘러나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의 풍요함과 영속적인 면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반드시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믿는 즉시 결코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며 결국 마지막에 가서여 완성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각자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 성령의 은사를 완전히 충만하게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에 성장하는 만큼,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성령의 축복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우리의 믿음이 역량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경고해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은사는 물방울처럼 우리에게 떨어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모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를 포용할 수 있다면, 이 물은 강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현재 믿음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믿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기도하라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그럼 하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과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9장이 증거 하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9:11-13) 즉 하나님 편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거듭난 자로 하여금 더욱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한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신의 성품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갈5:22-23, 벧후1:4).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성령에 대한 이해를 어떤 신비적인 것으로, 기적과 이적과 관련된 것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성령은 ‘보혜사’입니다(요14:16). 또한 ‘진리의 영’입니다(요14:17).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요14:26). 보혜사, 보살피며 은혜를 베푸신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가? 진리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도 이런 내용으로 구해야지, 어떤 신비적인 일들이 있도록 성령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에 대하여 다시금 상반된 반응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그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음을 말씀하는데, 40절 이하 44절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우선 그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지자’란 모세가 신명기 18장에서 언급한 자를 의미하는데,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8절에서는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선지자에 대한 인식이 유대인들에게 있었는데, 지금 예수를 그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가? 지난주에 봤던 부류들, 31절에서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라고 말할 때 그런 믿음이 저들에게 있는가?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에 동일한 고백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4-15) 모세를 통해 예언한 선지자란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에 대한 시각을 전혀 벗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선지자’라 하면서도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더란 겁니다. 본문에서 말한 자도 이런 부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예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굉장히 멀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심각성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에 앞서 사도들의 물음을 통해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회복,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회복이 지금이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3년 동안 가르침 받고 난 뒤 좀 더 집중적으로 40일 동안 사도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벗겨내지 못하고 있었는가?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사상을 벗겨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저들이 언제 바뀝니까? 성령의 임하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바뀌게 되더란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성경에 이른 말씀을 언급하는데,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가문으로부터 나오리라는 것(시132:11)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미5:2)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윗의 가문이라는 것, 혹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이었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태어나 거기서 쭉 사셨던 것으로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7장 24절에 근거하자면 외모로 판단하고 있을 뿐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공의롭게 판단하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물어봐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나사렛 출신인데, 태어난 곳이 나사렛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태어났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모든 것인 양 그것으로 섣불리 판단할 뿐입니다. 이런 저들의 자세에 대하여 칼빈은 사소한 일에는 열심을 내려고 하면서도 천국 비밀을 아는 일에 있어서는 안일함으로 방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서는 열심을 내지만,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는 더디며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무리 중에 쟁론이 될 때 그 중에 그를 잡고자 하는 자도 있었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를 잡고자 하는 자는 요한복음 7장 32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잡기 위해서 갔지만 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잠16:1).
그러나 이런 지식에 있어서도 무지한 자들은 아랫사람들이 왔을 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따집니다. 45절을 보시면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위에 있는 자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위에 있다는 것은 권세 혹은 권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에게 이런 저런 명령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령한다고 해서 다 행해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수도 있는가 하면, 좀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지 만 명령한 바가 실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한다고 해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계획할지라도 계획한 바가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이런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장사를 한다는 것은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익을 위해서라고 해서 항상 이익만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뜻이 있으면 이익을 보지만 주의 뜻이 있지 않으면 이익이 아니라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자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허탄한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고 묻는 저들에게 아랫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46절을 보시면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있지만, 지금 아랫사람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마7:29). 물론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다는 것을 느꼈다고 해서 참된 믿음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함이 있어야 하고 말씀에 대한 정당한 경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에 따른 성령의 풍성하신 은혜의 역사하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권위가 있는 말씀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로 잡으려고 갔지만 잡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47절에서 49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묻는 것은 너희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제정신이라면 어떻게 종교지도자들인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 다시 말해 권세를 가진 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다 권세자들,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스림 받고 가르침 받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 무지한 자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의 가르침은 미혹하는 가르침이지 믿음의 합당한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길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로부터 가르침 받아 따르는 자들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율법을 아는 자들이고, 우리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저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주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지금 저들이 말하고 있는 반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미혹하는 자가 아니라 저들이 미혹하는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율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자와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참된 복은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 당시 다스리는 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향하여 저주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실상은 그들이 말하는 저주를 그들이 받게 될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복음 3장에 언급된 니고데모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50절과 51절을 보시면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장으로 가면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는 자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모습까지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율법은 어떤 사람에게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아울러 그 사람의 행한 것에 대하여 증인들의 말을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도 정죄하고 심판을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52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같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요3:1) 어디 출신인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입장에서 적대적인 입장의 사람을 두둔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온 적이 있더냐?”고 되묻습니다. 자신들의 입장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명함을 따라 보자면 니고데모의 말이 정당한데, 정당한 말조차 거부할 정도로 거짓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진리에 대한 확신일 뿐입니다. 그런 거짓 진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통하는가?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숨겨진 것처럼 있지만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드러나 무엇이 참된 것인지, 또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자들만이 복을 받는가? 오늘 본문 37절 이하 39절의 말씀을 받는 대상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삶이 그의 열매로 풍성한 자들만이 가장 복된 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