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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수필 5단계 기술론
권 대 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 교수
1. 열며
본격수필 창작에는 5단계 원리가 있다. 이는 수필창작 과정이 경험과 관찰을 통하고, 거기에서 삶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에 그쳐서는 문학성 있는 수필을 창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단계를 거치면서 미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단계적 원리는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내적 요건에 해당한다. 본격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자질로서 다섯 가지 개념이 단계적으로 결속성을 가져야 한다. 루이스란 비평가는 문학 창작의 과정을 (1) 씨앗을 얻는 단계, (2) 씨앗의 성장과 발전의 단계, (3) 구체적 표현을 찾는 단계로 나누었는데, 본격수필의 창작 과정은 두 가지 과정이 더 첨가되어 다섯 과정으로 나뉜다.
필자가 졸저 <수필문예창작론>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 수필 창작의 5단계 원리가 수필기술론의 정답일 수는 없다. 수필을 쓰는 사람마다 수필 창작 과정이나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며 천인천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각양각색의 수법이 대부분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란 전통적 수필론의 변형 또는 모방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문학이 갖추어야 할 외적 조건과 수필의 내적 요건들이 구조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야 본격 수필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수필창작의 5단계 결속원리를 정리해 보았다. 수필이 발상에서부터 창작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룰이 존재함을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이 다섯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이다. (1) 발견의 원리 (2) 상관화의 원리 (3) 동화의 원리 (4) 성찰의 원리 (5) 결속성의 원리다.
2. 펼치며
가. 발견의 원리
수필의 씨앗을 얻는 과정은 수필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고, 수필가가 수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의 질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을 보는 것’ (seeing that)이고, 다른 하나는 ‘~으로 보는 것’ (seeing as)다. 본격수필가는 사물을 볼 때 항상 후자의 눈을 견지한다. 이름하여 ‘발견의 원리’다.
수필을 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험을 ‘쓴다’ (to write)는 것이 아니라 경험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to discover)는 의미다. 수필창작은 경험 속에서 문제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따라서 수필 창작에 있어서는 글감을 얻는 정도, 경험의 기록은 ‘발견’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일부 문학론자들은 이해하기 쉽도록 ‘관찰’이란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인식이란 개념은 이해되기 어렵고, 그 의미 또한 다양해서 다른 의미로 오용할 수가 있기에 쉬운 말로 ‘관찰’이라고 해도 좋겠다. 관찰이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이란 용어로 수필의 출발점을 설명하기엔 용어 자체가 너무 평범한 게 흠이다. 오히려 ‘인식’이 더욱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고 의미도 분명하다. 인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신발견’으로서, 모르고 있다가 새로운 진리나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개념’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이나 관념을 재해석하는 행위다. 전자가 의미 발견이라면, 후자는 의미 부여다. 적어도 수필을 쓴다는 것은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여야 한다.
수필가는 일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경험에서 수필 창작의 작업이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을 원고지에 수필 형식으로 옮겨 놓는다고 그것이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경험 자체가 그대로 옮겨져서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 사건이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재료가 어디 있겠는가. 경험의 내용이 문학이 되려면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 육화해야 한다. 육화된 경험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체험이다. 문학의 재료가 되고 안 되고는 ‘발견’에 달려 있다. 아무리 엄청난 진실이 숨어 있는 일이라도 자신이 모르고 지나면 하찮게 되고,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거기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면 소중한 것이 되는 법이다. 따라서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거나 하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발견했느냐에 따라 경험의 가치가 달라진다. 이렇게 경험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인식이다.
문학을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고 했을 때, 발견의 원리는 ‘인식’의 차원에 근접한다. 일차적으로 수필가가 무엇을 발견했느냐에 따라 수필의 성패가 결정된다. 본격수필의 창작에 있어서는 발견된 것을 제시하면서도 독자가 그것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학의 언어가 목적하는 것은 전달의 차단이고, 차단된 언어가 요구하는 것은 감동이기 때문이다. 감동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문학에서 감동이란 연상과 상상이란 요로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수필가는 자신이 발견한 글감으로 바로 수필을 써서는 안 된다. 그것과 가장 유사하되 참신한 다른 재료로 글감을 다시 봐서 미적 정서가 생겨나도록 변형하고 보수해야 하는 것이다.
수필 한 편을 통해서 ‘발견’의 원리를 살펴보자. 최시병은 <진열장 속의 왕세자>란 작품을 썼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이 사진관, 저 사진관에 진열된 아이들의 돌 사진 속에서 임금님의 용포를 입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여기서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어떤 것을 알아내었다. 용포를 입고 있는 돌 사진에는 우리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심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최시병은 어떻게 이 수필의 씨앗을 얻었을까? 그는 관심을 가지고 집요하게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렇듯 수필의 씨앗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체험한 데서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격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좀더 의도적이며 집중적인 태도로 씨앗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창작할 수 있는 글이다.
아무리 특별하고 큰 경험이라도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수필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사소한 것에서도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면 그 자체가 훌륭한 문학적 사건 즉 체험으로 승화한다. 송명화의 <고도>라는 작품은 발견의 원리가 돋보이는 수필이다. 그녀는 단 한 줄짜리 대학생이 굶어 죽은 사건에 관한 신문기사를 놓치지 않고 거기에서 작품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된다. 작품 속의 인물인 대학생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다. 아무에게도 요청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눈물만 흘린다. 이런 상상의 결과로 방 안은 작가에게 물이 흥건한 바다가 되고 죽어버린 시신은 움직일 수 없는 섬으로 현시된다. 그녀가 ‘고도’를 통해서 이웃과 단절된 현대 사회의 모순과 비정함을 잘 형상화한 배경에는 ‘발견하기’의 원리가 착상의 과정에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일을 경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발견하느냐가 창작의 출발선이 된다는 것이다.
늘 강조하지만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다. ‘인식’을 잘 하는 방법은 경험이 생길 때 일어난 일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끝까지’ 보았다가 나중에 당시 느꼈던 실감을 미적 정서로 표현해야 한다. 뉴턴이 일상의 관찰에서 중요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작은 일에 문제의식을 부여하여 거기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수필의 씨앗이 툭 튀어나오면 바로 적어놓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수필가는 그 즉시 실감을 일상의 언어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느꼈던 것을 변형시키고 보수해서 연상과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즉시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지만 본격수필은 실감으로부터 유리된 정서로 쓰여 지지 않으면 좋은 글이 안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메모해 놓는 것이다.
‘발견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발견이 단순한 의미를 알아내거나 남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아닌 자기만의 참신한 발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견의 첫 단계가 관찰인데, 관찰을 잘 하려면 무엇에 관심을 두는 게 중요하다. 무엇이나 문제의식을 갖고 세밀하게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가짐과 동시에 그것 자체로 보지만(seeing that) 말고 본 것을 ‘~으로 보는 법’(seeing as)을 익혀야 할 것이다. 수필의 출발점이 인식에 있다는 차원에서 보면, 수필 창작에서 ‘발견하기’는 옷의 첫 단추에 비유될 수 있겠다. 지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늘 보는 것일지라도 애정을 갖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애정 부여가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면 이것이 글감이 되고, 여기서 수필가가 글감을 제재화하면 본격수필의 씨앗이 싹트게 된다. 발견의 원리가 수필 쓰기의 스타트인 만큼 수필가가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깨고 사물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수필은 수필가의 가슴 속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나. 상관화의 원리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본격수필의 생명이다. 수필은 자기 응시와 표현의 성향이 강한 문학이다 보니 시나 소설에 비해 근원적으로 창작 과정에 난점이 많다. 그래서 예술적 형상화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언어를 매체로 구체적인 체험 행위를 문학적 행위로 변용할 수 있어야만 독자를 감동이라는 고지로 안내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쓰는 수필창작 기술론에서는 선택된 소재에 대해 독자적인 형식을 부여하여 미적인 구조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론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수필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의 편협된 주관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하는 보편적인 문학적 가치에까지 고민을 끌어가야 된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나열이나 기록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적 형상화로 승화된 글이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형식이 자유롭다고 백인백색의 수필이론이 난무해서는 안 된다. 창작 방법론이 무한하다는 것은 수필론의 강점일 수 없다. 그것은 수필의 외연을 확대할지는 모르나 수필을 고급문학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학의 서자 취급을 당하는 데서 벗어나려면 하루 빨리 창작이론을 객관화해야 할 것이다. 다시 쓰는 본격수필 기술론 두 번째 원고는 독자의 상상력이 추상적 개념을 극대화하여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한 작품의 숙성 과정에 있어서 수필가가 취해야 할 인식과 관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수필은 언어로써 일상적인 체험 활동을 보여준다. 사실을 토대로 하다 보니 의도적인 의사가 지나치게 반영되어 저급한 속성이 드러나기 쉽다. 수필의 생명은 감동이다. 진솔한 감정의 효과적 표현만이 독자를 관조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여 감동으로 이끌 수 있는 법이다. 본 것을 실감의 유리 없이 그대로 널어놓으면 독자에게 미적 정서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상과 상상으로 미의식에 접근하려는 독자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독자의 상상력과 연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은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토대로 한 구체적인 현상과 사상의 형상화다. 연상과 상상은 다양하고 광범위한 활동의 자유와 변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내용을 미적으로 음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공감에 박차를 가하게 해서 추상적 개념일 수밖에 없는 주제의식을 이미지화 하는 데 기여한다.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적 수필가가 나타내려는 주제의식과 대상 사이에 얼마나 참신한 유사성이 있느냐를 말한다. 한마디로 제재는 주제가 요구하는 적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추 능력과 관련이 있는데,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데 관련된 재료와 유사한 재료를 선택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미루어 헤아리게 하는 것이다. 주제의식을 유사성에 근거한 재료를 통해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내면 작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보고 느낀 그대로의 이야기가 수필가의 렌즈를 통하여 투시되고 각색되고 문학적으로 변용될 때, 일상의 단순한 기록이 아닌 문학으로의 승화가 가능한 것이다.
이 과정은 부단히 인식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중국의 시법에 ‘이단불심’이란 게 있다. 제재와 주제의식의 관계를 연상 관계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 좋은 글을 쓰는 데 삼다를 주장했던 구양수는 다독, 다작보다 다상량을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다상량은 생각을 깊고 풍부하게 많이 하라. 즉 사유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젊은 학생들이 구양수에게 묻기를 나랏일에 그렇게 바쁜데 무슨 틈을 타서 그렇게 훌륭한 글을 줄줄 써느냐 하니, “나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의 시간은 전부 억지로 짜낸 시간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어 “어떻게 시간을 짜내는가”하고 묻는 학생들에게 아주 솔직히 대답하였다. 첫째는 말을 탈 때, 둘째는 잠 잘 때, 셋째는 화장실에서 일 볼 때 시간을 짜낸다는 것입니다. 이른 바 삼상三上이다.
그는 자기 업무외의 시간은 모두 체험과 사물을 연관지우는 데 썼다. 수필을 쓰는 데 따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이나 책상 앞에 백지를 펴놓고 시험 보는 듯하는 것은 오히려 생각을 막는 일이다. 정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필을 생각해야 한다. 필자도 어딜 가나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던, 손가락질을 하던 일일이 메모하곤 한다. 자다가도 발상이 떠오르면 얼른 일어나서 단 한 줄의 아이디어라도 적어놓고 잠을 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그 아이디어의 연상 작용으로 수필평론을 쓰곤 하였다.
평론에는 관점이 중요하다. 제목이 대충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엉터리 수필을 ‘벼’와 같은 ‘피’로 의미화하기도 하고, 명수필과 맹수필을 대비시킨다든지, 누구나의 문학에 누군가의 문학으로 대비시킨다든지 하는 건 꾸준한 사물의 연상 작용의 결과다. 이런 상관적 사고는 무수한 체험들과 상상력이 가장 큰 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이다. 조태일은 "과거의 체험들이나 또는 앞으로 겪게 될 체험들이 적당한 햇빛과 물, 바람이 되어 문학의 씨앗들에 싹을 틔우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상상력은 여러 체험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만들게 한다.“ 고 하였다.
여성의 정절과 참빗을 절묘하게 상관화시킨 강숙련의 <참빗>, 정이 필요한 인간 세계를 인큐베이트에 비유한 노현희의 <인큐베이트>, 인간불가지론의 비애와 안타까움을 최후의 순간에도 기록을 남기는 비행기의 ‘블랙박스’에 결부시킨 박영란의 <블랙박스>, 딸의 부모 걱정이 큰 힘이 되는데 착안하여 그것을 ‘부적’으로 연결시킨 정성화의 <부적>, 자신의 것이긴 하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비애를 소금쟁이에 비유시킨 정성화의 <소금쟁이>와 장인정신의 가치와 긍정적 측면을 야인정신과 매치시킨 송명화의 <야인시대>는 주제의식과 대상 그리고 제재가 절묘하게 상관화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일상적인 소재라도 그것이 제재로 변용되지 않으면 본격수필로 태어나지 않는다. 수필이 본격수필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대상을 유사한 다른 매체와 상관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수필이 탄생되어야 한다. 수필가에게는 주제를 상징하는 매개로서 소재를 변용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필요한 것이 작가만의 렌즈다. 사물을 참신한 눈으로 봄이 중요하다.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주관과 객관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소재에 대한 해체작업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변용을 거치지 않고는 창작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감동은 상상과 연상으로 창출되기 때문이다.
다. 동화의 원리
문학 장르론적으로 보면, 수필은 ‘교술’에 속한다. 교술 문학이란 조동일의 문학 장르 분류법에 의해 나누는 문학의 4대 장르 중 하나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서술하거나 전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 장르다. 흔히 그 특징을 '자아의 세계화'라고 설명할 수 있다. 수필이 가장 대표적이다. '敎述'에서 '敎'는 알려주며 주장한다는 뜻이고, '述'은 어떤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아는 문학작품에서 인식과 행동의 주체를 가리키고, 세계는 그 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술이란 작품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건을 작품에 나타내며, 교훈적·이념적인 성격이 강하다.
달리 말하면, 교술 장르는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를 추구한다. 즉 화자는 현실의 작자이며 청자도 현실의 인간이다. 이러한 비허구적이고 토의적 성격은 청자 지향의 교술적 태도인데 교술 장르는 청자를 반드시 전제로 한다. 수필 창작에서 ‘동화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필가가 대상을 교술적 태도로만 볼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수필도 문학성을 확보하려면 시와 마찬가지로 서정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수필은 ‘자아를 세계화’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자아화’도 추구해야 한다. 수필가는 작품 외적 화자만 조우하는 게 아니라 작품 외적 세계와도 만난다. 이 만남에서 자아와 세계가 동일화되는 것이다. 서정은 모든 문학 작품이 견주어야 할 과녁이다.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고 할 때, 세계에 대한 수필가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수동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세계를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로 변용시키고자 하는 주관적인 반응이다. 이처럼 수필가는 세계와의 만남에서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이는 수필은 장르적 분류에 의해 ‘자아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교술’에 해당하지만, 세계와의 만남에서 ’세계의 자아화‘를 추구하기도 한다는 의미다. 수필가는 때로 역사적 자아로 세계를 객관적으로 응시할 뿐 더러, 때로는 서정적 자아로서 세계를 극히 주관적으로 능동적으로 변용시키기도 한다.
수필가도 제대로 된 작품을 창작하여 문학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학뿐만 아니라 시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학의 근원은 인간의 성정에 있고, 성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감정적 속성이 문학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나, 그러한 자연현상을 맞아서 고무되어진 감정상태를 흥취라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와 직관력 없이는 올바로 포착할 수 없어서, 동화는 학문에서보다는 자연 속에서 얻기가 더 쉽다. 수필은 ‘교술’이라는 장르의 산문에 속하기 때문에 ‘발견’과 ‘상관화’를 이룬 후에 다시 그것과 하나 되기 위한 몰입이 필요하다. ‘바다가 제재라면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닮은 바다의 속성을 살핀다든지 물 속에 들어가 그것이 어떠한 몸짓과 호흡을 가지는지 수필가도 바다의 몸짓과 호흡을 따라 갈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좋은 수필은 수필가와 제재가 하나 되는 ‘물아일체’적 태도가 어느 시점에서 나타나야 한다.
사물이 자아를 촉발하여 감흥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수필가는 본 것에 생명과 인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수필을 ‘정’의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심한 것도 수필가의 애정을 받으면 피가 돌고, 호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을 인간화하고, 사물에 동화하여야만 독자에게 진정성을 심어줄 수가 있다. 나도향이 <그믐달>에서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 문장도 바로 사물과의 동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물과의 동화는 사물에 몰입할 때만 가능하다. 몰입은 대상과 자아의 거리를 무화시키며, 대상을 주관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정교한 관찰은 바로 예리한 감각을 작용시켜서 선명한 회화적 이미지를 창안해 내게 된다. 대상에 대한 수필가의 심도 있는 관찰만이 뛰어난 이미지를 낳을 수 있다.
윤오영의 <까치>란 수필은 지은이가 까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애정을 중심으로, 까치소리의 특징에서 시작하여 자신이 까치에 대해서 각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평범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글이다. 이 수필은 크게 두 개의 내용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기교 없이 가볍고 솔직한 까치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부분은 까치의 특징을 들고 있는데, 물론 그것은 지은이의 까치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어 서술되고 있다. 까치 소리며 까치집에 대한 서술도 같은 맥락이다. 까치집은 엉성하게 얽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비도 새지 않고 소쇄한 맛이 난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른 새들의 집은 '둥지'나 '둥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유독 까치와 제비의 경우엔 '집'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아침 여덟시에 정릉 안 어느 숲속에서 느낀 지은이의 감상을 표현한 부분이다. 사람 없고 고요한 숲속에서 까치들이 자신의 발 밑을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물아일체'의 교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 교감을 야단스럽게 설명하기보다는 민화나 시의 예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바로 그 점에 이 수필이 주는 묘미가 있다. 까치에 대한 사랑도, 까치와의 교감도, 화려한 수사와 장황한 설명이 아니라 그저 부드럽고 평범한 표현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문학은 자연과의 교감을 내용으로 한 경우가 많다. 조선 시대 가사 작품인 정극인의 <상춘곡>, 시조 작품인 윤선도의 <어부사시사>가 그러하다. <상춘곡>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자연에 귀의해 봄을 맞는 감상을 노래한 것으로 '물아일체'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의 관점에서 자연과의 일체감을 노래한 연시조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적용되는 ‘동화적 원리’는 독립적으로 쓰인다기보다 단계적 원리로 적용되는데,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다. 여기에서 자연과의 교감이 서술된 부분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자연 속에서 진정한 멋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 제시된 민화에서처럼 사람의 배 위에 앉아 있는 까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기에 지은이는 은연중 지금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애정 회복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지은이의 안타까움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 이 수필이 보여주는 자연과의 교감은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이켜 보게 한다.
수필적 자아는 세계와 만나면서 서정의 꽃을 피우는 법이다. 그 만남은 아주 특별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동화란 물아일체의 동질화 현상이다. 즉 사물을 바라보는 수필가와 사물 사이의 교감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주체와 대상 사이에 동질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서 상호교호 작용이 전개된다고 하는 상사성의 법칙이다. 물아일체를 노리는 수법은 원래 시적 법칙이다. 그러나 수필이라고 해서 시적 기법이 안 쓰이는 건 아니다. 서사와 서정의 세계를 동시에 다루는 수필문학은 주제를 내면화하고, 인간화하는 데 있어서 세계의 자아화가 필수적이다. 그 만남의 반응이 문학적 접근이요, 언어화되면 문학적 표현이 된다. 수필을 잘 쓰려면 반은 소설가가 되어야 하고, 반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수필 쓰기에서 동화의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수필의 문장에서,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는다”고 한 이양하의 ‘나무’나, “시간을 잘게 채 썰어놓고, 채 한 조각에 자장면을 비벼 넣고, 또 한 조각엔 저녁밥을 짓고, 또 다른 몇 조각에다는 파트타임 일을 하는 이런 숨찬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가오리연이 되고 싶다”는 정성화의 ‘가오리연’ 등의 작품에서 인용된 부분은 사상과 감정이 동화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감정과 사상의 동질화 현상이다. 이처럼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유기체의 반응이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게 할 때, 수필에서 동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서정적 비전은 자아와 세계의 특별한 만남이고, 그것은 곧 자아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적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태도와 논술적 자아가 세계를 만나는 태도는 다르다. 논술적 자아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객관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 결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적 자아는 세계를 극히 주관적으로 반응하며 만난다. 나아가서 세계는 수필가와 영적 교감을 나누는데, 이때 제재적인 재료들이 수필가의 생활 속에 여과되어 사람의 냄새를 풍겨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가의 체취랄까 내면 풍경이 드러나야 한다. 자기 노출의 진솔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수필가는 ‘동화의 원리’를 통해 삶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 내밀하고도 다채로운 정신의 정경을 독자들로 하여금 흠뻑 맛보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라. 성찰의 원리
수필이 과연 밥을 먹여 줄까? 수필이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필자가 수필론을 강의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수필이 우리에게 밥을 먹여 주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사는 데 도움을 준다. 수필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언어활동이자 삶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찰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자기 삶을 조명하게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 바로 ‘성찰의 삶’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마다 수필 창작 과정이나 그 기술 방법이 다르다. 문제는 각인각색의 수법이 모두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란 전통적 수필론을 변형하거나 또는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문제점으로부터 수필이 갖추어야 할 내적 요건들이 단계적으로 결속성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본격 수필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전제를 세울 수 있었고, 이로부터 수필창작의 5단계 결속원리를 이끌어내었다. 제1단계인 ‘발견의 원리’와 2단계 ‘상관화의 원리’, 3단계 ‘동화의 원리’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성찰의 원리’다.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원하며,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이러한 성찰이 문학적 방식으로 변용되어 표현되면 감동과 공명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문학적 표현이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찰’은 경험을 위주로 하는 수필가들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요,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되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를 거쳐 네 번째 단계에서 자기 삶을 주제와 관련하여 되돌아보고, 자신의 체험을 감동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수필을 읽는 독자들의 기대가 작가의 체취와 내면 풍경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구상에서부터 창작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유기적인 프로쎄스가 존재함을 볼 수 있는데, 그 과정 중에서도 전개부 말미쯤에서 다룰 ‘성찰의 원리’는 네 번째 순서에 해당한다. ‘발견’을 거쳐 ‘상관화 작업’을 마치면 ‘동화’의 단계에 접어들고 난 다음 수필가는 자기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 단계는 수필문학의 장르적 특성인 진솔함으로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으로써 수필 창작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수필 쓰기의 본질적 특성이 삶의 성찰적 반영에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므로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게 된다. 삶을 돌아보는 일은 자기 성찰이며, 삶을 내다보는 일은 인간다움의 모색이다. 그러하기에 수필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모색과 성찰을 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기뻐하고, 슬퍼도 하고, 감동하고, 좌절도 하는 등의 삶을 산다. 이러는 사이에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되고,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 삶의 성찰이다. 수필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려진 삶 그 자체는 그것이 비참함이든 화려함이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처럼 삶의 구체적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 수필의 주요한 특성이 된다. 수필가가 형상화하는 모습은 삶 그 자체이면서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성찰에 목적으로 두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수필 작품에 반영된다. 다만 삶의 모든 것이 다 반영되는 것이 아니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만이 수필에 반영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필은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다. 감동을 생명으로 삼고 있는 수필이 작가의 인품과 융화되어 문학성을 가질 때 한 편의 시보다 한 권의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수필만이 갖는 매력이다. 수필은 허구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어느 문학보다 감동의 전달력이 강한 문학이라는 데 이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답은 반성과 뉘우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자세와 태도야말로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행위임을 우리는 잘 안다. 반성은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경험의 가치를 높여준다.
삶을 뒤돌아보는 성찰에는 시간과 거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생활에는 이런 것들이 스며들 틈이 없다. 너무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속도는 능률이고 능률은 경쟁의 미덕이 되는 사회에서 시간을 갖고 성찰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체되고 낙오되는 결과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는 밖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옆 자동차와의 질서를 고려할 겨를이 없다. 오히려 자칫 과속은 사고로 연결되기 일쑤다. 수필은 이처럼 무엇보다 속도에 저항한다. 체코의 저명한 작가 밀란 쿤데라는 '느림'이라는 소설을 냈다. 그는 수필은 속도가 아닌 느림의 산물이며, 느림은 곧 삶을 찬찬히 성찰하는 일임을 밝히고 있다.
삶을 성찰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반성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미, 즉 천천히 맛을 본다는 의미다. 수필가는 삶을 살아가지만 대체 삶이 무엇인지 맛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는 인생을 살면서 그 생을 마치는 순간 당혹과 회한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소화능력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정형화된 틀 속에 자신을 맞추며 힘겨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기도 한다. 자신을 바르게 살피지 못하고 앞만 보고 간다. 수필은 죽음에 이르기 전의 삶을 맛보는 것이다, 아니 나아가 죽음을 넘어선 세계까지도 상상력의 힘으로 그 맛을 보는, 느리게 인생 살기다. 느리게 거닐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 사랑이 보인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이성 간의 사랑은 물론 부모 형제 사이, 친구 사이, 이웃 사이, 신과 피조물 사이의 갖가지 사랑의 모습들이 흥미롭게 눈에 들어온다. 사랑만이 아니다. 사랑은 어느새 증오가 되고, 다시 화해를 이루고 울고 웃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발견된다. 거기에 또 이별이 있고 만남이 있다. 도덕과 이념, 욕망을 둘러싼 인간들의 갈등과 다툼들도 있다. 이것들이 곧 삶의 내용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곧 반성이다. 앞서 말한 모든 문제들은 결국 반성이 없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반성은 사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건이다. 어쩌면 인간은 곧 성찰의 존재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반성의 자세는 인간다움의 본질을 형성하는 그 개념 자체다.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해서, 사유의 능력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 사유가 바로 반성인 것이다. 곧 반성적 성찰이 진정한 의미의 사유이며 수필은 그 반성적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수필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정의하여 보면 첫째, 수필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고 둘째, 수필은 언어로 그 삶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성찰한 내용을 수필로 표현하는 수필 창작 과정은 자기다운 삶, 가치 있는 삶을 위해 필수적이다. 수필은 자기가 겪은 일을 표현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발전의 계기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를 발견한다. 수필은 ‘진실’을 추구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진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반성의 성찰을 글로 쓴다는 것은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다. 수필을 잘 쓴다는 사람들은 창작 과정에서 자기 성찰의 단계를 모두 거쳤으며, 이러한 문학적 방식의 수필 쓰기를 통해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수필가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의 끝에 반성의 시간을 얹어 그것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독자의 공감을 받아내는 것은 수필 창작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찰의 원리는 독자로부터 진실성과 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인 만큼 수필가가 권위나 가식을 깨고 진실에 대한 진정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마. 결속성의 원리
앞선 본격수필 기술론에서 수필의 개념을 작가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 또는 제재 중심의 문학임을 전제하였기 때문에, 수필문은 작가와 독자의 대우적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결속성이란 일정한 길이로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의미 단위로서의 문단을 단순한 문의 연쇄가 아니라 유의적 총체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글도 아닌 수필 작품에서 ‘결속성’이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히 결속성이 있는 문단과 그렇지 못한 문단을 직관적으로 구분은 할 수 있지만 왜 그러한가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속성이란 ‘정도성’에 기초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수필문을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와의 상호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결속성의 개념을 문단의 표면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응집 장치를 기초로 하여 내용적 일관성을 이루게 하는, 즉 문단을 문단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구성 원리일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문맥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기제로서의 어원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결속성의 원리는 독자의 작품 이해 과정에서 ‘단절’을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작품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문학성 문제가 결정적으로 구체성과 보편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결속성의 원리에 의해 보완되는지 살펴보자.
수필 창작의 마지막 관문은 수필의 문학성이다. 이 문학성도 결국은 수필문의 내외적 응집의 여부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수필은 예술의 한 갈래인 까닭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따라서 심미성을 매개로 해서 우리의 정서적 쾌락을 유발한다. 문학성과 관계가 깊은 이 심미성은 감각이 지닌 여러 성질의 한 차원이고, 감각은 구체성 위에서만 성립되는 까닭으로 수필은 일차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사상의 추상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근대 이후 문학의 가치는 한결같이 구체성 위에 부여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우성의 문학이라고 하는 수필의 문학성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이나 사상을 어떻게 구체성으로 구제하느냐 하는 문제에 귀결된다고 하겠다.
수필의 문학성 논의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보편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정보심리학 차원에서 보면, 수필에서 정보는 일차적으로 이야깃거리다. 이러한 잡다한 이야깃거리가 어떻게 문학적 변용을 겪느냐 하는 문제가 문학성의 차원과 결부된다. 다양한 소재들이 문학적으로 구제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개성적이고 일관된 관점 아래 그것들이 내적 통일을 이루어야 하고, 그 통일성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 해석이 온당할 때 우리는 “보편성”을 얻는다.
수필의 ‘무형식적 특성’은 ‘구체성’과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며, 구체성의 결여는 수필의 재미, 즉 쾌락의 결여를 가져오고, 보편성의 결여는 소재의 나열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학성의 결여를 가져와 수필을 잡문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식적인 면에서 통사적으로 ‘응집’이 필요하고, 나아가 내용적으로 문맥의 내적 결속성이 필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결속성의 원리에 의해 그 문학성이 완성된다.
이러한 결속성의 개념도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되는데, 그 하나는 문단을 구성하는 문장들간의 연결관계를 중심으로 한 논의이고, 또 다른 관점은 스키마 이론에 입각해서 결속성을 보는 건데, 이것은 문단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독자 중심의 관점에서 ‘결속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먼저 문단 자체를 중심으로 한 결속성의 원리를 알아보자. 문단은 하나 이상의 문장군으로 된 조직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문장들 사이에 긴밀한 의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바로 이 문장들의 연결 관계를 이루게 해주는 자질이 ‘응집’이다. ‘응집’은 어떤 요소의 해석이 다른 요소의 해석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서 ‘전제하는 것’과 ‘전제되는 것’ 사이의 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락의 전개 원리에 있는 연결성과 관련이 깊다. 쉽게 말하면, 앞에 올 것은 앞에 오고, 뒤에 올 것은 뒤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들이 질서 있게 구성되어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론에서 말하는 ‘관계의 호응’이다. 의미 단위의 자질들이 서로 친화성을 가지고 긴밀하게 호응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인데, 의미 단위 요소가 전후 맥락적 관계를 무시하고 각자로 놀면, 독자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결속성’은 수필 창작과 감상의 완성 원리라 할 수 있다.
1) ㄱ. 아이들에게 줄 과일들을 잘 씻어라. ㄴ. 그것들을 흰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라.
위의 예문 1)의 ㄴ에서의 ‘그것들’의 의미 해석은 ㄱ에서의 ‘과일들’이라는 부분에 기대어서만이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응집 장치들을 통해서 문단은 의미적 연속성을 지닐 수 있게 되고, 이를 기촐 독자는 비로소 문단을 서로 연결된 조직체로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표층 구조에 제시된 낱말들의 통사적 의존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연결 관계를 ‘응집’으로 본다면, 결속성은 의미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적 연결 관계라 할 수 있다. ‘응집’이 무단 표면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명제들간의 관계인데 비해 ‘결속성’은 명제들간의 내내적인 관계로서 발화내적 행위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다.
2) ㄱ. 여보, 전화 왔어요. ㄴ. 나 지금 목욕해요.
위의 대화에서는 문간의 표면적인 응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대화는 의미적인 결속성이 뒷받침됨으로써 충분히 문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확보할 수 있다. 2)의 ㄱ은 문 내에서 ‘전화받으십시오’라는 ‘요청’의 발화내적 의미를 수행하고 있다. 이에 대한 ㄴ의 반응 ‘나 지금 목용해요’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변명’의 발화내적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문간의 발화내적 행위를 기반으로 위의 대화는 충분히 결속성 있는 문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결속성은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정의되기도 한다. 즉 결속성은 문장들 사이의 기저 관계를 지시하고 이론적 구성체로서 각 부분들이 전체적인 글의 주제에 기여할 수 있게 하는 자질들로 볼 수 있겠다. 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상호작용적 특질로서 1) 글의 주제, 2)접속어 등에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문장들 사이의 관계, 3) 문맥이나 주제를 독자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정보 구조 등이 있다.
다음은 독자를 중심으로 한 결속성의 개념을 살펴보겠는데, 이런 입장은 결속성을 문단 자체가 지닌 내재적 특징이라기보다는 문단을 수용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의 문단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문단이 제시하는 지식과 우리 기억에 저장된 세계에 관한 지식의 상호 작용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이상, 문단은 어떠한 경우라도 독자와 분리해서 고려되어서는 안 되며, 문단의 결속성 개념 역시 독자와 문단 사이의 상호 작용의 틀 안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가 문단의 의미와 구조를 이해하는 정도는 상당 부분 독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전 지식과 문단에서 도입되는 내용과 형식에 일치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문단 수용 과정 자체를 정태적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이면서 구성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문단 수용자는 의미의 결속성 있는 표상을 찾아서 선행 지식과 이미 제시되어 이해한 문단으로부터 끊임없이 정보를 시험하고 통합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서 문단을 수용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가는 항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독자의 스키마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문단을 구성해 내도록 해야 한다.
결속성의 여부 기준은 다음 열거하는 요목에 대한 존재나 수용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ㅁ 주제의식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각 단락의 종속주제의 존재 여부
ㅁ 문단의 예시와 일반화, 일반화와 예시 구조 존재 여부
ㅁ 스토리 전개와 전개부 결미 또는 결말부에서의 주제의미화 존재 여부
ㅁ 내용과 주제 사이의 일관성에 대한 독자 수용 여부
결속에는 외적 결속과 내적 결속이 있다. 외적 결속은 작품의 형식적 측면인 응집력을 말한다. 반면 내적 결속은 작품의 내용적 측면인 ‘결속성’을 의미하며, 작품을 유기적 총체이게 하는 것이다. 수필의 구성 요소가 전체의 일부로서 균형을 유지하는 하는 원리를 말한다. 수필가들은 다음의 격률을 따름으로서 불필요한 노력과 방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첫째,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제공하라는 ‘수량의 격률’, 둘째, 타당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질의 격률, 셋째, ‘주어진 주제와 관련된 말만 하라’는 관련성의 격률, 넷째, ‘명쾌하라, 간결하라, 표현의 애매함을 피하라’는 방법의 격률이 그것이다.
결속성의 원리에 따라 주제를 찾아나가고,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고, 내용이나 작가의 정신적 반응에 발전적으로 대응해가도록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으니, 이런 것을 우리는 결속의 ‘단절’라고 한다. 브레이크를 자꾸 밟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면 운전자가 제대로 운전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이해의 ‘브레이크’가 자꾸 걸리면, 결국 독자가 꼭 찾아야 하는 수필의 주제를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독자는 상상과 연상 작용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이란 감동의 순간을 놓치고 만다. ‘결속성’이란 수필의 전개 또는 기술 원리는 ‘응집’의 차원에서 국어정서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바른 글의 전개가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문단의 결속성이 일면적으로 단순히 정의될 수 없는 상당히 복합적이며 역동적인 개념임을 확인하였다. 결속성은 문단 자체가 지닌 특질일 뿐만 아니라 문단의 생산 목적, 제재에 대한 지식 상태 및 추론 능력 등의 다양한 요소에 의존하는 독자의 해석 능력간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속성’에 대한 개념의 일반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속성이란 결국 의사소통의 기제로서, 그리고 작품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주면서, 최종적으로는 주제의 일관성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늘 수필가는 작가 이전에 먼저 문장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 있다. 문장에 대한 이해는 문학의 기초이고, 결속성은 바로 기초 문장론 위에서 세워지는 기둥이라 할 수 있다.
3. 닫으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인 수필을 구상 단계에서부터 전략화하는 과정이고, 5단계는 문단의 부분들을 의미 있게 서로 연결시키는 기제라고 할 수 있는 ‘응집성’과 작가의 의도나 목적, 독자가 지닌 스키마와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 이 양자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문단 자체가 지닌 정보 구조 등 복합적인 자질들이 상호 작용적으로 기능함으로써 문단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기저의 의미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결속성’에 관한 원리라 할 수 있다.
수필의 초보자는 관찰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수필을 쓸 수 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도 일반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급수필인 본격수필은 더 깊은 자기 초월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발견’을 하고 나서 수필가는 발견한 것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한 논리를 찾아나가야 한다. 생각을 통해 경험에서 발견한 것을 자기 삶에 비추어 보고 삶에 도움이 될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바로 사물과 나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나의 관점을 넘어서서 성찰하는 단계로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따라서 수필가들은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할 때, 발상에서부터 상관화, 동화, 성찰의 과정을 차례대로 통해서 주제의식의 구체성을 도모하고, 최종적으로는 글의 문법성과 소통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에서 작품의 전체적 주제를 구현하고, 주제의식의 구체화나 의미화도 결속성의 원리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필가의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해석이 결속성의 원리에 의해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으면, 독자와 공감대를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일관성의 확보는 보편성의 획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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