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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준비
내가 처음 파라과이의 비야리까에 오니 2015년 4월초에 귀국예정인 김숙선생과 8월말에 귀국예정인 김승현선생이 있었다. 특히 김숙선생은 시니어단원으로 명예퇴직을 하여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적기는 하지만 어찌나 세심하게 신경써주어서 여러 가지로 편안하게 생활하였다.
무슨 사소한 일만 있어도 모여서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니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잘 지냈다. 시니어단원에다가 붙임성이 있고 매사 끊고 맺음이 분명하였으며 젊은 단원이 한명만 놀러와도 숟가락 하나만 더 얹는다는 기분으로(김숙선생의 말) 내 집에서 번거롭게 밥하느니 자기 집에 와서 먹으라고 하여 끼니도 많이도 때웠다. 막상 간다고 할 때까지 무덤덤하였는데 가는 날 점심을 같이 먹고 배웅해주는 선생들과 같이 터미널로 가고 나 혼자 집으로 오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다. 매일가는 체육관도 김선생이 살던
집앞으로 가면 김선생이 생각나서 경로를 바꾸어 다니고 있다.
매사가 얼마나 분명한지 내 집에서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고스톱하면서 쌀을 축내었다고 귀국하면서 우찌야마호텔에 신라면 5개를 사서 맡겨 놓았다고 가는 날 전화를 해 주었다.
김선생이 귀국하고 나서는 비야리까에 단원이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든 것도 있지만 자주 모일 기회가 없어 하루하루가 종전보다는 길게 느껴졌다. 약 4달 뒤인 8월말에는 김승현단원이 귀국하는데 주니어 단원인 김승현은 종래 김선생하고는 너무 차이가 난다. 만나기도 어렵고
늙은이를 싫어하는지 무슨 일이 있어 보자고 하면 이 핑계 저 구실을 달기에 이제는 나도 보기 싫다. 그래도 송별회 해 주려고 아르헨티나 면세점에서 거금 30달러나 주고 시바스리갈 한 병을 사고 오비에도에 있는 신선생이랑 같이 나름대로 고기도 굽고 안주를 장만하여 저녁 6시에 전화하니 이제 일어났다는 말을 하길래 오기 싫어 핑계하는 것으로 보여 둘이서 먹어 치웠다.
나는 이런 사람은 인격 형성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그 식언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간단히 적어 두고자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방문하여 학교를 둘러보면서 컴퓨터실이 있는 것을 보고 켜보더니 윈도우가 안 갈려 있어 아무 작업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시간이 나는 대로 와서 갈아 주겠다고 교장이하 여러 선생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과 컴선생이 만날 때 언제 윈도우를 설치해 주느냐고 묻는 통에 곤욕을 치렀고, 한국인의 이미지가 아주 더러워졌다.
둘째는 자기 학교의 학부모 중에서 테레모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12만 과라니를 주면 내가 넣어 달라는 사진과 글을 넣어 테레모를 만들어 준다고 하여 학교 학생들과 찍은 사진과 Te Amo라는 글귀를 준비해서 주니 다음에 받아간다고 하면서 결국은 받아가지 않았으며
셋째는 내가 파라과이 와서 수업을 하려고 보니 스페인어구사가 가장 시급하여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내가 2002년에 경북 감포초등학교로 부임해 가니 교실영어라고 해서 학급수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흐름대로 영어로 번역한 것아 생각나서 경주 건천에 근무하는 양강선생에게 부탁해서 그것을 받아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협력요원으로 차코에서 근무하는 스페인어를 잘 한다고 소문난 박선생이 김숙선생집에 왔길래 염치불구하고 번역을 부탁하였더니 이틀을 잠설쳐 가며 번역한 것을 김숙선생도 보더니 아주 긴요하다면서 스페인어 과외선생인 에스텔라(부교장, 코워카)에게 자문을 받고 미심적어 더 공부를 많아 했다는 김숙선생 집주인에게 까지 자문을 받아 만든 자료를 뒷날 보더니 참 좋다면서 복사하고 돌려준다고 하길래 이것이 원본이고 내게 여분이 없으니 반드시 돌려달라고 당부하였건만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돌려주지 아니 하였으며
넷째는 김숙선생이 4월초에 귀국하는지라 그 지인이 김선생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며 놀러 왔으나 모든 짐을 다 한국으로 보낸 후라 대접할 만한 것이 없다길래 내 집으로 오라고 해서 몇 명이 한 이틀 고스톱를 하면서 먹고 지낸 일이 있다. 김숙선생이 자기친구들 때문에 나의 식량을 축내었다며 아순시온에 가서 신라면 5봉지를 사서 봉지에 넣고 내 이름을 써서 우찌야마호텔에 보관 시켜두었으니 언제 오면 찾아가서 먹으라고 했다. 그냥 두라고 해도 한사코 보관한다고 해서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2주일 정도 뒤에 어떤 단원이 내게 전화를 하여 말하길 김승현단원이 우찌야마호텔에 있던 선생님 라면 가져갔는데 받았느냐고 물었다. 바로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그렇고 바쁜 일이 있어 아직 전화를 못할 수도 있겠지 싶어 1주일 정도 기다려도 전화가 없길래 전화하니 자기가 가져다가 먹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길래 성질 같아서는 욕을 하고 몇 배를 변상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성질을 죽이고 형편되는 대로 갚으라고 하니 자기가 귀국할 때 남는 쌀이나 다른 것으로 갚겠다고 했는데 정작 귀국할 때는 오후 1시 차 타면서 오전 12경에 수업하고 있는데 전화하면서 라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11월 6일 귀국을 앞두니 2달 전부터 바쁘다.
코이카 사무소에서 내라는 게 많다.
4차 반기 활동보고서, 진로희망조사서, 인수인계서, 잘 되지도 않는 SOS안전교육 수료증까지 많기도 하다. 그러나 후에 분기마다 내던 안전교육수료증을 반기 한번으로 개선이 되어 그나마 짐을 좀 덜었다.
추석이 9월 27일이니 추석격려품 수령하러 가면서 귀로여행에 관하여 동양여행사의 노부장과 협의를 하고 10월 1일 안전교육시 대금을 지급해야겠다. 안전교육시에 내 후임으로 오는 김미정선생과 김숙선생후임도 참가한다 하니 인계인수서에 못 다한 이야기는 하기로 하고...
코이카 파라과이 사무소에서 우리 86기 단원들 (기한 연장 등은 제외)에게는 귀국준비금 500불, 화물탁송료 1,400불(실비), 항공임 1,950불(귀로여행단원에 한함)주어 짐도 EMS 등으로 부치고 귀로여행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나는 그동안 귀국선물로 멕시코 깐꾼에서 몇 개의 선물을 사고 페루와 볼리비아 여행할 때에 몇 점, 그리고 국내 모 방송국의 <걸어서 세계속으로> 프로에서도 소개된 아오 뽀이를 몇 점 사야 되는데 아직 준비를 못했다. 9월 27일(일) 어제 추석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가려고 했으나 종일 비가 와서 28일(월, 보케론 전승기념일이 29일인데 기념일을 하루 앞 당겨서 28일로 하여 연휴로 함) 과이라주의 비야리까부근에 있는 곳에서 아오 뽀이(Ao/ropa는 옷, Poi/fina는 가는, 엷은, 좋은의 뜻임)를 사러 가기로 하였다.
약속한 10시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에스텔라의 애인 마리오와 애들이 장난을 하고 있다. 바로 간다고 하여 타니 마리오와 말썽 많은 막내 호세가 차를 탄다. 가다가 주유소에 들러 5만 과라니치 기름을 넣는다.
기름을 다 넣고 나니 다시 돌아 집으로 온다. 왜 다시 집으로 가느냐고 하니 아들 에듀가 안 탔다고 하네요. 집에 다시 와서 에듀를 불러 차를 태우고 루따 8을 따라 오비에도 가는 방향으로 간다.
파라과이의 특산품인 아오뽀이를 만드는 곳은 비야리까와 같은 주의 Yataity이라는 곳인데 동네가 제법 잘 사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니 아오뽀이를 만들고 팔아 잘 산다고 한다. 거리도 깨끗하고 성당앞 놀이터와 집들이 규모가 크고 좋다.
차를 세워 가게에 들어가서 아오뽀이를 구경하니 민욱이가 입을 만한 것은 4만과라니에 2장, 어른 것은 8만과라니 하여 6장(본인, 연승이, 사위, 작은 아버지 2분, 청강선생) 그리고 해먹(Hamaca)을 13만 과라니에 사고 에스텔라 기름 값으로 5만 과라니를 주니 선물값으로 모두 74만 과라니가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으따이뜨시내 관광을 하고 길가에 있는 개미집 사진도 찍었다.
이젠 아순시온 가서 난띠뚜와 천연소가죽으로 만든 허리띠 몇 개만
사면 된다. 미리 사서 짐 보낼 때 보내던지 무게가 초과하면 귀로여행 할 때 좀 무겁더라도 배낭에 넣어 가야겠다.
10월 9일, 내일 아순시온에 있는 이민 2세가 하는 동양여행사에 가서 아순시온에서 부에노 칼라파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뉴욕,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받아 오면 된다.
10월9일 미리 전화를 하고 가니 노재호부장은 없고 사장이 직접 비행기표를 출력하여 준다. 커피한잔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한경희사장이 내가 비야리까에서 밥을 직접 해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김치가 맛있는데 조금 줄 테니 가져가라고 하도 간절히 말하여 집에 가져와서 보니 큰 통에 맛있는 무김치와 파김치까지 많이도 넣었다. 꼼꼼하게 여러 겹으로 비닐로 싸고 냄새 나지 않게 조치한 것을 보니 솜씨와 일하는 스타일도 알 것 같다.
지난번에 연기된 개천절 행사를 19일 날 한다고 하여 19일 가면서 고마움을 갚아야 하겠는데 선물도 귀국할 때가 되니 다 주어버리고
드릴께 없다. 부득이 복주머니와 내가 손목에 차던 반야심경을 주고 싶었으나 독실한 기독교신자라는 이야기가 있어 복주머니만 김치통에 넣어 드렸다. 저녁식사라도 한번 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19일 17시 30분에 호텔 프론터에 기다리니 차가 와서 행사장으로 가니
대형 홀에 한명재대사께서 직접 진두지휘를 하면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7시 정도 되니 대사관직원이 한 줄로 도열하여 방문하는 내외 귀빈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파라과이정부의 외교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단상으로 모셔지고 다른 장관들과 요인들은 단상 형편상 아래서 대사께서 소개만 하였다.
파라과이국가와 애국가가 힘차게 울리고 대사의 인사말씀 중에 오늘을 위하여 부인이 3달 동안 음식을 준비했다는 말에 많은 박수를 받았다.
정성껏 준비한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복분자술, 소주, 막걸리, 여러 가지 전통술까지 곁들이니 참 좋다.
식사를 마치고 따로 준비한 극장에서 <도둑들>이라는 한국 영화를 스페인어로 자막처리하여 상영하여 파라과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사무소에서 준비한 차로 호텔에 오니 11시 훌쩍 넘었다. 젊은 친구들과
3시 까지 마시고 일어나니 7시다.
오늘은 서둘러 일을 마치고 13시 직행을 타야겠다.
점심을 강남에서 먹고 택시로 터미널에 가니 여유가 있다.
집에 와서 누우니 어제 마신 술의 영향인지 녹초가 된 듯하다.
21일 오전반 4,5학년 배드민턴을 수업하니 기온이 37,8도를 맴돌아 좀 쉬고 싶었지만 내랑 배드민턴을 해야만 학생들이 치기 좋게 셔틀콕이 가니 나랑 한번 쳐 보는 것이 바램인지라 쉬지도 40분을 뒤고 나니 땀이 비온듯하다.
22일은 오전반 6학년과 오후에는 4,5,6학년 수업이 있으나 6학년은 배드민턴 시합을 해서 장학생을 선발하기로 되어 있고 오후의 4,5,6학년은 이미 장학생이 선발되어 있어 시범경기만 보여 주어도 될 것 같다. 마지막 6학년 시간에는 담임과 사진도 찍고 보물봉지에 남아 있는 물건도 모두 갈라주고 치웠다. 공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랴 마는 한국에서 가져간 물건을 뽑은 학생은 품질의 우수성에 감탄한다.
23일은 출근해서 책상을 정리해 주고 체육용품도 잘 정리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점수판 관리 요령도 알려주고 송별회를 겸한 점심을 학교 인근에 있는 선생집에서 먹고 저녁에는 일부 학부형과 학생이 모인자리에서 내가 5명의 어린이에게 장학금을 주고 교직원들이 마련한 선물도 줄 모양이다.
23일 저녁 7시 30분에 행사를 시작한다고 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6시도 안되어 부교장이며 코워카인 에스텔라가 가자고 한다.
행사가 시작 되려면 1시간 반이나 남았는데 평소와 다르게 빨리 가자고 한다. 체육관 갔다 와서 샤워는 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라서 나를 위한 행사이고 또 장학금도 직접 수여하여야 하므로 양복을 입고 가야겠다.
양복을 입고 내려오니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다.
학교에 가니 돈 안 쓰는 학교에서 운동장 축구골대에 오색천으로 장식하고 조명을 설치하여 분위기를 돋우고 밤인데도 걸상도 100여개 운동장에 질서정연하게 준비하였다. 벌써 30여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 떼레레를 마시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오후반 컴퓨터 선생 2사람은 컴퓨터에 수록한 곡을 정리하고 다른 선생들은 소세지와 빵을 팔기위하여 물을 끓인다, 식권을 준비하는 등 법석이다.
행사는 19시부터 시작되었는데 유치원, 1학년...순이다. 그런데 내가 수업도 하지 않은 7,8,9학년과 유치원, 1학년까지 준비를 하고 공연을 하여 고마울 뿐이다.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고 되도록 전통적인 것을 나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학년별로
정성을 들여 만든 선물까지 준비해서 공연을 마치고 들어가면서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더운 여름나라에 와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수업을 한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 좀 잘 사는 나라의 제도와 문물이 모두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나라에 와서 배워서 가는 것도 적지 않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파라과이 과이라주의 주도, 비야리까 일라리아 사나브리아에서의 학교 수업은 끝나고 26일은 나의 후임으로 오는 김미정선생(컴퓨터)과 김숙선생후임으로 황옥희선생이 OJT연수를 오니 24. 25일은 집안 청소를 좀 해야겠다.
26일 오후 4시쯤에 내가 올때와 같이 에스떼반(에스텔라의 동생으로 변호사)이 차를 몰고 에스텔라와 함께 김미정(파라과이 이름:EVA, 44세,미혼)와서 기존에 에스텔라가 기거하던 곳에 여장을 풀고 에스텔라는 막내 동생 마르타가 사용하던 방으로 갔다.
내방에서 인수인계서에 못한 이야기를 하고 이틀을 즐겁게 보내고
28일(수)은 오비에도에 있는 신종호선생까지 내가 짐 포장하고 부치는 것을 도와주기위해서 9시경에 왔다. 기본적으로 짐은 20Kg하나, 15Kg 두 개를 하여 에스텔라 차에 싣고 비야리가 우체국에 갔다.
박스안에 넣은 물건의 명세를 적고 가격까지 일일이 적으니 불편도 하거니와 금액이 크니 (예를 들어 양복 1벌 150만원, 7,500,000과라니) 고가품은 부칠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 200.000과라니등으로 엉터리로 적었다. 더욱 불편한 것은 넓은 스카치테이프로 박스를 모두 재 포장하라고 한다. 이렇하자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람 인력도 많이 필요하다. 에스텔라, 신종호선생, 에바 김미정선생이 도움으로잘 부치고 집에 오니 에스텔라가 저녁은 나를 송별하고 에바, 황옥희선생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저녁에 아사도를 대접한다고 하여 잘 대접 받고 즐겁게 지냈다.
30일은 코이카 파라과이 사무소에서 나와 같이 귀국하는 86기 5사람을 위하여 환송 만찬을 한다고 하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비야리까를 뒤로하고 13시 직행으로 갈려고 하니 비가 온다. 에스텔라차로 터미널에서 이별을 하고 차 안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으니 출발 직전에 황옥희선생과 그 학교 부교장이 환송차 왔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4시에 아순시온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우찌야마호텔로 가서 일식집에 가니 조한덕소장님, 김나형부소장님, 최혜영, 신희영, 유경혜관리요원이 자리를 같이 했다. 나는 비야리까 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던 청강선생이 그린 동양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코이카 파라과이사무소에 전시해달라고 부탁하니 한국적인 것을 전시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며 흔쾌히 수락하였다. 2일은 한국으로 짐을 부친 것을 차액을 달러로 정산하고 통장에 남은 돈을 한국으로 송금하고 4일은 소전 김영식, 박동균선생, 신종호, 김미정등 신임단원 2분과 송별회를 하였다.5일은 은행계좌를 해지하여 남은 돈을 환전하여 공항까지 택시비 10만과라니만 남기고 난띠듀를 사고 마지막으로 아순시온을 관광하고 6일 10시 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7시 30분에 택시를 타려고 하니 신종호, 박동균선생이 공항까지 환송해 주겠다고 따라 나선다.특히 신선생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비행기를 탈 때 까지 기다려 주어서 무척 고마웠다.
첫댓글 선배님 반갑습니다.
긴 여정 잘 마무리하고 귀국 하셨는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