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길-11회차.(큰재~신의터재)
2005. 4/22~4/23.
글끈이 : 미스터리
1. 지난 곳/시간.
큰재 (04:36 출발) ~시멘트 농로(5;03~5:05), 이영도 목장. ~회룡재(5:36) ~아주(鵝洲) 申씨묘(5:46) 回龍山 우회 ~개터재(6:03)
~무명봉(505봉 6:21) ~무명봉(463봉 6:48) ~윗왕실재(7:00/7:10) ~무명봉(477봉 7:27) ~白鶴山(7:53/8:10) , 아침식사.
~임도(8:21) ~이름없는 고개(8:58) 우마차 지날 수 있는 흙길, 좌측은 농로와 논. ~개머리재(9:16/9:21)
~임도(9:33) ~임도 끝, 다시 언덕 오름(9:37) , 묘 1기 지나서. ~다시 임도 잠시 이어짐.(9:45) , 선유동에서 오르는 길. ~지기재(10:12)
~昌寧成씨+長水黃씨 묘(10:17) ~금은골 마을진입로, 시멘길(10;23~10:26) ~붉은바위 위 능선(10:43) ~밭, 농로(10:54) 안쑥밭골과 바깥쑥밭골로 내려 가는 길목. ~신의터재 (11:25 着) * 총 6시간 49분.
2. 이동거리
큰재~개터재: 5.65km ~백학산 : 6.87km ~개머리재 : 4.7km ~지기재 : 2.7km ~신의터재 :4.55km. 총 24.47km. (포항셀파산악회 실측자료 참조)
3. 11회차.
(큰재~개터재) 5.65km, (4:46/6:03)
폐교된 인성분교의 담을 우측으로 끼고 헤드랜턴 불빛이 이어 출발한다. 출발 1,2분도 못되어 후미에서 빽하라는 소리가 들려 온다. 폐가가된 관사와 학교담 사이로 막바로 직진해야 하는데 선두가 마을길로 접어든 것이다. 출발하자마자 알바부터 시작했다.
한 바탕 웃고 선두와 후미가 바뀌어 산행길로 접어든다. 이제는 어지간히 내공들이 쌓여 선두나 후미나 진행속도에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오늘 처음 join한 낯선 이들은 뒷 사람에게 길을 양보한다.
길은 거의 가파름이 없는 평탄한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뿐이다. 작은 봉우리 하나 넘고(4:47) 또 하나 작은 봉에 오른다.(5:01) 오늘도 60리길( 24km)를 가야하니 이런 작은 峰을 넘으면서 워밍엎 스트레칭에 갈음하는 것이다.
뒤를 돌아 보니 제법 큰 산이 버티고 있다. 지난 번 지나 온 국수봉은 아마 안 보일 것이고, 그 아래에 있던 무명봉(684봉)이 아닐까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진행방향의 좌측은 어둔 산만 보일 뿐, 우측은 가까운 마을 불빛에서부터 저 아래 공성면의 불빛도 가까이 반짝인다.
가까운 아랫마을은 윗돗골과 아랫돗골이다. 산은 낮아도 인적없는 산골이었던 이 곳에 200여년 전 노총각이 하나 찾아들었다 한다. 김해 金씨 성을 가진 이였는데 추풍령을 넘었는지 과거에 추풍낙엽 낙방하여 귀향하던 중 이 곳에 눌러 앉아 살게 되었다 한다. 그래 마을이 이루어지고 자손도 많이 번창하였다 한다. 마을에서 보면 이 곳의 산세가 돼지 같다 하여 돗골이 되었으니 돼지꿈 꾸고 부자가 되었으리라.
더 아래 불빛은 공성면이다. 국수봉에서 내려다 본 너른 벌판이 공성면이니 이 곳에서 바라보는 掬水峰은 水性이강하여 수성을 대표하는 숫자인 1,6 일에 공성장이 섰다 한다. 예부터 상주쌀을 三白쌀이라 하여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데 이 장의 주거래품이 바로 이 쌀이었다 한다. 상주구간 지나기 전에 삼백쌀로 자르르 지은 밥 한그릇 먹어 보고 싶다.
작은 봉을 내려 오니 시멘트포장길이다.(5:03) 시멘길도 잠시,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5:05) 이 길의 좌측 바로 아래는 목장이 어둠 속에도 내려다 보인다. 지도에 이영도 목장이라고 씌여 있다. 그 너머에는 산줄기가 벗어나갔다. 542봉에서 시작하여 서북으로 上板저수지까지 벗어나가는 아담한 산줄기이다.
바람은 서풍이 불어 오는데 그 바람결에 짐승똥냄새가 실려 온다. 봄바람 속에 언듯언듯 실려 오는 짐승똥 냄새도 이 새벽에는 싫지가 않다. 아직은 어두운 속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진달래가 화사하게 나타난다. 그런가 했더니 완전 꽃터널이다. 오늘은 꽃밭속을 걷겠구나.. 상상만 해도 산뜻하다.
어느새 동쪽하늘이 희어지기 시작하더니 랜턴불이 소용없어진다. 우리가 지나는 발걸음에 이른 잠 깨었나 새들이 지저귄다. 애들 때 점수 잘 받으려고 열심히 외웠던 문장이 떠오른다.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그래, 일찍 일어 나야지, 그래야 벌레를 잡지. 새벽 대간길 가는 우리도 어찌 보면 지독한 early bird들이다.
이윽고 대간길을 가로 지르는 흙길의 고개와 만난다. 回龍재이다.(5:36)
왼쪽(서쪽)으로 내려 가면 봉산1리 회룡마을로 가고, 우로(동쪽)으로 내려 가면 봉산2리 골가실마을로 내려 간다. 鳳山, 回龍 모두 풍수지리와 관련 있는 지명들이다. 골가실 마을은 예부터 이 일대의 부자마을이었다는데 마을입구에 城을 쌓고 대문을 해 달았을 정도로 넉넉하였다 한다. 지금은 문은 없고 주춧대만 남았다 하는데 내려가 보지 못하고 간다. (시간 나면 대간길 마을순례도 의미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골자기마다 가을이 왔듯이 넉넉하다 하여 ‘골가실’이라 했다쟎은가.
회룡재 지나 잠시, 또 하나의 가로 지르는 흙길 고개를 만난다.(5:39) 이 역시 골가실로 내려 가는데 내려 가는 길 초입에는 나무 하나 서 있고 이 곳에는 서낭당 돌무덤처럼 돌이 잔뜩 쌓여 있다. 그 아래는 제법 골짜기길로 깊이 있게 보인다. 내 나름대로 작은 회룡재라 생각해 본다.
앞 길에는 약간 좌로 비껴서 회룡산이 서 있다. 이름에 비해 규모가 작아 일부러 지도 보지 않으면 회룡산인지 눈치채기 어려울 듯하다. 규모는 작아도 이 곳 회룡산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여서 조선시대에 회룡산 烽燧대가 있었던 곳이다. 남으로는 金山郡(김천) 所山과 이어지고 동으로는 靑里縣 西山봉수와 연결된 요충지였다
진행하는 길 좌측은 과수원인 듯한데 철사줄로 친 울타리가 길로 내려 앉아 있다. 혹시 한밤 중 산행길에서는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회룡산 오르는 초입에는 한자도 어려운 아주(鵝洲) 申씨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곳 지나 산을 오르는데 길은 막바로 右로 迂廻하여 東北으로 산허리를 돌아간다. 이 길에는 보랏빛의 제비꽃이 많고, 너덜이라고 할 것은 없으나 비교적 돌이 많은 길이다.
산을 우회하자 산 밑을 개간한 밭이 나오고 비교적 너른 들에 아담한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아마도 효곡리 ‘큰마’마을일 것이다. 밭길 가장자리를 내려 오니 또 하나의 정다운 흙길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도 정감없는 개터재이다.(6:03) 이 곳 오기전 얼마나 개같은 고개이기에 개터재일까? 궁금하였는데 와 보니 참 사람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는 아담하고 정겹기 그지 없다.
------------------------------------------------------------- *개터재.
이 고개는 좌로 효곡리와 우로 봉산리를 이어주는 고개길이다. 이 고개 지하로는 경상북도에서 4번째로 크다는 상판리 상판저수지의 물을 우리가 지나는 대간길 우측에 있는 상주들판 ( 청리면, 공성면, 외남면 )으로 이어주는 물길을 냈다고 한다.
山自分水嶺, 실개천 하나 넘지 않던 대간길 땅속에 인간이 큰 물길을 만들었으니 어째 마음이 착잡하다.
고개 이름은 효곡리(왕실, 큰마) 사람들이 개터골에 다니던 고개라 해서 개터재라 했다는데 동네 이름을 따서, 효곡재, 봉산재, 왕실재, 큰마재라고도 부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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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터재~백학산) 6.87km, (6:03/7:53)
505봉을 향하여 언덕을 오른다. 개터재가 고도 380m라 하니 오르는 고도라야 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 몸이란 것이 꾀가 많아 이렇게 편안한 산행길에서는 어느덧 꾀쟁이가 되어 작은 언덕도 큰 산 오를 때처럼 힘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산행길과 다음 次 산행길 갈령까지는 대간길에서 가장 편한 길이라 한다. 소위 中和地溝帶 구간인데 크게 보면 지나 온 추풍령에서 앞으로 가야할 화령재까지를 말하는 이도 있으나, 이 곳 상주의 공성면, 모동면 모서면, 내서면, 화동면, 화서면 지역으로 대간길을 좌우로 싸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지각변동으로 지대가 낮아져 주위의 산 사이에 꺼져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작물을 재배하기 좋다는데 이 곳 대간길 고개고개마다 과수원이 아주 많다. 포도, 배, 사과의 糖度는 그만이라고 한다. 일교차 때문이리라. 고도 300에서 제일 높은 곳이 600고지이니 경관이야 크게 볼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대간길 가는 이들 사이에는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 재미없는 구간이라고 툴툴대는 이들이 많다.
505봉 오르는 길은 화사한 진달래가 온 등성이를 덮었다. 그 색깔도 각각이어서 연분홍에서 자주에 가까운 색까지 곰곰 들여다 보면 다양도 하다. 조물주께서는 참 수고도 많으시다.
505봉에 도착한다.(6:21) 개터재에서 봉우리를 향해 동으로 오르던 길은 방향을 북으로(좌로) 틀어 백학산을 향한다. 길은 평탄한 능선길인데 스스로 자유롭게 자란(그래서 재목의 가치는 없는) 20~30 년 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참나무도 섞여 있다. 꽃은 역시 진달래이다. 간간히 조팝나무의 화사한 꽃이 눈부시다. 길가에는 노란 복수초가 유난히도 많다. 새들도 심심치 않게 지저귀어 주어 산책길 나온 듯하다.
좌로는 별을 보고 점을 쳤다 해서 별봉산이라 불렀다가 이제는 성봉산이 된 산이 효곡리마을 너머로 솟아 있다. 효곡리는 본래 所谷이었는데 宋亮 선생(1534~1618)이 이 마을에 사시면서 이름을 크게 떨치고 그 자손들이 열녀, 효자였기에 孝谷으로 바뀌었다는 프라이드 있는 마을이다.
무명봉(463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 온다. 심하게 깍아 내린 절개지 위에 시멘트 구름다리가 걸려 있다. 거기에 써 있기를 ‘국토가 숨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 ,
윗왕실재에 도착한 것이다.(7:00/7:10)
윗왕실마을 위 고개라서 윗왕실재인데 좌우로 산이 폭 둘러 싸고 안으로 너른 들녘도 있어 임금님이 사시는 왕궁 같다고 王室이라 했다가 旺室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한다. 이는 임금님(王)이란 글자를 스스로 피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日帝 때 지명 중, 많은 王 자를 旺(日王)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앉아 일행이 베풀어 주는 사과와 쵸코렛으로 힘을 돋우고 477봉으로 향한다. 복수초 이외에는 야생화가 드문데 그 중에도 길 옆 부끄럽게 숨어 있는 놈들을 찾아 카메라에 담아 본다. 내 무슨 꽃을 알랴마는 지나는 길 꽃들도 담아 들꽃쟁이 친구 저녁노을에게 물으면 친절히 알려 줄 것이니 이렇게 부지런을 떨어 본다.
관심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어떤이의 말씀을 믿어 보는 것이다.
별 특징없는 477봉을 지나니(7:27) 이제까지 북으로 오던 길은 좌로(서쪽) 꺽이면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오늘의 최고봉 백학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477m에서 615m(백학산)까지 단 번에 오르는 길이니 오늘의 하이라이트이다.
땀 한 번 흘리고 봉우리에 오른다. 바로 앞쪽으로 다소 높게 보이는 봉우리가 또 있다. 그곳에 이르니 또 앞에 봉우리가 있는데 이 곳보다 높을 듯이 보인다. 어차피 가야할 대간길이니 어서 가 보자. 그 곳에는 아담한 정상석이 서 있고 낯익은 우리 일행들이 아침식사 중이다. 白鶴山. 상주시청산악회가 세워 놓았다. (7:53/8:10) 예전 백학이 많이 날아들어 백학산이라 했다는데 아마도 道敎의 신선사상을 숭배했던 우리 선배들이 이 곳의 최고봉에 붙인 예의가 아니었을까.
김밥과 오렌지로 아침식사를 한다. 지나온 대간길과 왕실마을 성봉산 회룡산을 바라 본다.
--------------------------------------------------------------- * 白鶴山에서 보는 주변의 山들.
風水地理하는 이들은 산줄기의 모양이나 놓인 자리를 아주 重視한다는데 回龍이나 來龍 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는 틀림없이 풍수에서 나온 지명이다.
풍수하는 이들이 제일로 치는 자리는 높은 산(이를 祖山이라 함) 좌로 산줄기가 안으로 폭 싸고 내려 오고 우로 또 다른 산 줄기가 안으로 싸고 내려오면서 가운데로 또 다른 산줄기가 뻣어 내리면 그 가운데 산줄기에 명당이 있다고 한다.
左의 산줄기를 左靑龍, 右의 산줄기를 右白虎라 하고, 가운데로 내려온 산줄기를 來龍이라 부른다는데 바로 이 來龍줄기에 명당이 있다 한다.
그러면 回龍은? 祖山과 뚝 떨어져 조산을 그리면서 돌아보고 있는 산. 이것이 회룡이라 한다. 그래서 回龍顧山(회룡이 조산을 되돌아 본다)이란 말이 생겼다 한다.
백학산에서 주위의 산을 보면 우리가 지나온 대간길이 좌청룡, 우측의 성봉산이 우백호, 백학산 정상에서 막바로 효곡리쪽으로 뻣은 산줄기가 내룡, 저 멀리 백학산을 돌아 보고 있는 회룡산은 회룡, 이렇게 牽强附會해 본다.
그러니 이런 명당안에 폭 사여 있는 마을에 이름을 떨친 宋亮선생 같은 이도 나오고 열녀, 효자도 나온 것 아닌가 한다. 왕실마을이라 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아서라, 선무당이 사람 잡고 반풍수가 집안 망친다 했으니 예서 줄이자.
1. 예부터 王과 관련된 말이나 도참은 극히 예민해서 흔히 반역으로 몰려 처형된 역사가 많다 한다. 王室이 旺室이 된데에는 이 곳에서 왕이 난다고 해석되면 참형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니 그런 연유이었을 수도 있다.
2. 의정부 못 미쳐 전철역이 회룡역이고, 사패능선 오르는 길에 회룡사가 있다. 이 곳의 회룡은 고려 장군 이성계를 기다리던 무학대사가 이 곳에 있었는데 이성계가 돌아 왔기에 龍이 돌아 왔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역사는 다 이긴 자 편의 기록이니 고려 王씨들이 들으면 龍은 무슨 용이겠는가. 그러나 무심한 지명은 600년이 넘은 지금도 이긴 자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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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산~개머리재) 4.7km (8:10/9:16)
백학산을 떠나기 전 주변의 산과 마을들을 바라다 본다. 右로는 크지는 않으나 제법 위용 있는 산줄기가 남북으로 벗어 내리는데 이 곳 내서면과 동쪽 너머 외남면을 구분 짓는 508봉 산줄기이다. 북으로는 노류리가 보이고 함박골도 수줍게 숨어 있다. 가야할 대간길도 북서방향으로 마을 뒷산 줄기처럼 나지막하게 앉아 있다. 가면서 꽃도 보고 쉬엄쉬엄 놀며 갈 요량으로 일행보다 앞서 정상을 떠난다.(8:10) 잠시 후 잘 다듬어진 임도에 닿는다.(8:21) 어디 절로 들어가는 호젓한 진입로 같은 느낌이 든다.
대간길을 알리는 절개지 리본을 보면서 다시 산길로 오른다. 이후 길은 자신의 뜻대로 자란 2~30년 쯤 된 소나무 오솔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군데군데 진달래가 만개하여 운치를 돋운다. 누가 이 길을 대간길 중 가장 재미없는 구간이라 했나. 이렇게 호젓한 봄길, 꽃길을 어디간들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산은 낮아도 깊어 산 산 산속이다.
좌로 잘 모신 무덤 하나 지나 길로 내려서니 비포장 작은 고갯길이 대간과 만난다. 이름없는 흙길의 고갯길이다.(8:58) 좌로는 이제 물을 대기 시작한 논이 있고 이 곳과 연결된 흙길의 농로가 보인다. 대간길은 그대로 직진하여 산길로 이어진다.
지도 상에는 이 능선길 우측 아랫마을에 대표저수지가 표시되어 있건만 산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시야가 탁 트인다. 과수원길인데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길에는 노란 민들레도 만발이다. 화사한 햇빛 속 봄과수원길, 애들처럼 봄이 즐겁다.
2차선 포장도로 개머리재로 내려 선다.(9:16/9:21) 지형이 개머리 모양처럼 생겼다는데 내 눈에는 잘 모르겠고 화사하기만 하다. 좌로는 소정리 우로는 대표리(大杓里)의 함박골을 이어주는 길이다. 소정리에서는 소정재, 대표리에서는 함박골재라고 부른다 한다.
고갯마루에는 벼슬을 못하신 ‘昌寧 成씨’묘소가 있다. 묘에는 할미꽃 두 송이가 고개를 숙인 채 피어 있다. 어찌하여 할미꽃은 무덤에 피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설을 증거하려는 것일까.
(개머리재~지기재) 2.7km, (9:21/10:12)
과수원을 끼고 대간길로 접어든다. 평탄한 뒷동산길이다. 첫 번째 임도를 만난다.(9:33) 대간길은 이 임도를 따라 잠시 이어진다. 임도 우측에 비석은 없으나 봉분이 큼직한 묘가 한 기 있는데(9:36) 이 곳에도 할미꽃 한 송이 피어 있다. 길은 임도를 벗어나 북으로 산길로 이어진다.(9:37) 언덕오름이다.
산길도 잠시, 숲속으로 난 또 다른 임도와 만난다. 길은 좌측 낮은 곳 마을쪽에서 시작한 듯 한데 아마도 아래쪽 마을 仙遊洞에서 올라 온 길일 것이다. 마을 앞 샘가에서 신선들이 노셨다 해서 선유동인데 임도가 없을 때는 이 소나무 숲길에서 산책도 하셨으리라.
대간길은 임도도 잠시, 다시 좌측 산길로 접어든다.(9:45) 산이라야 뒷동산이지만. 아차 하면 알바하기 십상인 곳이다. 길은 평탄하고 새소리도 간간 들리는 산책길이다.
우로는 산과 숲만 보이고, 좌로는 선유동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지붕이 모두 파란색인데 딱 한집이 紅一點으로 빨갛다. 파란색은 봄을, 빨간색은 여름을 나타낸다 하니 선유동은 온통 봄, 여름인 셈이다.
왜 마을 지붕이 모두 빨갛고 파랄까? 했더니, 동행하던 김영규님이 알려 주신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셔서 농촌사정을 잘 아는 분이다. 요즈음 농촌 지붕이 스레트나 기와나 모두 시멘트 제품이다 보니 내구성을 좋게 하기 위해 페인트를 칠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극기가 그렇듯 우리들에게 제일 무난한 색깔이 빨강과 파랑인가 보다.
길이 비스듬이 낮아지면서 낙엽송 조림지를 지난다. 이 곳 토양이 끈기가 부족한 탓인지 뿌리째 뽑혀 넘어진 큰 나무들이 눈에 띈다. 아쉬운 마음으로 나무들을 넘어 내려 오니 배꽃, 복숭아 꽃 흐드러진 과수원길이다. 사과와 포도도 보인다.
지기재에 도착한 것이다.(10:12) 본래, 도둑이 출몰했다 해서 賊起재인데 언젠가부터 지기재가 되었다 한다. 901번 지방도가 상주와 항간을 연결한다. 고개 바로 아랫마을이 大杓里인데 북두칠성을 국자로 보았을 때 이 곳 지형이 그 자루에 해당한다 하여 大杓(큰 자루)里가 되었다 한다.
포장도로를 건너니, 후손이 세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창녕 成공’의 묘소를 알리는 큰 비석이 서 있고,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간판이 서 있다.
낙동강은 이 곳 상주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발원은 우리가 언젠가 가야 할 대간길 태백시 금대봉에서 시작하여 김해평야를 지나는 길고도 긴 강이지만 그 이름이 상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 옛날 이 곳 尙州의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상주의 옛지명이 洛陽이었는데 이 낙양의 東쪽을 흐르는 江이어서 洛東江이다. 지금도 洛陽洞이 있고, 낙양이라는 이름의 중고교, 슈퍼, 병원, 세탁소.. 아직도 낙양은 살아 있다.
(지기재~신의터재) 4.55km, (10:12/11:25)
지기재마을로 들어가는 시멘길을 따라 집 몇 채의 마을 앞에 이른다. 길은 우측 뒷동산으로 연결된다. 오르는 길 우측으로 큰 옛묘가 있다. (10;17) 碑銘은 ‘성균진사 成공’과 孺人 長水黃氏 附로 씌여 있다. 창녕 成공과 장수 黃씨를 모신 합장묘이다. 그런데 끝에 씌여 있는 附란 글자가 아무래도 낯설다.
작은 언덕 하나 지나듯 하니 길은 좌로 틀어 시멘트길인 마을진입로 내려 간다. 앞은 집 몇채의 마을과, 마을 좌측으로 제법 바위가 섞여 있는 봉우리가 서 있다. 石山里 금은골마을과 금은봉(409m)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금은골은 본래 거문골이었다는데 마을 안쪽 깊숙이 어두컴컴해서 거문골이라고도 하고, 지형이 거문고 같다 해서 거문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깊어 內洞, 금은골을 한자화해서 禁谷이라고도 했다. 어떤이는 금은산지가 있어 금은골이 아닌가 하는데 이미 폐광이된 긍은광산(공성광산)은 산 넘어 효곡리에 있었으니 관련이 없다. 이 금은골 옆에 있는 봉은 자연스럽게 금은봉이 되었다.
대간길은 시멘트길을 버리고 우측 산등성이로 오른다.(10;26) 이 길의 흙은 이제껏 우리가 지나온 길의 흙과는 다르다. 마치 쇳가루를 섞은 듯 붉고 진한 흙이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차돌(석영)들도 보이는데 붉은 빛이 많이 섞여 있다. 길은 흙길이나 그 흙 밑으로 커다란 바위의 노두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동리 이름이 돌산(乭山)이었다가 石山里가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금은골을 좌로 하고 길을 돌아가니 붉은 바위지대가 비스듬이 나타난다.(10:43) 철분이 많이 섞인 마그마가 흘러내리면서 굳은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일반 바위와는 달리 붉은 밀가루반죽이 흘러내리면서 굳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질에 흥미 있는 이가 이 길 지나면 흥미로울 것 같다.
지도에 ‘스랩’이라고 씌여 있어 무슨 말인가? 해득이 안 되었는데 혹시 이 바위는 스랩등반하라는 뜻이 아니였나 모르겠다. 능선에 오르니 길 방향은 右로 튼다. 다시 흙길과 간간히 바위도 보이는 숲길이다.
불쑥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난다. 우리팀의 영원한 선두님이다. 신의터재에 갔다가 심심하여 후미를 마중 나온 것이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좀 빨리 진행할 걸 그랬나 보다. 꽃도 좋고 오솔길도 좋기에 오늘의 산행은 논야논야 놀면서 왔으니 먼저 간 선두야 심심도 하였으리라.
안부로 내려 오니 산속에 커다란 밭들이 나타나고 농로도 아랫마을로 내려 가게 잘 나 있다.(10:54) 안쑥밭골과 바깥쑥밭골로 내려 가는 길이다. 임진란 때, 이 곳으로 피난한 우리 선배들이 쑥을 캐어 먹으며 연명했던 곳이다.
밭들 끝으로 대간길은 다시 오솔길로 들어간다. 소나무 사이사이 잣나무구간도 보이고 쓰러진 큰 나무도 많다. 이 곳의 흙이 모래가 많이 섞인 마사토 종류로 보이는데 힘이 없다 보니 아깝게 조림한 나무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다.
유난히 무덤도 많다. 흙이 수분을 간직하지 못해 그런가 앙상한 흙무덤들이 발가벗기운 듯 눈에 띈다. 오늘의 대간길이 낮은 산길 地溝帶이다 보니 많은 무덤들을 지나왔다. 잊혀져 잡목 밑에 버려진 무덤도 많았고, 봉분이 흘러내려 평묘가 되어 발길에 밟힌 무덤,, 이 곳처럼 떼가 자라지 못한 누드 무덤.. 정말 무덤공화국이다.
저 아래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보인다. 2 차선 포장도로도 깔끔하게 보인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 신의터재이다.(11:25)
이 곳에는 잘 다듬은 신의터재를 알리는 비석도 있고, 임란때 활약하신 金俊臣의사의 유적비도 서 있다. 여기에 그 유적비 글을 옮긴다.
< 신의터재 내력 >
임난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리었고, 임난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때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五拾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장으로 삼고저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
一九九六년 十二월 상주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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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산 후 열린 삼겹살 파티는 그 맛이나 분위기, 이에 곁들인 헛개나무 쇠주 모두 一品이었습니다. 마음 써 주시고 준비해 주신 분들, 생각할수록 감사합니다. 산행 내내 福 받으십시오.
2. 후기 늦어 죄송합니다. 일요일 밤에 이제 50대 초반인 사촌아우를 잃었습니다. 내가 그리 운동해서 땀내고 담배 끊으라 했건만..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다음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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