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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45
출애굽기 20장 17절 [제79-81문]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의 내용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의 유지와 증진을 요구하십니다. 반대로 진실에 해가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은 사람이고, 그들에게 진실과 정직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반드시 의식해야 합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에 대해서 살피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79문부터 81문까지 제10계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79문은 계명 자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79문. 제10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답.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출20:17).
그런데 탐내지 말라, 즉 탐심에 대한 부분을 굳이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핀 여러 계명들을 통해서 이 부분이 다뤄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명령 자체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외적인 명령을 통해 내적인 것도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셨던 것이 예수님의 율법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또한 간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명하실 때 명시된 바로는 외적인 것을 금하시는 혹은 요구하시는 것으로 있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는 내적인 것까지 금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이런 이해에 따르자면 굳이 열 번째 계명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르시누스라는 개혁자는 이 계명이 결코 쓸데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열 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이요 해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942 참조). 반면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에서는 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제네바요리문답 214문
목사: 만일 모든 율법이 네가 말한 대로 영적인 것이라면, 즉 다른 모든 계명들이 외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마음의 성향까지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왜 이 계명에서는 특별히 후자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가?
아이: 주님께서는 다른 계명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다스리시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떤 탐욕과 욕망을 품고 있기는 하나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율법을 부과하시기 원하십니다.
제네바요리문답 215문
목사: 그대는 생각 속에서 신자에게 다가오는 아주 미세한 유혹까지도 죄라고 생각합니까? 비록 그가 이에 대해 저항하고 결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아이: 모든 악한 생각들은, 비록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육신의 결함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계명이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며 괴롭히는 탐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선 계명들이 금한다고 할 때는 외적인 실천과 더불어 확정된 마음의 상태까지라면, 마지막 계명은 확정된 의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자면, 내가 내 이웃의 물건을 보고 탐내어 그것을 갖고 싶다는 유혹을 받았을 때, 이런 탐심과 탐심의 실천으로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면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8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물건에 대하여 가지고자 하는 탐심까지도 정죄하십니다. 10계명 역시 이런 마음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도 다루는데, 의도를 가진 것만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조차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현세욕이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할 때 좀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도덕법으로서 아홉 개의 계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열 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중 이웃 사랑의 법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 외적인 행동을 금하는 표현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열 번째 계명은 그것의 근원이 되는 탐심의 문제를 다루면서 앞선 계명들의 일반적인 법칙이 무엇인지 그 해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나아가 의도한 탐심만이 아니라 의도치 않는 탐심의 내용까지 하나님은 죄로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알리신다는 점에서 다시금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죄에 대해여 경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10계명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제10계명에 대한 해석으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0문은 10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81문은 10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80문. 제10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해 완전한 만족을 요구하며(히13:5, 딤전6:6),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사랑의 마음을 요구합니다(욥31:29,, 롬12:15, 딤전1:5, 고전13:4-7).
제81문. 제10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을 금하며(왕상21:4, 에5:13, 고전10:10), 우리 이웃의 좋은 일에 대한 시기와 슬픔(갈5:26, 약3:14,16) 및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한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롬7:7-8, 13:9, 신5:21)을 금합니다.
일단 탐심과 관련해 교단 공과의 내용을 좀 더 언급하자면, 탐심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범을 벗어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서 자기 욕망을 따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탐심으로 인해 우리는 헛되거나 사악한 것들에 쉽게 미혹되어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실제로 광고나 어떤 유행 등에 쉽게 유혹되어 탐심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계명에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살인, 음란, 도둑질, 거짓말 등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없도록 금하셨습니다. 동일하게 열 번째 계명에서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탐심을 금하십니다. 물론 모든 욕구를 다 금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잠자는 것, 그리고 자손에 대한 것 등과 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요구들이 있습니다. 제10계명은 그런 욕구 자체까지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욕이라고 불리어지는 탐심에 대하여 정죄하시는데, 정욕이란 한 마디로 이웃과 관련된 모든 불법적인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욕구에 대하여 금하시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10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완전한 만족과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사랑의 마음을 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완전한 만족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빌립보서 4장 11절의 말씀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자족하는 마음보다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왜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나는가?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본성이 아담 안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단의 경우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죄는 모방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펠라기안주의), 정욕이라는 탐심은 모방해서, 배워서 가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정욕이라는 탐심은 이미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펴보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남아 있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할 때도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족하기를 배울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런 자족 훈련은 반드시 하나님과 그분의 뜻,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대하여 인정하고 만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 이어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는데,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을 통해서도 배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시고 작정의 실행으로서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나아가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즉 비천에 처하게 하신다면 비천에 처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는 것이고, 반대로 풍부에 처하게 하신다면 풍부에 처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의 유익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자족은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최고 상급으로 주셨다는 것은 자신 외에 그가 주시는 모든 것도 사실은 최고 상급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부족하다고 해서 원망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받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1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런 모든 훈련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1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11절을 좀 더 구체화해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자족하기를 배우고, 실제로 자족한 모든 것이 사실은 바울 자신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었다는 내용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 번째 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완전한 만족이라고 할 때, 빌립보서 4장의 말씀처럼 자족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자족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겸손히 요청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자족하기를 배우되 욥기 1장을 통해 알리시는 바처럼 아무 것도 없는 우리에게 무엇이라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도 자족하는 마음을 배우는 데 있어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조금 더 실천적인 내용으로는 토마스 빈센트의 해설을 참고하면 좋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첫째, 우리가 이생에서 부와 낙을 누릴 때 그러한 가운데 어떠한 마음의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가? ① 우리는 그러한 때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많은 부에 집착시키지 않고 또 그것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눅12:15, 시62:10). ② 우리의 주된 행복을 하나님과 위에 있는 것들에 두며 우리의 소유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시16:5-6). ③ 다른 사람이 궁핍한 처지에 있을 때 그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준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로써 위대한 사랑을 나타낸 자들에게 그의 사랑하심과 축복하심을 더 하신다(고후9:7-8). ④ 이러한 만족의 은혜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한다. 그러한 만족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의 소유욕은 더욱 확대되고 반대로 우리의 만족은 점점 식어질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이생에서 가난하고 어렵고 고통스런 상태에 있을 때 어떻게 만족을 누릴 수 있는가? ① 진정한 경건생활을 함으로써이다. 진정한 만족은 거기에서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딤전6:6). ② 우리로 그러한 정황 가운데 처하게 되고 고통을 받게 하신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고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봅으로써이다(욥1:21, 시39:9, 시119:75). ③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거기에 관심을 둠으로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지어 최악의 상황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함께 일하시는 분이다(롬8:28). ④ 겸손히 우리의 죄를 의식함으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창32:10, 단9:8). ⑤ 세상에서 우리보다 더 고통 받는 자들이나 더 가난한 자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을 누리는 자들을 바라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위에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셨다.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확실한 거주지도 없고 곤핍하고 괴로움과 고통을 받는다. ⑥ 영적인 부를 더욱 풍부히 누리도록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적인 것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해 세상적인 유업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천국의 유업을 얻는 데 진력한다면 그때 가장 가난한 때가 가장 부유한 때가 될 것이며 의무적인 고난은 오히려 가장 심원한 기쁨이 될 것이다(약2:5, 살전1:6). ⑦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것도 없고 또 그것을 가지고 떠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이다(욥1:21, 딤전6:7-8). ⑧ 보편적인 만족에 대해 교훈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어떠한 상태에 처하든지 이러한 은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그로부터 능력을 얻어내자(빌4:11-13).
10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에 대한 두 번째는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사랑의 마음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그의 안녕에 대하여 사랑과 소망과 기쁨의 감정을 가져야 하고, 반대로 이웃의 악과 고난에 대하여는 함께 슬퍼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롬12:10,15, 히13:3). 우리말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마음이 탐심인 줄 알고 우리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10계명을 통해 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 우리 이웃의 좋은 일에 대한 시기와 슬픔 및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한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을 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을 금해야 합니다. 자족함이 아니라 불평하는 것, 투덜거리는 것,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 등을 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는 우리에 대한 불만을 가집니까? 물론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욕심은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과 함께 하나님의 작정과 그의 섭리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나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불평하고 불만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의 표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이웃의 좋은 일에 대한 시기와 슬픔도 금해야 하고,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한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도 금해야 합니다. 사실 여기에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인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웃에게 좋은 일을 주시는 분으로 계신데 그것을 시기하고 슬퍼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족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까지 나온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앞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폈지만,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은 탐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죄를 범하는 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물론 탐심의 결과 외적인 어떤 행동이 있어야지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탐심 자체가 죄이기에 하나님은 열 번째 계명을 통해 탐심을 금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실제적인 탐심만 죄인가? 앞서 칼빈의 제네바요리문답을 통해 언급한 것처럼 확정된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그런 의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스쳐지나가는 그런 생각조차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꿈을 생각해 봅시다. 꿈을 꾸는 것을 통해 죄를 말할 수 있는가? 분명 거기에는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계명에 대한 개혁자들의 해석은 그것까지도 죄라고 말합니다. 사무엘 루더포드의 요리문답을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는 동안 이성과 의지가 자유로운데, 어떻게 꿈이 죄악된 것일 수 있습니까? 죄악된 꿈은 우리의 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낮 동안 악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는 허황된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거룩한 꿈을 꾸게 하는 기도와 천국에 대한 묵상으로 신중하게 생각함이 없이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번역 서창원)
이에 반해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현세욕이라고 해서 그 마음에 욕심이 밖으로 표현되지만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역시 정욕이 죄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고의성이 있지 않는 이상 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이 스스로 산출하거나 막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죄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어머니 태 중에 있을 때는 스스로 산출하거나 막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즉 성경은 저들이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죄라고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경우 원죄가 세례 시에 제거되었다다는 교리도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 정욕은 세례 받은 자들에게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나중에 세례에 대해서도 배우겠지만 사실 세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세례가 의미하는 중생의 경우 부패와 죄로 기우는 우리의 모든 성향가지 다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자도 여전히 부패함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짓는다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만 구별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사단의 유혹 자체가 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사단을 통해 유혹을 받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은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와 연관된 탐심의 내용을 가지게 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확정된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그런 의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스쳐지나가는 그런 생각조차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만큼 우리가 연약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음주 82문을 통해 확인하게 되겠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 이 세상의 삶에서는 누구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 계명들을 그렇게도 엄격하게 선포하십니까?
답. 첫째로, 평생토록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 더 알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로,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 그 완전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게끔 끊임없이 수고하고 또한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지만, 방금 읽어드린 부분을 새기면서 십계명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비록 십계명의 내용을 다 지킬 수 없지만,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향해 가는 자들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수고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거룩해져 가는 방편으로, 달리 표현하면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십계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