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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회왕(楚懷王)을 인용한 영사시(詠史詩), 역모의 빌미가 되어 원통하게 죽다> 고영화(高永和)
지금부터 400년 전, 임진왜란의 영웅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장군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신(拷訊)을 당하다가 끝내 죽고 만 역사가 있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제 한 몸 던져 함경도 지역을 수복한 전쟁 영웅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과 김시민 장군, 권율 장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함경도 의병장이자, 북관대첩(北關大捷)의 영웅이었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버렸다. 장군이 창원부사 시절인 1618년에 쓴 중국의 초(楚) 회왕(懷王)과 악비(岳飛)를 읊은 영사시(詠史詩)가 역모죄의 꼬투리 시안(詩案)의 빌미가 되어 원통하게 고신 끝에 하직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지면을 빌러 농포(農圃) 장군이 죽음에 이른 <영사시(詠史詩)>와 당시 장군이 모함을 받은 이유와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 문신(文臣) 출신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지휘한 의병장과 장군이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임란 때 함경도 북병영에서 정6품 문관직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 북평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북병영 병마절도사(북병사, 北兵事)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관리가 북평사(北評事)이다. 북평사는 관할지역 내 군사훈련, 무기점고, 군사시설 점검 순행, 무관 과거시험 주관, 감시어사 겸임, 북방 고을 수령 감시 등, 그 권한이 막중했다. 그래서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장군이 왜란 때, 함경도 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고 또 지역 고을 수령을 휘하에 두고 의병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북관대첩(北關大捷)]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는 먼저 9월 초에 경성에서 의병을 모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 등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다시 군사 1천여 명을 정비하여 경성(鏡城), 장평, 임명(臨溟)에서 전공을 세웠고 또 이어 모집한 군사(의병) 3천명을 거느리고 백탑교(白塔郊) 등에서 승첩을 거두었다. 이로써 왜군을 총 2천명 이상 참수했고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조명 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고, 이후 함경도에 일본군이 두 번 다시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만들었다.
○ 그런데 27세 정문부(鄭文孚)는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북도 변방에서 일본의 최강부대 가토 기요마사군에 승리한 장군으로 전도유망했지만, 난리가 끝난 후에는, 정쟁이 끊임없는 시국을 피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관으로 전전하며 자신과 가문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이는 조부가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을 고변한 고죽재 정언각(鄭彦慤 1498~1556)으로 대윤 소윤이 대립한 왕위 계승 싸움에 이어 정미사화(丁未士禍)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농포는 혹여 당파 싸움에 예전 조부의 일로 연루되어 욕을 들을까, 평소 처신을 신중히 하였으나, 결국 당파 싸움의 여파가 그를 시화(詩禍)에 휘말리게 했고 그가 자손들에게 벼슬살이를 하지 말고 진주에서 조용히 살라고 유언한 계기가 되었다.
○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억울한 죽음]
농포(農圃)가 당쟁에 얽히게 된 것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이괄이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유추해 볼 때, 북관(함경도) 지역의 주민으로부터 존경받던 농포를 함께 엮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농포는 1618년 창원부사 재직 시절, 역사시 10편을 지었는데 농포를 문초하던 사관 둘이 <영사시(詠史詩)> 내용에서 초회왕을 인용한 부분이 이괄의 난에 관련 있다는 죄목을 덮여 씌었다. 이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처럼, 또는 1468년 젊은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을 유자광이 ‘남아이십미평[득]국(男兒二十未平[得]國)’을 고변한 것처럼, 억울한 모함에 빠져, 그렇게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得]國 後世誰稱大丈夫)”-남이(南怡)-
● [대관(臺官) 박정(朴炡)이 농포(農圃)의 영사시(詠史詩)를 역모로 엮다.]
<조선왕조실록 1666년 5월>기록에 따르면, 인조반정 후 조정이 정문부를 크게 쓰려하였는데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함을 받았다. 대질 심문 끝에 해명되어 석방하려 할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꼬치꼬치 논의하는 대관(臺官) 박정(朴炡 1596~1632)이 있었으므로 끝내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고 말았다. 이른바 시(詩)가 빌미가 되어 죄를 받는 것을 시안(詩案)이라 하는데 정문부가 5년 前 1618년 창원 부사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시(詠史詩)를 핑계 삼아 죄를 덮어씌웠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시(詩)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 [죄를 덮어씌운 이유가 있었다.]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를 해치려는 자는 인조반정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던 반정공신 대관(臺官) 박정(朴炡 1596~1632)이었다. 사실 박정(朴炡)은 농포(農圃)공에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623년 전주부윤 당시 국고에서 빌려 쓴 환곡(還穀)을 갚지 않는 불법 거간꾼이 있어 이를 감금했는데 그를 풀어주라는 인조반정 공신 박정(朴炡)으로부터의 청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박정은 전임 전주부윤이였다. 열흘에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강직한 농포공이 자기를 한 번 굽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고비였다. 원칙주의자 농포공은 결국 이를 특사(特赦)하지 않고 끝내 환곡을 회수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늘 앙갚음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박정은 대관(臺官)이란 자리를 이용해 농포공에게 괘씸죄로 엮었다.
◉ <농포집(農圃集)>에 의하면, 이 영사시(詠史詩)는 1618년 창원부사 당시에 심심풀이로 스스로 회포를 읊은 10수 중의 한 수이다. 이 시는 인조반정 5년 전에 지은 시다. ①이에 인조가 즉위하기 5년 전이니 인조를 비방할 수 없는 시다. 5년 후에 일어날 인조반정을 어찌 미리 알고 비방시를 지었겠는가. ②또한 그 내용이 인조에 딱 들어맞는 것인가도 문제였다. 이 시는 속이고 먹히는 전국시대 중원의 덧없는 역사를 읊은 영사시(詠史詩)다. ③그 내용 중 마지막 부분, <잔약한 손자>라는 부분이 인조를 빗댄 비방의 시라고 몰아 부친 것 같지만, 걸맞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해칠 목적에 맞춘 말일 뿐이다.
○ [여러 명이 은밀한 공모로 죄를 엮다.]
이 영사시(詠史詩)는 정문부(鄭文孚)가 1623년 인조반정 5년 전에 지은 것인데 1624년의 갑자옥사(甲子獄事)로 부각되어진 경위를 한번 들여다보겠다. 이 시는 농포(農圃)공이 어머니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여막(廬幕)의 벽지로 발라졌던 것인데, 최내길(崔來吉 1583~1649, 최명길의 아우)이 문상 왔다가 보고 가서 퍼뜨린 것이라고 농포집에 기록되어 있다. 최내길은 공의 장남(정대영)과 동서 간인데 내길(來吉)이 간사하고 경솔하여 인격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장인 익성군이 두 사위를 대우함에 있어 후박(厚薄)이 없지 않아 감정을 오래 품었었다는 기록도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최내길의 수족이 윤훤인 점을 감안하면, 이 사건의 뒤에는 여러 사람의 은밀한 공모가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농포공 부자(父子)를 둘러싸고 일어난 최내길·윤훤·박정이 서로 주고받은 공동모의였다.
게다가 농포(農圃)에 대한 인조의 의구심도 한몫을 했다. 문무를 겸한 그의 능력과 임난 의병장을 떠올려 원수(元帥) 자리 주려 해도 거절하고, 인조왕에 저항하는 이괄의 난 평정에 부총관으로 도와달라 하면 병을 핑계(稱病)로 거절하고, 원하는 전주부윤을 주어도 어머니 당상을 이유로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게다가 농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조를 해치려고 음모하던 반역 세력들이 혁명 선봉장으로 공을 앞장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더욱 불편해 하던 참이었다.
○ [어처구니 없는 형문으로 죽고 말다.]
창원에서 지은 이 영사시(詠史詩) 4수(四首) 중에 초회왕(楚懷王) 부분을 문제를 삼아 정국문초로 넘어갔다. 박홍구 옥사문서에 의하면 이날 정국을 열어 ‘초(楚) 회왕(懷王)’ 시의 작시 의도를 추궁했다. 곧 인조를 비방한 시가 아니냐는 물음으로 4차 형문을 열고 곤장 30대와 압슬을 가했다. 이때 문초를 맡은 이식(李植)과 조익(趙翼)이 ‘다른 뜻이 없는 단순한 영사시(詠史詩)이니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느냐’며 힘써 다투었으나 묵살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11월 19일) 5차 형문 날에도 곤장 30대와 압슬을 가했다. 병세가 위급하여 생명이 위태로운데도 불구하고 “정문부 죽을 정도로 집행하라”는 영이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그날 바로 집행하고 말았다. 임난 의병대장 농포 장군은 문제의 시 ‘초 회왕’이 대역죄가 된다는 결말이 성립될 자백도 입증도 증거도 없이 불문곡직 물고(物故)로 죽고 만 것이다. 필시 무고한 형벌에 대한 후일의 당사자 항변과 형벌 현장의 증언이 있을 경우, 소명과 대응방도가 궁할 것이 명백하므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어처구니없이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계산에 따라 무리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 추정된다.
○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인물 평]
조선중기 한문 4대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농포는 인격과 능력은 참 높으나 강직함이 너무 지나쳐 한이다.”라 하였고, 공의 5촌 조카 병조참판 정조(鄭造 1559~1623)가 공을 찾아와 대화를 하고자 하니, 권력남용을 경계한다며 집안사람이지만 대면을 피하였다. 또 이웃에 사는 권신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공을 사모하여 사귀고자 해도 만나주지를 않았고, 대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를 찾아가 며칠을 묵으며 경서를 논하고 칭찬을 받은 바 있는데 제자들에게 “농포가 어찌 시인뿐이겠는가?”라며 칭찬했다. 농포집에서는 공을 맑고 검소하며 이익과 재물을 탐하는 자를 보면 더럽다며 침을 뱉는다하였고, 벼슬에서 돌아올 때는 행장이 말쑥하다고 썼다. 또 아들에게 ‘관용(官用)의 말(馬)을 사사로이 타지마라’ 하였으니 그에게서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결국 아들도 함께 옥사하고 말았다.
⇨ 다음은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영사시(詠史詩)를 소개하겠다.
● 다음 <영사시(詠史詩)> 4수(四首)는 초회왕(楚懷王)과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에 관한 칠언절구(七言絶句)인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그 말 많던 한시 4수이다. 이 시(詩)는 임란 때 함경도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작품으로, 중국의 역사적인 사실을 읊은 시(詩)이다. 특별히 두 번째 수(首)의 뜻을 지적하고 문제 삼았다 한다. 그런데 이 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아도 역모와 관련된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가 없다. 초회왕(楚懷王)은 중국 초나라 '항우'가 추대해 왕이 되었다가 항우에 의해 살해된 왕이다. 시 내용은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의 꼬임(계략)에 넘어가 죽었는데 왜 다시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쓸데없이 회왕으로 만들어 죽게 했느냐’는 정도로 쓴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수(首)의 운자(韻字)만 ‘陽’ 자(字)이고 나머지 3수(首)는 모두 ‘支’ 운(韻)이다. 이 글의 첫 수와 둘째 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시절 감언에 속아 망국의 위기에 빠졌던 역사적 사실을 인용했고 셋째 수와 넷째 수는 남송(南宋)의 충신(忠臣) 악비(岳飛)가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회상하며 적은 글이다.
이 작품 같은 <영사시(詠史詩)>는 기이한 옛일을 인용해서 지금 세상을 비유하거나 개인의 특정적인 사실을 회고하여 지은 시(詩)로, 고려 때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따위가 있다. 다음 <영사(詠史)>는 이괄의 난에 연류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원통하게 죽은 정문부의 그 문제적 칠언절구 4수이다.
*<영사[詠史] 역사를 읊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楚地靑山有九疑 초(楚)나라의 청산엔 구의산(九疑山)이 있는데
懷王何事信張儀 초(楚) 회왕(懷王)은 어이하여 장의(張儀)만 믿었던가
商於六百終難割 상(商)나라의 육백리 땅 떼어주기 어려웠지
湘水空流不盡悲 상강(湘水)만 덧없이 흘러 슬프기 그지없네.
楚雖三戶亦秦亡 초(楚) 비록 삼호(三戶)라도 진을 멸망시킨다고
未必南公說得當 예언한 남공(南公)의 말이 맞은 건 아니었네.
一入武關民望絶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백성들 희망이 끊겼는데
孱孫何事又懷王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懷王)이 되었는고.(右楚懷王)
奉詔班師人或疑 군사를 거느리라는 조서를 받드는데 혹 어떤 이가 의심하길래
自知亡宋實天爲 송나라가 망한 것도 실로 하늘의 뜻이었음을 저절로 알겠네.
假令不下金牌字 가령 금패(金牌)라는 글자보다 못하지는 않지만
星落應回渭水旗 별이 떨어지니 응당 위수(渭水)의 깃발을 들고 돌아오리라.
武穆精忠草木知 악무목(岳武穆)의 한결같은 충성 초목(草木)도 아는지,
墓前松柏盡南枝 무덤 앞의 송백(松柏)엔 남쪽으로 뻗은 가지 하나 없어라.
高宗陵上樵無樹 황제 고종(高宗)의 무덤 위에는 땔나무 하나 없는데
空有悲風自北吹 공연히 구슬픈 바람 일어나 절로 북쪽으로 불어가네.(右岳武穆, 岳飛)
[주1] 구의산(九疑山) : 구의산은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 있는데 순(舜)임금이 순행(巡行)하다가 이곳에서 죽어 장사 지냈으므로, 남의(南疑)라 하면 곧 제왕(帝王)의 죽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임.
[주2] 장의(張儀 ?~기원전 309년) :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秦)의 정치가 · 외교가이자, 종횡가(縦横家)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다. 그는 달콤한 말솜씨로 회왕(懷王) 초(楚)나라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주3] 상강(湘江) : 상강의 대나무가 많이 언급된다. 순(舜)임금이 죽자, 두 비(妃) 아황(娥皇)·여영(女英)이 울며 눈물을 상강(湘江)의 대나무에 뿌리자 대나무에 반점(斑點)이 생겼다고 함. 또 초나라 충신 굴원이 쫓겨나 몸을 던진 강으로 소상강(瀟湘江)이라고도 함.
[주4] 초회왕(楚懷王 기원전 355~기원전 296) : 중국 초나라의 제37대 군주(재위, 기원전 329년~기원전 299년)이다. 이름은 괴(槐)이다. 그는 서초의 초대 황제이자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초 의제의 서고조부이다. 끝내 진나라의 계략과 조나라의 배신에 휩쓸려 기원전 299년 초나라의 왕의 자리에서 폐위된 후 그의 아들이 초나라의 군왕 보위를 이어받았으며, 왕위에서 폐위된 지 3년 후 기원전 296년 진나라의 감금지에서 쓸쓸히 죽었다.
[주5] 예언한 남공(南公)의 말 : 남공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 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주6]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 전국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주7]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懷王)이 됐다더냐 :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주8] 금패(金牌) : 이금(泥金)을 발라 만든 나무패. 조선시대에 규장각의 벼슬아치들이 나갈 때에 인로(引路)가 이를 들고 앞서 가게 하였다.
[주9] 위수(渭水) : 중국 황하강의 지류로 중국에서 가장 기름진 지역이었던 관중지방을 관통하며, 이 강 바로 남쪽 강변에 장안이 있다.
[주10] 남송의 황제 고종(高宗) : 금나라가 1126년 북송을 멸망(정강의 변)시키고 황제를 잡아가자, 1127년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가 강남으로 피신하여 임안(臨安)에서 송나라(남송)를 재건하고 고종(高宗)으로 즉위했다. 진회(秦檜)의 중상모략에 충신 악비(岳飛, 岳武穆)을 죽게 했다.
[주11] 악무목(岳武穆) : 남송(南宋)의 충신(忠臣) 악비(岳飛 1103~1142)의 시호가 무목(武穆)이다. 금(金)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지만 결국 진회(秦檜)의 중상모략과 그 사주를 받은 묵기설(万俟卨) 등의 모함으로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악비가 처형될 때 아들 악운(岳雲)도 함께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