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무데뽀 정신>의 줄거리:
무데뽀가 아니면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 생활화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무데뽀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이 지구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일들에 대해서 사물들에 대해서 따뜻하고 관심많고 배려심 넘치고 민감한 마음으로는 십자가 생활화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무데뽀만 십자가 축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십자가 무데뽀 정신
(마태복음 16:21~28)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무데뽀 정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무데뽀 정신’
무데뽀는 막무가내, 무모하다는 뜻을 지닌 일본어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만큼 순화하여 사용하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오늘 제목에서 구태여 무데뽀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말에 담겨있는 역사적 어원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무데뽀는 한자로는 무철포(無鐵砲)로써 철로 만든 대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15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의 배 한 척이 표류하여 일본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배에는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는데 이 상인에 의해 일본에 조총(鳥銃, musket)이 전래되게 됩니다. 이 조총은 일본의 긴 내란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게 되는데, 쇠로 만든 포라는 의미에서 철포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철포는 귀한 무기였기 때문에 모든 세력이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철포가 없는 세력은 상대적으로 수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철포가 없음에도 공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도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저돌적으로 공세를 계속합니다. 이 모습이 너무도 막무가내였고 무모했기에 무데뽀라는 이름으로 고유명사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무데뽀의 모습은 조선시대에서 발견됩니다.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은 충주로 내려가서 왜군을 막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영의정 유성용이 조총을 염려하며 전략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조총을 얕잡아 보아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충주에서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데뽀 정신이라는 말은 일제의 잔재가 많이 청산된 요즘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로 혼자 여행을 떠나려는 딸을 걱정하면서 부모님이 “딸이 무데뽀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안이 불안한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환상에 젖어 이러한 문제를 다 젖혀둔 채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있다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은 무데뽀 정신은 막무가내로 말릴 수 없는 상태를 일컫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사채업자는 무데뽀로 돈을 갚으라고 했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적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무데뽀로 안건을 통과시켰다”라는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무데뽀 정신이 보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렸지만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무데뽀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최측근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결정을 만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의리와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셨다면 이들의 만류에 잠깐 귀를 기울이실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한편 우리 또한 이러한 무데뽀 정신이 없다면 십자가를 향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무데뽀 정신을 발휘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십자가 생활화를 어렵게 여기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따듯하고 여리고 배려심이 있으며 책임감과 의무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하늘을 향해 가려는 마음을 붙잡고 멈추게 하는 세상을 무데뽀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이유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막무가내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일들의 사정을 봐주고 배려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십자가를 붙잡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갖고 계셨던 것이라고는 제자들과의 관계뿐이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수제자로 불릴 만큼 예수님께서 아끼셨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수제자의 간곡한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신앙적 가르침이야말로 참으로 귀중합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예언을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제자가 스승에게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사랑이고 배려였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십자가형이 얼마나 참혹한지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존경하고 미래를 맡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시니 베드로와 제자들은 가슴이 써늘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22절에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간절히 예수님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는 원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시며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수취급을 당하게 되었으니 베드로는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다정하게 베드로를 타이르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니 네가 많이 놀랐구나.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너의 마음은 고맙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우선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성경을 보는 우리도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데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앞에서 칭찬을 듣고 좋아했을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서 얼마나 민망했을지는 쉽게 상상이 됩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까지 험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끼시던 제자 베드로의 마음을 헤집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십자가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귀한 존재였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향할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이들은 귀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 될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친하게 지내고 의리로 뭉쳐서 의기투합할 대상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마음가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류하였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 이 지구 위에서 함께 합시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을 갖기 위해 십자가로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오지 않고 땅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마음을 원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과는 관계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면 마음을 십자가로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을 십자가로 보낼 수 없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으며 예수님과의 관계 자체가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을 십자가로 보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말씀만 듣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있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예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아무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로 마음을 향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 대해 무데뽀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십자가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요인들을 막무가내로 뿌리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베드로를 향해서 너무하신다 싶을 정도로 냉혹한 태도를 취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의리와 따듯한 배려를 뿌리칠 정도의 무데뽀 정신이 없다면 세상을 뿌리칠 수도 없고 십자가로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나를 부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습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스승이셨고 세상에 대해서는 구세주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심을 통해 스승으로의 모습을 부인하십니다. 스승이라면 제자들의 어려움을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박사과정에서 지도교수와 학생과의 관계가 부자지간처럼 밀접했습니다. 지도교수가 박사논문을 쓰는 학생의 삶 전체를 떠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물론 요새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학과마다 분위기가 다를 것입니다. 단순히 강의와 학점에 묶인 관계를 스승과 제자라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스승이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스승으로 남기를 거부하십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은 우리의 삶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제가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또 자녀 앞에서는 아빠로써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빠든 세상이 만들어준 의식을 가진 채로는 결코 십자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향하기 위해 십자가로 간다는 것은 세상과의 모든 연관성이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단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탐심을 부인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이 만들어낸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의 의미입니다.
다만 십자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요인들은 삶 곳곳에 존재합니다. 자녀를 보면서 그냥 두었다가는 반드시 큰 일이 날 것만 같아 성공하는 삶을 위한 조언과 도움을 줘야 할 것만 같습니다. 몸에 기운이 없으면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서 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일단 발품을 팔아서라도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삶의 요인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데 동원된 너들입니다. 예수님께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이러한 대상이었습니다.
돈이 너의 위치에 있다면 돈과의 관계에서 ‘나’라는 의식이 생겨납니다. 돈이 많으면 부자로써의 의식을 갖게 되고 돈이 없으면 가난한 자로써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무데뽀로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스승으로써의 의식을 부인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해 무데뽀가 될 때에 십자가를 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장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를 믿는다면 꾸중 듣는 직원으로써의 의식을 버리고 무데뽀로 십자가를 향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23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 나간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계획 속에 나를 담고 계시다가 이 세상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우리는 탕자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이 세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들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 때에는 천년만년 행복하게 해로할 것을 기대합니다. 장사를 시작할 때에는 장사가 흥해서 만족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를 코스로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그 길이 우리가 따를 길이 되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야 될 하나님의 일은 바로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무엇을 바라고 이루려 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땅에서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돌아올 것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일까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육체를 통한 삶은 사람에게 허락된 기회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 것들보다도 더 먼저 더 많이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인격체라는 증거입니다. 인격체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보다 건강보다 자녀의 형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관계 맺은 대상들에 대해서 무데뽀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방법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좋아하고 그리워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보낸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멋들어진 삶을 살아보겠다고 열중한다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서 관계 맺던 모든 일들을 무데뽀로 끊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끊는 칼인 십자가 사건을 이루시기 위해 무데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십자가를 붙잡고 무데뽀로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는 의식을 죽여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마음을 잡아끌어서 하늘을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데뽀 정신으로 살다보면 신립 장군이 패배했던 것처럼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무데뽀 정신이 승리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자녀를 바라 볼 때에 부모로써의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배우자 앞에서 아내나 남편으로써의 의식을 가지고 되고, 직장에서는 사원으로써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재정 문제 앞에서는 돈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나의 의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허락한 ‘나’라는 의식을 가진 채로는 십자가를 붙들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데뽀로 세상을 끊어내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십자가를 붙들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또한 자녀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직장에 대해 돈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정으로 사랑으로 따스함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음이 세상에 붙잡혀 하늘을 향하지 못한다면 우정도 사랑도 따스함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해 무데뽀로 맞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민감한 나를 죽이고, 세상을 우선하려는 나를 죽이고, 세상에 대해 책임지려는 나를 죽이면서 마음을 하늘로 보낸다면, 무데뽀로 떨쳐버린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데뽀로 떨쳐버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성령이 임하시며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발목을 붙잡히는 내가 문제입니다. 신앙의 무데뽀 정신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붙들 수 없다면 예수님과 관계할 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무데뽀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향해 무데뽀의 정신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주는 나라는 의식을 막무가내로 뿌리치며 십자가 생활화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