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구역에서 대흥사 남북원 쪽으로 가려면 먼저 관음33 응신전을 거쳐야 한다
대흥사는 2009년 12월에 사적 제50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이 절은 426년(구이신왕 7)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과 “514년(법흥왕 1)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는 「죽미기」의 기록이 있다. 또한“895년(헌강왕 11)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으나 고려시대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신라 통일전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절을 신라가 자신들의 치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물 제1807호 해남 대흥사 천불전은 1811년(순조 11)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대흥사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로 가는 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고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咐囑)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7년(선조 40) 해남의 외딴 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 뒤,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현종 10)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 완호(玩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불전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기거하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인 대흥사 용화당(龍華堂)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一群)과 남원의 중앙부에 있는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衣)가 중건했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천불전에서 대웅보전으로 내려가는 구역에 연리근이 있는데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도 그 기록이 있다니 천 년의 이 절을 다 굽어보았을 생명이다
대흥사는 조선시대 배불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이다. 13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했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문신(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志安)이 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의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封),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 등이다.
13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승사인 백설당(白雪堂)·세심당(洗心堂)이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현종 6)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곳에서 서산대제 및 나라사랑을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수 존재한다.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