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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5
출애굽기 20장 13절
십계명의 다섯 번째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부모란 기본적으로 육신의 부모를 의미하지만 통치자나 선지자 등에게도 부모라는 명칭을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통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나의 부모만이 아니라 내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공경과 사랑과 충성을 보여야 할 것으로 해석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선한 교훈과 징계에 스스로 굴복하여 합당하게 복종해야 하고, 혹 그들의 약점과 부족함에 대해서는 인내로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섯 번째 계명을 살펴보겠는데, 출애굽기 20장 13절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6계명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제68문. 제6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엡5:28-29) 다른 사람의 생명을(왕상18:4) 보존하기 위한 합법적인 모든 노력들을 요구합니다. 제69문.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 이웃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거나 그런 것을 의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합니다(행16:28, 창9:6). 그러니까 6계명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으로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함부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함부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되는가? 창세기 9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할 이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말아야 할 이유,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까지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자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실 때 성경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9장에서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도록, 그리고 그 이유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한다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일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생명만 빼앗지 않으면 되는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6계명과 관련된 진의가 무엇인지를 밝히시는데, 21절과 22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만이 아니라 살인으로 연결되는 모든 분노, 악한 말 등도 금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6계명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105문입니다.
105문. 제6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나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행위로는 물론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도 내 이웃을 욕되게 하거나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죽이지 않고(창9:6, 레19:17-18, 마5:21-22, 26:52), 모든 복수심을 버리는 것이며(잠25:21-22, 마18:35, 롬12:19, 엡4:26),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을 해치거나 고의로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입니다(마4:7, 26:52, 롬13:11-14). 살인을 막기 위해서 통치자가 칼로 무장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창9:6, 출21:14, 롬13:4).
여기서 나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행위로는 물론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도 내 이웃을 욕되게 하거나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죽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외적인 살인만이 아니라 살인과 연관된 모든 내적인 것까지 금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으로 가면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이 형제 사이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 가게 되는 과정을 보면 5절에서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심으로 인해 안색이 변했다고 기록합니다. 6절에서는 이런 가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요, 분노가 낫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살인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지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게 아니라, 살인에 기여하는 모든 원인조차 금하시는 겁니다. 분노, 미움, 시기심, 복수심 등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살인과 관계된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에서 6계명에 대한 참된 의미를 드러내셨던 겁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6문은 보면 이 부분에 대하여 재차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6문. 그런데 이 계명은 오로지 살인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답. 살인을 금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시기, 미움, 분노, 복수심 등 살인의 뿌리가 되는 것을 그가 혐오하시며(시37:8, 잠14:30, 롬1:29, 12:19, 갈5:19-21, 약1:20, 요일2:9-11),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요일3:15).
몇몇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시편 37편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잠언 14장 3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야고보서 1장 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만큼 하나님은 살인을 불러 일으킬만한 시기, 미움, 분노, 복수심 등을 싫어하십니다. 심지어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9,10) 또 다른 구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 말씀 자체만 보면 누구도 예외 없이 어둠에 있는 자요, 영생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실 때 누가 이 말씀에서 예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요한일서의 말씀은 너희가 어둠이다,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에게는 이런 열매가 합당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쪽으로 가야 할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요리문답 105문을 보면 모든 복수심을 버릴 것을 말하는데, 복수심만이 아니라 106문에서 말하는 시기, 미움, 분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가 당하면 당한 만큼 돌려주고자 하는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수심입니다. 이런 복수심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설명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의도하신 바는 우리의 복수심을 제어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 또한 마태복음 5장에서 다루셨는데, 3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이 말씀이 개인적인 보복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결코 개인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고, 재판장에 판결에 따라 행하도록 하면서 과한 복수심을 제어할 목적으로 이런 법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생명 존중의 원리, 공의 시행의 원칙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의 본성이 내가 어떤 일을 당하면 당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크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이런 복수심까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제6계명은 나 자신을 해치거나 고의로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살인, 그것을 내가 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 하든 모든 외적인 살인과 살인과 관련된 내적인 것을 금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살인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회의를 느낍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동기 가운데 생명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져 있는데,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조차 우리는 받은 자로 있습니다. 가까운 원인으로 하자면 우리의 부모를 통해 나라는 생명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도 궁극적인 원인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내 것인 양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죄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면, 죽음을 향해 가던 그 길을 생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자살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해치거나 고의로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는다고 할 때 자해도 금합니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의도치 않게 자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너무 많이 먹어서 몸이 좋게 않게 된다든지, 아니면 다이어트라는 이유로 너무 먹지 않음으로 몸이 좋지 않게 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혹은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함으로 우리 몸을 해할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오락을 즐김으로 인해 우리 몸을 해할 수 있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6계명과 관련해 실질적인 몇 가지 예를 더 들자면, 낙태 그리고 안락사와 같은 일은 결코 기독교인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취하여 가시기 전까지 우리가 임의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좋지 못한 일로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검사를 통해 태어나기 전부터 장애를 지녔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치병으로 인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대로 안락사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내용에서 확인하겠지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할 수만 있다면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5문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살인을 막기 위해서 통치자가 칼로 무장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국가 위정자들에게 칼의 권세를 주셔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로마서 13장에서 잘 말씀해 줍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13:1-4)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국가 위정자에게 칼의 권세를 주셨다고 할 때 그 권세를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의 대부분이 칼의 권세를 통해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 있고, 또 그런 정신을 따라 오늘날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는 분들도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쪽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반대의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6계명 자체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도덕법인데, 칼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국가 위정자들이 살인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열어놓는다는 것은 약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구약에서 죽이라는 명령이 있고, 또 가나안 땅에서 전쟁할 때는 진멸하라는 명령도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율법 안에 도덕법만 있는 게 아니라, 의식법과 재판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재판법의 경우 유대 백성들 가운데서 시민적 질서나 통치, 그리고 외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들로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도록 한시적으로 주신 법입니다. 이 법 안에서는 한시적으로 죽이라는 명령이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출21:12). 부모를 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역시 죽일 것을 명하십니다(출21:15,17). 지금 우리나라는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간통을 한 경우에도 사형을 명하십니다(신22:24). 그러나 의식법도, 재판법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도덕법으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만 유효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요한복음 8장이 좀 더 분명하게 증거 하는데, 음행 중에 잡힌 여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거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이었나 하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다시금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자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모두가 다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구약에 보면 사형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5계명과 관련해서도 사형을, 6계명과 관련해서도 사형을, 7계명과 관련해서도 사형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형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형이 아니라 용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용서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의식법, 그리고 재판법이 폐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정신 아래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악한 일을 일삼았다 할지라도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 집행은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볼 때 굉장히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저런 사람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국민의 세금을 헛되게 사용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에 대하여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창세기 15장 16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그러니까 저들에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지만 그 죄가 가득 차면 심판을 하시는데, 그 심판을 누구를 통해 행하도록 하시느냐 하면 선민으로 부르신 이스라엘로 하여금 행하시게 하시는 겁니다. 즉 가나안 땅 진멸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지,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씀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전쟁인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런 죽음을 막기 위해 뜻하지 않게 총과 칼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는 괜찮은가? 일단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총과 칼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한다고 할 때 여기에 예외를 둘 수 있는가? 비록 전쟁을 일으킨 쪽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그때만큼은 예외로 둘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답하기에는 많은 부분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고민을 해 보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7문으로 넘어가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 살인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하지만 않으면 되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107문. 이런 방법으로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합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 미움, 분노를 금하시며, 동시에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마7:12, 22:39, 롬12:10), 인내, 화평, 온유, 자비, 그리고 모든 친절을 그에게 보이며(마5:3-12, 눅6:36, 롬12:10,18, 갈6:1-2, 골3:12, 벧전3:8), 할 수 있는 만큼 그를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게도 선을 행할 것을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출23:4-5, 잠25:21-22, 마5:44-45, 롬12:20-21).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외적인 살인만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거나 나 자신의 생명을 해하는 정도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을 금하시면서, 시기, 미움, 분노, 복수심 등 살인과 관련된 마음까지 금하십니다. 외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마음으로도 살인하지 않았다면 이 계명을 지킨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요리문답은 시기, 미움, 분노를 금하시면서, 동시에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 그리고 친절을 그에게 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그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합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는 쪽으로 있지, 우리를 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쪽으로 있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값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받은 그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이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화평도 있습니다. 온유도 있고, 자비도 있고, 친절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보이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리문답은 할 수 있는 만큼 그를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원수에게라도 선을 행할 것을 명령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살인하지 않으면 된다, 살인이라는 결과와 연결된 원인만 나타나지 않으면 된다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악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요, 나아가 원수라 할지라도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방식 중 하나는 하나님을 닮는 것인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해를 선인에게만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추십니다. 비를 의로운 자만이 아니라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십니다.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조차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희는 이방인과 구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가 아니냐! 그러므로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이고, 박해한다 할지라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0절과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을 이간다는 것은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에 악에 대하여 더 큰 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떤 면에서 이쪽이 더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다시 말해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선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던 겁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선을 행하는 그 자리만이 악이 들어올 수 없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선을 행하지 않는 자리는 언제나 악인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사람의 생명과 육체를 보존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행동으로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며, 완력이나 속임수로나 소홀히 함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몸에 상해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생각이나 의지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해를 바라서도 안 되며, 어떤 표시나 말로써도 그런 바람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본존하고 보호하여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복임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더불어 6계명과 관련해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영혼에 대한 부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단지 사람의 육체와 관련된 생명만 보존하면 되는가?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영혼의 문제까지 다룹니다. 즉 영혼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할 때 사역자들이 숭배 받는 목자들이 될 때, 그리고 양떼들을 양육할 수 없게 될 때, 혹은 그들에게 맡겨진 양 떼들을 먹이려고 하지 않고 나태해 질 때라고 설명합니다. 또는 주된 그들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하고, 어떤 필연성이나 합법적인 소명 없이 그 밖의 일로 바쁜 때라고 설명합니다(잠28:19, 겔3:18, 렘48:10, 사62:6, 벧전5::2, 행20:28). 목사만이 아니라 성도와 관련된 내용도 있는데, 지식이 없는 모든 사람들, 특히 (계명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공식적인 수단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 범죄에 대한 공모자가 될 수 있다(잠8:35, 호4:6)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할 때 그 말씀이 참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로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겠는데, 우르시누스는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에 담겨 뜻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둘째, 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살해할 욕망을 표현하거나 나타내지 말라. 셋째, 너는 이런 욕망을 실행에 옮기지 말라. 이 모든 것과 반대되는 것은 무엇인가? 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바람으로, 이 바람을 나타냄으로, 또 이 바람을 실행함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