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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생활화의 정석과 효과>의 줄거리: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집과 전토는 재물 전체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현세에서 백배로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날까요? 그리고 가족을 백배로 받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생활화의 정석과 효과
(마가복음 10:28~34)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생활화의 정석과 효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생활화의 정석과 효과’
대학입시를 준비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수학의 정석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생활화에도 정석이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생활화를 정석대로 했을 때에 나타나는 현장효과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복하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버릴 목록을 묶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재산이었던 집과 전토는 재물 일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모와 형제자매의 가족관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른 역본에서는 여기에 아내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남편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유는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모두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10장 39절에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고 하셨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버려야 될 대상에 목숨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길 수 있는 대상이라면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28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대상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일이 30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왜 하필이면 백 배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셨느냐는 점입니다. 학자들도 이 점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집과 전토 등으로 대표되고 있는 재물에 관해서는 백배나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반갑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을 버리면 백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투자는 달리 없습니다. 100% 이득을 볼 때에 본전이니까 백배가 되기 위해서는 10,000%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관점으로 백배를 언급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런 구절들을 과장이겠거니 여기고 넘어갈 수만도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넘어갑니다. 십자가생활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십자가생활화의 현장효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백배가 무슨 뜻이지만 알아도 삶의 문제가 하나도 남지 않는 상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생각만치 어려운 의미도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 그럴 때에 현세에서는 버린 것의 백배를 얻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얻게 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32절부터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과정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라면 소중히 여기는 자녀에 대한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자녀에게 줄 마음이 죽었으니 자녀를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녀에게 마음을 쏟아 붓고 있다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따르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적어도 자녀 앞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배우자가 또한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을 죽일 수 없다면 배우자 앞에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십자가생활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나 배우자 혹은 그 밖의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백배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일까요?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반드시 그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무엇인가와 관계를 하게 됩니다. 배우자와 관계할 때에는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분량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분량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부자 청년을 예로 들어보자면 재물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욕구하게 되는 이유는 배우자나 자녀 혹은 재물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백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욕구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재물로 마음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그 기대치의 백배에 해당하는 채움이 마음에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예수님을 따를 때에 이들로부터 채워지기를 바랐던 기대치의 백배나 되는 채움이 주어지게 됩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면 배우자에게 기대했던 것의 백배나 되는 채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완전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만족하고 기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더 이상 배우자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은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지고 나면 기쁨으로 배우자를 대하게 됩니다. 재물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 앞에서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배당에서 혼자 해나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들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재물이 줄 수 있으리라 믿어지던 기쁨과 만족의백 배가 주어지게 됩니다. 완전히 채워졌기에 더 이상 재물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가 투입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아무 효과도 나타날 수 없다면 정말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천국에 가기만을 바라거나 다른 종교처럼 세상에서 잘되고 확장되기만을 바라는 것도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갖고 있는 것을 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을 더 늘리고, 위치를 더 확고히 하며, 상황을 더 개선시키기 위해 신의 힘을 빌리고자 종교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과정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생겨날 때에 세상의 대상들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기대치의 백배나 되는 기쁨과 만족을 얻는 효과 또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온전하게 채워졌기에 그 대상에 대해서 더는 추구함이 없이 관계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해의 원인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나타나는 삶의 방식은 세상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75억 인구가 있지만 세상에 대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어있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욕구를 채우고자 세상의 대상으로부터 채움을 기대합니다. 세상의 대상에 대해 아무런 바람을 갖지 않는 욕구가 죽어버린 상태가 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마찰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사람들 눈 밖에 나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이러한 박해가 부수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백 배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생활화의 정석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백 배의 말씀을 정말이라고 믿는다면 돈 앞에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 앞에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을 만큼 백 배의 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세상의 대상들에 대한 목록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 또한 그 목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은 가족이나 재산 같은 굵직굵직한 가치들 외에도 사소한 것들에도 이끌리고 정복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목록에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 버림의 문제는 아쉽게 느껴집니다. 그냥 가진 것을 더 가지면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버림의 문제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들은 저절로 버려지게 되고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대상들 앞에서도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장님이 사업장에서 해야 하는 일은 사업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에 해야 하는 일은 좋은 아내나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 앞에서도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학생이 학교에 가서 해야 할 일 또한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대통령 또한 나라를 잘 이끌어서 훌륭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들 앞에서 예수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십자가생활화의 정석입니다.
어제 십자가 복음 말씀을 들으시는 목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십자가생활화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될 때에 교인들이 식상해 할 것을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를 예로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82년도에 결혼을 했으니 3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아내를 부를 때에 여보나 자기 혹은 무진이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의 이름을 부릅니다. 38년 동안 그 이름을 몇 백만 번 몇 천만 번이나 불렀을지는 상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식상하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를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생활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생활화가 식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말이 가리키는 실체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생활화의 효과를 경험하고 산다면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말하더라도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생활화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일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생활화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정석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을 따라서 실천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본문 말씀에 나타난 목록뿐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상들 앞에서 예수 믿기가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생활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십자가생활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입니다.
십자가생활화의 방법은 그동안 계속해서 제시되었습니다. 저는 즐거움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듣는 분들 중에는 식상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십자가생활화를 체험하시는 분들이라면 결코 식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듣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십자가생활화에 대한 경험담입니다. 그보다 귀한 격려는 없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들 앞에서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던 이유는 바로 나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대상들 앞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물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 직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다음 단계로 내 몸과 몸이 처해있는 주변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 주권자의 위치에 서서 판단하고 분석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스스로 주권자의 위치에 섰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나옵니다. 이러한 불평불만은 스스로 주권자가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 하든지 개선시키고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 괴롭고 힘들고 짜증나고 불행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스스로 주권자의 자리에 오른 결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세상의 대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주권자의 자리에서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그동안 이루어지던 주권자 놀이가 끝나게 되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느끼고 보게 됩니다. 스스로 주권자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촘촘히 틈새 없이 이 땅에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의 그물망에 구멍을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그러한 구멍 내기의 삶은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변은 물론이고 몸속의 오장육부와 뼛속까지 임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권자 되심을 보는 것이 십자가생활화 정석의 첫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십자가생활화가 안 된다고 하고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두 번째 단계에서 걸려 넘어지십니다. 죽음의 다음 단계는 부활의 단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더 이상 마음 채움을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에서 재물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죽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해 마음이 채워지기를 욕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 채워짐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마음은 비어있는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바로 부활의 단계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언제나 채워지려는 욕구가 발동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욕구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방향이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면 다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상태로 되돌아가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생활화를 시도하더라도 효과는 전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재물로 인해 채워지던 욕구에 대해 죽는 첫 번째 단계를 지났다면 마땅히 부활에도 참여하는 두 번째 단계가 이루어져서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생활화가 첫 번째 단계에서 중단된다면 세상을 바라봄이 다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온 상태를 이용하고자 하는 바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재물을 늘리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재물을 늘려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악한 상황입니다. 이전에는 재물에 대해서만 스스로 주권자가 되려고 했다면, 이제는 재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가 하나님에 대해 살아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죽었다가 세상에 대해 더 강하게 살아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21절을 보면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세상을 바라볼 바에야 차라리 십자가생활화를 안함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단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동참하였다면 반드시 부활에도 동참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붙잡혔음을 믿고 안심하고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 입장에서도 내가 주관하고자 할 때보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편이 훨씬 잘된 일입니다. 재물이나 가족에 대해서 나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 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승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승천은 곧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소망이라 일컫습니다. 십자가생활화를 어려워하는 분들은 대부분 이 소망의 단계에서 실족합니다.
평강과 기쁨은 입력하면 출력되는 기계처럼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 소망의 기간이 은혜이고 축복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정말로 좋아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좋아해서 그리워하고 애타게 갈망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천사들은 사람과 같은 피조물이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뵙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나의 유일한 채움과 소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해볼 수 있는 기회가 소망입니다.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좋으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극한의 좋으심을 보는 동안 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해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해 볼 소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신 예수님의 방향을 마음으로 따라가면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채우심이 되고 또 나를 투과하시는 완벽한 일체 됨의 사랑의 단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생활화의 정석입니다. 십자가생활화를 통해 이 소망의 단계가 굳건해질 때에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겨졌던 대상들이 주리라 믿었던 기쁨과 만족이 백 배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의 단계에서 예수님과 사도들과 스데반 집사님 등을 통해 드러났던 절대 평강의 순간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투과되시고 일체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과 일체됨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생활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또 다시 죽었음을 인정하고 부활에 참여하여 소망을 굳건히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생활화의 정석입니다. 십자가생활화를 통해 소망을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은혜로운 역사이기에 결코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은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에 대한 소망이 아닌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언젠가는 돈을 벌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좋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고, 언젠가는 성공하고 형통할 것이고,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언젠가는 긍정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던 기쁨의 기대치보다 백 배로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십자가생활화의 정석은 예수 믿기와 예수 따라가기입니다. 예수 믿기는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이나 기도원에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 앞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대상들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리고 내가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대상들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부활의 단계로 진행할 수 없다면 세상을 바라보기는 다시 시작되고 오히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자가 되려하는 죄악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지독한 타락이고 영멸의 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향하셨음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의 방향을 하늘로 향하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소망하고 나가는 것이 십자가생활화의 완결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대상들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치의 기쁨과 만족은 백 배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기쁨과 만족을 위해 전혀 필요치 않는 존재들이 될 뿐더러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해 전적으로 주관하시며 당신의 뜻을 관철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 삶의 원리는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반복해 나가는 것이 십자가생활화입니다. 저는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여러분께 이 말씀을 반복해서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십자가생활화를 통해 이 말씀이 뜻하는 실체의 상황을 날마다 경험하시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을 끄는 소중한 것들 앞에서 십자가생활화를 통한 예수 믿기와 따르기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백 백의 기쁨이 하늘로부터 주어짐을 느끼게 하시며 소망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약속된 절대 평강의 자리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의 대상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