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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심리패턴을 알면 길이 열린다>의 줄거리:
소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실제로는 복음의 심리학 개론쯤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알게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반응하는 패턴을 알게 하십니다. 이 패턴을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으면 막힘과 걸림이 없이 하늘과 땅과 사방으로 사통팔달하는 길이 보이고 열립니다.
심리 패턴을 알면 길이 열린다
(누가복음 8:4~15)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심리 패턴을 알면 길이 열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심리 패턴을 알면 길이 열린다’
제목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예를 하나 들어보고자 합니다. 직장에서 김 과장님에게 이유 없는 냉대를 받았습니다. 이리 따져보고 저리 따져보아도 왜 이렇게 냉대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때 길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냉대하는 김 과장님에게 담판을 짓듯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해결을 하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김 과장님의 냉대에 반응하고자 하는 나의 심리 패턴을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결의 길도 열리게 됩니다. 문제 해결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나를 냉대하는 김 과장님이 아닙니다. 김 과장님에게 반응하는 나의 심리 패턴 속에 답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내 마음이 옥토가 되는 것이 바로 해결의 방법입니다. 나를 냉대하는 김 과장님 앞에서 나의 심리 패턴이 길가이거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과 같다면 문제의 해결은 어렵습니다. 세상적인 해결방식을 동원하여 술이라도 사주고 대화를 하면서 풀어보고자 하여도 마음의 상태가 이와 같다면 궁극적 해결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김 과장님에게 반응하고자 하는 나의 심리 패턴을 읽어내고 옥토의 패턴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중요시 여겨지는 것은 소통입니다. 대화로 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대하는 나의 심리 패턴이 문제입니다. 배우자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나의 마음이 옥토가 될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재정문제가 있을 때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마음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재정문제에 대해 반응하는 나의 심리 패턴을 읽어내고 옥토의 패턴으로 바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정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어떤 심리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를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옥토적 심리 패턴의 상태로 바꾸면 재정문제의 해결의 길 또한 저절로 열리게 됩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이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진다면 옥토에 가까운 마음이라 여겨집니다. 반대로 도무지 수긍이 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김 과장님이 냉대하는 것이 문제라면 단도직입적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함으로써 분명히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 과장님이 나를 냉대하는 이유 자체에 대한 이해가 틀렸기에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더라도 온전한 해결에 이르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냉대하는 김 과장님도 이유를 모르고 나 또한 이유를 모르는데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가짜 이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그 가짜 이유들을 풀었다고 하더라도 가짜 관계이기에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건강문제를 붙잡고 해결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먼저 건강문제에 반응하는 나의 심리 패턴을 읽어내고 옥토의 패턴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길도 열리게 됩니다.
본문 9절에서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의미를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전에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주십니다.
10절을 보면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은 뉴스에 나오는 사실들처럼 공개되거나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헬라어로 뮈스테리아(μυστήρια)로써 “가두다, 닫다, 덮다”라는 뜻의 뮈오(μύ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열어서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인간과 나 자신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비밀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특별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비밀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아서 굉장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때 비밀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나와 분명한 관계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비밀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인데 가려지고 덮어지고 닫혀져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 비밀을 계속해서 접해왔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접해왔기에 비밀이 비밀처럼 여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비밀은 바로 최고이자 궁극적으로 좋은 유일한 대상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늘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밀로 느끼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빛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어떤 가치도 마음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조차 싫고 거부감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이나 돈이나 형통을 좋다고 하는 이유는 건강이나 돈이나 형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좋다고 느낍니다. 건강이 나빠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면 불행하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비밀을 안다면 아픈 바람에 마음이 다른 일에 신경 쓸 수도 없고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없음이 오히려 은혜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최고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평생 고칠 수 없는 지병을 안고 살면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대로 잘되고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의 비밀은 밝혀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좋으심을 설명하는 말씀들도 비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표현은 비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고 하셨고, 45~46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좋으심은 비유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3절에 하나님 보좌가 묘사됩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도 그 아름다움을 각종 보석과 무지개로 비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열어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표현하는 비유를 들을 때마다 점점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밀을 열어주시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좋으심을 비유로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건강이나 돈이나 형통처럼 체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하여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반응하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광신도라 부르고 유난을 떤다며 욕합니다. 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서 건강을 주고 돈을 주고 형통을 주니 좋아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자체를 좋아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언어로 표현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비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도록 비밀이 허락된 사람은 그러한 비유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비밀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에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을 담고 있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특정한 심리적 패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11절을 보면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의미의 체계가 다를 뿐입니다. 이에 대해 마음속 보물에서 말이 나오게 된다는 주제를 통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또한 전달되게 됩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언어를 쓸 때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원되었을 때에는 의미의 체계가 다릅니다.
언어는 마음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가치로부터 의미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강릉의 18만 시민이 오봉댐을 수원지로 하여 그 물을 상수도로 받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성공 실패 형통 좌절 기쁨 슬픔 등의 단어들은 궁극적인 가치로부터 의미를 받습니다. 오봉댐에서 18만 가가호호에 물이 흘러 들어가듯이 마음에서 궁극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대상으로부터 언어의 의미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써도 돈이라는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모든 언어는 돈에 대한 생각이 담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또한 최고의 가치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에게서는 모든 언어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담기게 됩니다. 똑같은 성공이라는 단어라도 돈을 최고로 가진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많이 갖는 것이 성공입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끝을 냈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원들과 유대인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대상이 제거된 성공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건은 성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을 성공으로 이해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셨기에 유대인들의 성공이 실패가 되고, 실패라고 여겨진 죽음이 성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의미가 뒤집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체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성공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하루 장사하여 돈을 버는 것을 성공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장사를 하며 하나님을 얼마나 벌었느냐가 성공의 기준입니다. 장사하는 영업장에서 내 마음의 심리 패턴이 옥토였느냐를 통해 성공을 가늠하고, 세상에 끌리는 죄적 체질과 얼마나 싸워 이겼느냐가 성공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느껴진다면 하나님이라는 수원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옥토를 제외한 세 가지 패턴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유대지방의 농부들은 씨를 뿌릴 때에 바람에 흩어 뿌리거나 씨를 담은 자루에 구멍을 내어 나귀에 올려 뿌렸습니다. 그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게 되고 더러는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며 또 더러는 가시덤불 밭에 뿌려지게 됩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길처럼 반들반들해진 밭과 밭 사이의 고랑입니다. 이런 곳에 씨가 뿌려지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싹이 틀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12절에서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봉댐에서 나온 물이 강릉시의 가가호호로 흘러들어오듯이 우리의 언어 체계는 최고로 여기는 가치로부터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부여되게 됩니다. 이러한 언어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에는 돈과 연관된 의미가 담기게 됩니다. 돈을 중심으로 그물망처럼 언어 체계가 짜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최고로 하는 언어 체계와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언어 체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체계가 깨질 수 없다면 믿음은 올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교회라는 단어를 주의하여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단어는 예배당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체를 의미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잘못되었기에 예배당을 교회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라든지 ‘거룩’이라는 단어 등이 이렇게 잘못된 인식으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번제를 들으시는 분들께서는 제가 이러한 단어의 의미를 가능한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언어 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기껏 복음을 받아들였어도 의미의 충돌이 일어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길가의 상태는 하늘의 비밀을 담고 있는 언어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상태이기에 피부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의아해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설교를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 또한 정말로 설교가 어려운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집사님께서 저에게 20달러 지폐를 주셨습니다. 고춧가루 같은 것도 묻어있는 더러운 상태의 지폐였습니다. 이 집사님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분이 설교를 들으시고는 감사하다며 20달러를 목사님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식당일을 하시던 중에 돈을 꺼내시느라 양념이 묻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헌금을 하신 분은 밀입국자로 캐나다에 들어오신 분입니다. 당연히 예배당 조직에 속해 보신적도 없었고 기독교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시며 십자가의 의미 또한 알지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쉽게 말해 배우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설교를 처음 들을 때부터 빛이 보이고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좌골신경통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말씀을 듣다보니 마음이 즐거워서 어느덧 신경통까지 나아서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분은 예배당 조직에서 생활해보신 적도 없으며 세례를 받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의례적인 헌금의 방식도 모르셨기에 그저 20달러 지폐 한 장을 집사님을 통하여 저에게 전달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분께서 설교를 들으실 수 있으셨던 것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소양의 문제도 아닙니다. 평생 예배당을 다녔어도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를 받지도 못합니다. 길가 같은 마음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가 같은 마음에 대해서는 다른 세 마음 상태와 다르게 마귀가 언급됩니다.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딱딱해졌다는 것은 마귀의 언어에 대해서는 옥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돈이 최고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다. 자녀의 형통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마귀의 언어에 대하여 옥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느껴지고, 강 건너 일처럼 무관심하게 느껴지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전설이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면 큰일 난 것입니다. 그나마도 이 설교를 들으시며 큰일이 났음을 느낄 수 있으면 하나님이 최고라는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느낌조차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길가의 상태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르쳐준 언어의 의미체계는 세상을 최고로 여기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세상 것이 최고라 속이는 언어의 의미체계를 허물어나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가 좋다고 느껴질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연관하여 만들어진 의미체계를 허물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 말씀의 의미체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체험을 꼭 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타난 나머지 세 가지 심리 패턴은 주일 설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리 패턴에 생사가 달렸음을 실감할 수 있도록 성령의 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비밀인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체감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세상을 좋다고 여기는 언어의 의미체계를 허물어나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