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본격적인 자유의지 논쟁은 5세기 초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펠라기우스(Pelagius)에게서 나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수사학에 심취해 한때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에 매료되었다가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심을 경험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운명적으로 집어 들고 읽었다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13장 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그때 그는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사라지게 할 “확고 불변한 빛 한줄기”를 체험했고, 그 후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펠라기우스는 로마에 거주하던 영국인이었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비도덕성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인간의 책임성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듯이 보이는 아우구스티누스식의 신학적 해석에 반발하면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되었다.
자유의지 논쟁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라는 신학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출발점이 되는 주제였다. 이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가 공통으로 인정한 것은 타락 전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후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주장했고, 펠라기우스는 아담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타락 이후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비교하면 [표10]와 같다.
[표10]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비교
| 아우구스티누스 | 펠라기우스 |
타락 이후 | 전적 타락 인정, 자유의지 상실 | 전적 타락 부인, 자유의지 보존 |
자유의지와 선택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지만 인간의 뜻대로 자유의지를 행할 수 없다.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올바른 선택의 자유다. | 인간의 힘에 의지하여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 아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 |
의지와 능력 | 의지와 능력은 서로 다르다. | 의지와 능력은 서로 같다. |
은혜와 의지 | 은혜 안에서만 의지의 행사가 가능하다. 의지를 성취시키는 능력은 은혜의 선물이다. | 인간의 본성 안에서 의지의 행사가 가능하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가장 큰 차이는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접시 두 개가 달린 천칭을 비유로 들었는데, 한 쪽 접시에 악이라는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저울은 악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선과 악이라는 두 접시는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데, 이미 인간은 원죄로 인해 악의 접시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균형과 자유의지의 파괴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5장 12절을 인용하여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 있었으며, 우리는 모두 아담이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원천적으로 상실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는 신적 용어다.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만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예정된 것”이었다. 인간의 의지가 신을 향해 움직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따라서 죄인이 의롭다고 간주되는 근거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수여”되고 믿는 자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에게는 그 믿음까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반대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범죄와 타락이 후손에게 전가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일 뿐, 모든 인류는 각자가 자기의 죄를 지을 뿐이다. 원죄가 전가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처음 상태처럼 무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아담에게 소급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care)”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존재한다. 그는 “옮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능력(bonum naturae)을 찬양”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천적 선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길을 가면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인간 중심적 신학은 기독교신학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거나 인정된 적이 없었다. 이후 기독교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끊임없이 경계해왔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39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