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년이 지나고 졸업할 날이 다가왔다. 학생시절에는 빨리 졸업하여 목회만 전력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졸업을 한다고 하니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마치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두는 것 같았다. 어느 교수는 신학교가 공부를 다 마치게 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신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기숙사 복도를 걸어가면, 어느 방에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어느 방에서는 전라도 사투리가 요란스러웠다. 마치 전국을 순회하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지역별로 배구대회를 열기도 했고, 함께 모여서 응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가 토요일이 되면, 우리는 각 지역교회로 나가 교회를 섬기고 다시 월요일에 돌아왔다. 그러면 서로 자신들의 본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고 받으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래서 기숙사는 각처의 뉴스가 전해지는 “중앙방송국”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내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보통 월요일 밤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새벽, 오전, 오후, 밤 집회로 이어졌다. 말씀을 사모하는 학생들은 가능한 한 매시간 참석했다.
우리 학급은 50여 명이 입학을 했는데, 졸업할 때는 39명만 남았다. 1957년 3월 29일에 졸업한 제1회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갑수(金甲洙), 남용순(南容舜), 박경배(朴敬培), 이덕근(李德根), 이종철(李鐘哲), 김효열(金孝烈), 임일준(任日準), 조병진(趙炳眞), 전문자(田文子), 이용철(李庸轍), 김은규(金殷圭), 이재규(李在奎), 안승수(安承秀), 이윤상(李允相), 임병찬(林秉燦), 이덕흥(李德興), 권찬수(權燦秀), 김용덕(金鎔德), 김유도(金柳道), 박봉조(朴奉祚), 김영진(金榮鎭), 김종률(金鐘律), 주재식(周在植), 이민태(李敏泰), 김기철(金基哲), 최내규(崔來圭), 이기복(李起福), 이진호(李鎭浩), 한성진(韓成進), 이대직(李大稙), 이병욱(李炳旭), 김순길(金順吉), 최완식(崔完植), 임필철(林弼喆), 이숙희(李淑嬉), 박상설(朴相卨), 황무등(黃武騰), 임원철(林元喆), 이순구(李順九) 등이다.
우리들의 졸업식은 목동의 새 캠퍼스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영예의 성적우수상은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내가 어떻게 이런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의외였다. 동급생 가운데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 당시 교사나 관료 경력을 가진 사람도 많았고, 현직 전도사도 여럿 있었다. 이런 쟁쟁한 인재들 가운데 수석의 영예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동기생 가운데 뜻이 맞는 몇 사람이 신학 및 학문에 관한 논평을 하며 친교를 나누다가 헤어지기 전에 기념으로 호(號)를 하나씩 만들어 가지기로 했다. 임일준(任日準)이라는 학생이 나에게 “김갑수는 바다와 같이 마음이 넓다”는 평과 함께 “관해”(觀海)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전직 면장이었는데, 그 당시는 장로교 장로였다. 나는 과분한 평을 받았으나, 앞으로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고 기쁘게 그 호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 나는 “관해”라는 호를 애용했다. 서도(書道)를 하면서 “관해”를 쓸 때마다 그 마음을 새롭게 다짐했다.
“바다를 바라보라.” 푸르다 못해 검은 바다를 아무 생각없이 바라볼 때면,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동해 바다에서 일출을 보면서, 타오르는 해를 밀어올리는 바다의 크고 위대한 힘에 전율한다. 하지만 아직 나의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지 못하니, 호를 대할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