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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始齋集] 解題
李源杰
1. 문집 개요
[근시재집]은 조선 중기의 안동 예안의 의병장이며 선비인 김해(金垓:1555-1593)의 시문집(목판본 4권 1책)이다.
2. 근시재의 생애
근시재의 생애를 인정 기술문인 유사․행장․묘갈명을 근거로 하여 정리한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자는 달원(達遠)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그는 1555년(명종 10)에 예안면 오천리에서 읍청정 김부의(金富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일 만에 모친을 여의고 백부인 후조당에 의해 양육되었다. 후일 자식이 없던 백부의 후사를 이었다.
그가 겨우 5,6세 때 병을 앓아 유모가 안고 소변을 보게 하자 그는 화를 내며 “어찌 사당을 향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독서할 때는 몸을 삼가 오직 고례를 좋아하였는데 정축년(1577)에 후조공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치르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가정의 훈계를 받으면서 퇴계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그는 그 순수한 자질로 널리 배워 요약하는 학문을 겸비하였다. 그는 서실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속히 기록하고 모른 것이 있으면 월천‧학봉‧서애선생에게 질문하였다. 그는 또 예서를 좋아하여 언제나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와 그 예문이 옳고 그른 것과 역대의 치란을 논하여 터득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는 시문을 지을 때는 전아하고 명료하게 하였고, 문채와 본질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중 사칠변(四七辨)은 퇴계의 이발기발(理發氣發)의 요지를 발명하고 뒷날 유학자들이 좋으면 합하고 싫으면 떠나는 병통을 배척하였으므로 이것은 더욱 백세(百世)가 지나도 의심 한 점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천문(天文)‧지지(地誌)‧병법(兵法)‧의서(醫書)‧복서(卜筮) 등도 날마다 공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 규모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학문이 밖으로 배어나와 날마다 하는 일은 부모를 섬길 때는 지극히 효성하고 선조를 받든 것은 지성스러웠다. 종족을 대할 때는 종족들이 그를 그리워하였고, 그 고을에서 교육할 때는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실을 법으로 삼았으며 혼례 등에 있어서도 친히 맞이하는 법을 복원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대할 때도 재물 나누어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므로 그가 수고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연히 복종하였고 바라지 않아도 칭찬이 자자하였다.
임오년(1582)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너무 심하게 슬퍼하여 사람들은 공의 효성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정해년(1587)에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음 해에 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고, 곧 사마시에 합격하고 사직하였다. 다음 해에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에 제수되었는데, 곧 별시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행의(行義)로 명성을 떨쳐 영남의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 조정의 등용이 늦어졌다가 급제하게 되자 조정의 관리들은 모두 축하를 하였다. 괴원(槐阮)에 선임되었다가 곧 예문관한림(藝文館翰林)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동료들이 사초(史草)를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그는 실제로 그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 그 죄인 중 한 사람이 공을 무고하였기 때문에 잡으러 오는 관리가 들이닥치자 고을과 집안사람 사람들이 모두 놀랐지만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감옥에 갇혔다가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만 삭탈당하고 돌아왔다.
그 후 4년이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왜적이 창궐하여 국왕이 몽진하였다. 이때 고향에 있던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맹세하고 의병을 일으키니 여러 의병들이 공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공의 부서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정백(李庭栢)과 배용길(裴龍吉)을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임명하여 의병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당시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내용이 비분강개하여 그 서신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그는 안동에 진지를 설치하고 예천(醴泉)에 있는 적도를 압박하고, 또 오랑캐를 생포하여 관찰사에게 바쳤다. 여러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의리로 저항하여 왜적들을 섬멸하고자 하나 그 성패를 알 수 없으니 오직 한 번 죽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밀양(密陽)으로 진영을 옮겼을 때 단인(端人) 이씨(李氏)가 세상을 마쳤다. 아직 초상을 치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고향으로 가서 하룻밤을 잔 뒤에 다시 돌아왔다. 군영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이 생겨 경주(慶州)에서 6월 19일에 39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모든 군병들은 우레소리처럼 통곡하였고 그 소문을 들은 원근의 사람들은 친척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을미년(1595)에 선조는 그에게 홍문관수찬을 증직하여 그의 충성을 포상하였다. 그의 묘소는 세 번 옮겼다가 마침내 안동(安東) 금학산(金鶴山)의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재(宰)의 딸이며 의(漪)의 손녀이자 퇴계선생의 조카 손녀이다. 부인은 정숙하고 유순하여 친족들이 모두 그의 행실에 감복하였으며 공보다 1개월 먼저 세상을 마치니 향년 42세였으며 공의 묘소에 함께 안장하였다. 그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광계(光繼)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고 집의(執義)에 증직되었고, 차남은 광실(光實)이며, 3남 광보(光輔)는 성균관 생원이고, 4남은 광악(光岳)이다. 그리고 세 사위는 도사(都事) 박회무(朴檜茂)와 참봉 유암(柳嵓), 참봉 이시명(李時明)이다.
3. 문집의 체제
[근시재집]은 1783년(정조 7)에 목판본 4권으로 간행되었다. 서문은 조덕린(趙德隣)이 썼다. 권1은 시(詩)로 편집되어 있다. 사(辭) 3편, 5언고시 16제(題), 7언고시 1제, 5언율시 8제, 7언율시 8제, 5언절구 24제, 7언절구 54제가 실려 있다.
권2에 서(書) 4편(南致利․南致亨3편), 권3에 서(書) 37편(趙穆8․雪月堂3․金誠一3․金圻2․或人2․郭定甫12․權參奉1․裵龍吉1․任屹1․全景業1․全景迪2․琴彦慎1), 잡저(雜著) 3편(理氣說․深衣辨․題孝行錄後), 제문(祭文) 2편(權定甫․山南從叔父), 표(表) 1편, 전(箋) 1편, 계(啓) 1편(金圻), 유사(遺事) 2편(先考成均生員府君․伯考成均生員府君), 묘지(墓誌) 2편(伯考成均生員府君․端人光州金氏)이 수록되어 있다.
권4는 부록(附錄)으로, 행장(李象靖撰), 묘갈명(蔡濟恭撰), 묘지명(李玄逸撰), 가장(金光繼撰 ), 전(金圻), 제문(祭文) 8편(趙穆․朴惺2․裵龍吉․金圻․辛敬立․李庭栢․校院儒生), 만사(輓詞) 2편(趙穆․申之悌) 및 발문(跋文) 2편(李簠․丁範祖)이 수록되어 있다.
4. 문집의 내용
[근시재집]에는 110여 수의 시와 비교적 다양한 산문과 그의 요절을 대도하는 만사와, 제문으로 편집되어 있다. 먼저 권1에 수록된 시의 내용을 개괄하기로 한다. 다음 시는 ‘추풍사’에 화답해 지은 시에 수신과 정심을 추구하는 미학이 담겨 있다. 근시재의 유학자적인 면모와 내면 정서가 그려져 있다.
푸른솔여전히울창하고많은잎흩들리고 靑松鬱鬱兮衆葉飛
새들모여재잘거리고외로운학돌아가네 群鳥啾啾兮獨鶴歸
옛 사람생각해아름다운자취따르며 思古人兮襲遺芳
내 뜻을곧게하여언제나잊지않겠네 謇余志兮終難忘
사수(洙泗)를추앙하고낙하(洛河)를따르며 仰洙泗兮洛與河
진리근원찾아물결을거슬러올라가리라 覓眞源兮泝流波
장검어루만지며호탕하게노래부르니 撫長劍兮發浩歌
천지가운데우뚝서니 상념도 많아 立天地兮我思多
때에 따라힘써노력하리니 늙으면어찌하리 勉須及時兮老將何 (和秋風辭)
작가는 서두에서 푸른 소나무가 울창함을 자랑하고 새들이 울고 학이 날개를 펴서 날아가는 정경을 묘사하였다. 이어 고인을 생각해 어진 행적을 추념하여 실천하며 그것을 푯대로 삼아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와 함께 정통 유학의 정맥을 따라 가겠다는 포부도 드러내었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진리의 근원을 따라 가겠다고 했다. 장검을 어루만지며 의지를 굳게 하고 호탕한 노래를 부르면서 호연지기를 함양시킨다. 문득 생각이 맑아지고 정심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부지런히 학문을 익힐 것을 다짐한다. 문집에 이러한 시 경향의 작품들이 많다.
특히, 예설 관련 문제를 두고 사우 간에 의견 교환을 한 편지 글 등에서 근시재의 유학자로서의 면모와 수신과 정심을 지향하는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근시재는 다양한 향리 사우들과의 교유 활동을 통해 우의를 다지고 근신과 수신을 제고하려고 했던 흔적을 관련 시를 통해 볼 수 있다. 침류정에서 조목에게 차운한 시이다. 향리 선배 유학자와 교유 활동을 통해 유학자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를 삼는 유익함이 있다.
들녘절간종소리멎고 野寺疎鍾歇
아득한하늘에달이오르네 遙空桂魄生
저문빛멀리나무에내리고 暮光連遠樹
가을그림자정자에가득하여라 秋影滿虛亭
조용히푸른 산 마주하여 靜對靑山面
한가로이백조와정을나누네 閒分白鳥情
이 풍류 천년이지나도 風流千載後
오늘같이좋은모임이뤄지길 佳會此時成 (枕流亭謹次月川丈)
들판의 절간 종소리도 멈춘 저녁 무렵이다. 어느덧 달이 솟고 어둠이 먼 곳 나무 가지에도 깃든다. 정자에는 가을 정취가 가득하게 감돈다. 푸른 산을 대하노라니 백조가 노니는 광경을 보고 그와 동화된다. 자연 친화와 자연 합일의 경지를 된 심정을 표현한다. 천 년 세월이 지나도 오늘의 좋은 풍류는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한 희망 사항을 시에 담아 전하였다. 향리 선배인 월천과의 친밀도 있는 내적인 은근함을 위와 같이 다정다감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러한 교유 활동을 통해 근시재는 향토 선현의 유학지적 기풍을 체득하고 증진시키는데 바탕을 삼았던 바이다. 이러한 근시재의 성리학적인 기풍의 시는 산수자연의 흥취를 담는 시를 표현한 것으로 연결되고 있다. 뱃놀이 흥을 담은 시이다.
눈썹같은반달이서산에기울자 眉月低西嶺
저녁의 마을엔 푸른연기 일어나네 蒼煙起暮村
작은배타고만경창파 노니시던 곳 扁舟游萬頃
노저은흔적만강물에남아있소 楺櫓一江痕 (濯纓泛舟奉贈卓爾)
탁영담에서 뱃놀이 하며 임흘에게 준 시다. 초승달이 서산으로 기울고 푸른 연기는 저녁 마을을 감싸는 시골의 풍경이다. 작은 배를 타고 만경창파를 노닐 때에 노를 저은 흔적이 물결이 되어 강을 흔든다. 탁영담은 퇴계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노를 젖고 풍류 한적의 멋을 누리던 선유 공간이며 도학을 함양하는 공간이다.
도산서원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퇴계의 정신 지향이 응축된 곳이며 한국 유학의 성지로서 명성을 확보한 곳이기에 남다른 감회와 존모심이 내재하고 있다. 향토 선형들이 선유를 즐기던 그곳에 여전히 물결이 일어 그 당시 그 분들이 노를 저으며 노닌 흔적으로 느끼게 한다. 산수 취흥과 교유의 미학이 어우러진 시적 표현이다. 설중매를 감상하며 지은 작품에서도 흥겨움이 넘친다.
눈속에좋은소식들려오니 雪裏佳音至
섣달매화보니그대그리워 思君臘月梅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 微醺歸去路
나귀등엔흥이절로난다네 驢背興難裁 (謝道岡契兄)
마음이 통하는 도강 형에게 사례하며 지어 준 시다. 눈 내리는 시절에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고 했다. 섣달의 매화를 대하고 보니 문득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그이를 만나 함께 정담을 나누다가 기분 좋게 취한 것이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나귀 등에 탄 시인은 절로 흥이 난다.
근시재의 문학적 감성이 시적으로 표현된 내용들이다. 마지막으로 근시재의 시에서 파악되는 의병장의 면모가 담긴 시를 들 수 있다. 근시재는 임란의 참상과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사생취의 결단으로 구국을 위한 의병 활동에 전념했던 면모가 유감없이 관련 작품 속에 빛을 발하며 표현되고 있다. 임금이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감회를 적은 시는 장편인데 근시재의 애국 충정 기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팔백년면면히이어온이 땅은 綿綿基八百
참된 군주 보배로운 역사였다네 寶曆屬眞主
문덕 닦아 뜰엔 봉황이 춤췄는데 文德舞虞階
오랑캐놈빈땅을침입했다네 賊禍侵邠土
바다바람에비린내진동하고 海風動腥塵
왜적놈온세상짓밟았네 犬羊踏區宇
인심은흙처럼부서지는데 人心若土崩
적세는비바람처럼놀라워라 賊勢驚風雨
아름다운궁전위용옮겨가니 金宮簇仗移
옥좌 옆엔여우와토끼춤추네 玉座狐兎舞
인재양성해도도움이 되지 않아 養才竟無補
왜 벼슬아치 숫자만 채우는가 肉食何須數
제 목숨만 구하는 자 누구네 자식이며 救生者誰子
임금 위해 죽는 목숨깃털처럼 가벼웠네 死長身如羽
나라구할기남자는어디에있어 何處有奇男
큰 도끼휘둘러세상을맑게하리오 廓淸揮蕭斧
차가운달 하늘가비추는데 寒月照天涯
임금께선 서쪽물가에계신다네 美人西水滸
소쩍새밤새도록텅 빈 산에서울고 蜀魄山夜空
이신하재배하며눈물흘리네 再拜泣臣甫 (聞乘輿出狩痛哭書懷)
왜적들이 평화스러운 조선 강토를 침탈하는 것을 목도하고 울분으로 넘치는 의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전란을 당해 인심이 흉흉해지고 적군의 위세는 비바람처럼 거세게 들이닥친다. 인재를 양성해도 소용없는 조정의 현실을 탓한다. 벼슬아치들은 숫자만 채웠을 뿐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탓에 이러한 미증유의 국가 대란을 자초한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하였다. 모두들 자기 목숨만을 위해 도망하기 일쑤이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없음을 한탄한다. 큰 도끼를 휘둘러 나라를 구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찬 달이 비추는데 임금의 피난 행차는 서쪽 바닷가에 있겠다고 했다. 소쩍새 우는 밤에 충신은 재배하며 눈물을 흘린다. 다음 시는 결사 의지가 담긴 의기 발휘의 작품이다.
목숨 바쳐사직지킬생각으로 百年存社計
6월에군복으로 갈아입었지 六月着戎衣
나라 위해 이 몸 먼저 죽으니 爲國身先死
어버이 그리운 혼백만 돌아가네 思親魂獨歸 (絶命詩)
죽음을 앞두고 지은 작품이다. 비장한 각오와 결연한 의지가 담긴 시이다.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겠다는 다짐을 하며 선비에서 군인으로 거듭나는 면모를 보인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니 어버이를 그리다가 혼백만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투영한다. 결연한 의지와 비장감이 감도는 절명시이다.
이러한 작품이 근시재 작품의 큰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남달리 조국과 민족이 당한 국가 위기에서 초연히 의병으로 투신한 의기는 매우 소중한 선택이며 후인의 귀감으로 작용된다. 이러한 작품은 그가 남긴 ‘의병일기’와 ‘행군수지’ 등과 연관시켜 다뤄질 때,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하게 노정될 것이다.
이어 권2의 서간문에서는 남치리와 예를 논한 것으로, 매우 장문의 형식으로 여러 가지 예법에 대한 논의를 왕복하며 견해를 밝힌 글이다. 이어 남치중과 남위중에게 ‘변례(變禮)’에 대해 논한 편지 글을 통해 장례 및 제례 절차와 예법에 대해 강론 형식을 취했다. 다음 권3의 서간문에서는 월천 조목에게 여러 통의 서찰을 보내 안부와 향중 인사들의 근황 및 역동서원 운영 및 역동서원에서 문집을 간행하는 경위 등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종숙부 설월당에게 올린 서찰에서는 안부를 묻고 집안 대소사에 대해 간략히 질의했다.
김성일과 주고받은 편지글에서는 선조부의 묘갈명 청탁을 의뢰했으며, 김기에게는 예법에 대해 언급하며 자문을 구했다. 이외에 권정보에게 보낸 편지글에서는 독서하고 학문 활동하는 도리를 저버리지 말자고 강조했다. 배용길과 내왕한 서찰에서는 ‘이기설’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를 전개하였다. 김성일과 내왕한 서찰에서는 임진왜란에 직면하여 조선 백성들이 문을 숭상하고 무예를 익히지 못한 폐단을 언급하며 현 시국 수습 방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잡저’에서는 이기론을 다룬 ‘이기설’에서 혹자들이 퇴계의 ‘이발기발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실상 이는 주자 학설에서 근거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 ‘심의 제도(深衣制度)’에 대한 논변을 제시하였다. 옷의 제도와 치마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이론의 근거는 주자의 학설에 바탕을 두었다.
‘제효행록후’는 효가 모든 행실의 근본임을 강조했다. ‘송소 권정보에게 올리 제문'에서는 평소 그와 교유했던 행적을 추모했고, ’산남 종숙부에게 올린 제문‘에서는 숙부의 근신과 모범적인 삶을 칭송하며 추모했다. 송나라 한세충에게 ‘충장(忠莊)’이라는 정표를 내린 것에 대한 표문과 성균관 유생들이 각도의 사찰을 철거하라는 간청한 것에 대한 전문(箋文)에서 유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조상을 추존하기 위한 ‘유사(先君)’와 ‘묘지명(伯父)’에서 선대의 유학자적인 면모가 후대에 귀감을 제공하고 가문의 번성과 규범을 드리웠다고 강조했다. ‘단인광주김씨묘지명’은 봉화 금씨 금녕(琴擰)의 부인이 남긴 여성의 기품과 덕망을 애도하고 추모한 글이다.
이어지는 글은 ‘부록’인데 근시재 사후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벗과 후인들의 애도문인 제문과 만사이다. 근시재가 38세의 일기로 요절한 점이 애석하고 의기를 출중하게 발휘하여 의병장으로 솔선수범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던 충직한 기상과 면모를 천양하며 애도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말미의 ‘발문’에서 경옥 이보는 근시재의 의병 활동과 전란의 와중에 아내의 초상을 맞은 근시재의 참담한 심정 및 의병 활동을 기록한 ‘향병수지’ 및 ‘향병일기’의 행방에 대해 언급하며 전쟁 통에 제대로 간수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맨 끝의 ‘발문’에서 정범조는 근시재의 의병장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하늘이 그에게 더 오래 살게 했더라면 동래 부사 송상현이나 한산도대첩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처럼 위대한 역사를 수행했을 것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5. 맺음말
근시재는 퇴계의 학문 연원을 계승한 선대로부터 철저한 유교적 고육을 받았고 유학가와 선비로서 면모를 지닌 인물로, 국가가 임진왜란에 직면하자 안동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38세의 일기로 요절한 유례가 드문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근시재가 남긴 시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유교적 인식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수신과 정심의 시론을 전개하고 산수자연 속에서 감흥을 읽어내는 시인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와 함께 다정다감한 교유 활동을 통해 상호 인품과 인격미를 고양시키는 미덕을 품위 있는 언어로 형상화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직한 선비로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려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해 의병장으로 투신 활약하였다. 그런 의지와 결의 시 작품에 토로되었다.
그의 사상적 경향을 보면, 주자와 퇴계 중심의 ‘예설’과 ‘성리학설’을 강조하며, 도의와 윤리강상 수립을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한 유교 실천을 추구하던 선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