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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혼 질량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의 줄거리:
일단 한 번 있게 된 사람의 영혼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마치 질량 불변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닫혀 있는 세계 속에서 모든 물질의 질량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있게 되는 영역만 달라질 뿐이지 있음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일은 이처럼 영원히 있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
(요한복음 10:28~30)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
본문의 중심이 되는 말씀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를 빼앗기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손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며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 혹은 “질량 불변의 법칙”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법칙을 비유적으로 우리 영혼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과 자아상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혼 질량이 불변하다는 것은 상실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변하는 영혼에 어떻게 자아상실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제목 자체가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60년 전에는 세 살이었습니다. 세살 아이가 일 년 동안 살면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마신 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물은 단 한 방울도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지구상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닫힌 세계 안에 있는 물질의 질량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태의 변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질량은 그대로 보존됩니다. 창세 이후 대기권이라는 막에 쌓여있는 지구의 물질은 겉으로 보는 외형에는 변화가 일어날지라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30년 전에 마신 물 또한 단 한 방울도 없어지지 않고 지금도 지구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 증발하여 하늘에서 구름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비가 되어 내려서 지하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강물이 되어서 흐르다가 수도관으로 들어와 또 다시 몸 안으로 들어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땀이나 소변으로 배출되어서 수증기가 되고 비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해져 있는 물을 마시고 배출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지구에는 아프리카나 미국의 중부 혹은 호주의 중앙평원처럼 비가 안 오는 지역이 있습니다. 비가 안 온다고 해서 지구에서 물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수증기가 지구 바깥으로 상실된 것도 아닙니다. 대기권이라는 막에 싸여진 폐쇄된 지구 어딘가에서 물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태어난 영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동시에 두 영역에 나타날 수 없을 뿐입니다. 호주 중앙평원에는 물이 없지만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나 핀란드에 가면 호수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한 번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영혼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혼이 있게 되는 영역은 세 곳입니다. 4차원의 천국과 4차원의 지옥 그리고 3차원의 세상입니다. 영혼을 영과 혼으로 나누어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이란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의 마음입니다. 한편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있는 것 중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음을 포착하는 기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이고 혼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영이 있고, 마음 채움을 위해 있음을 느끼는 기능으로서의 인격을 혼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합쳐 인격의 핵심인 영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영혼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혹시 의식이 잠을 잔다는 표현이 가능한 상태가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영혼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영혼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천국에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몸이 살아 있다면 영혼은 3차원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몸이 죽었다면 영혼은 4차원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는 위치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영혼이 지옥에도 없고 이 세상에도 없다면 있을 곳은 천국뿐입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천국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격의 핵심인 영혼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세 영역 중 어딘가에는 존재합니다.
의식이 있음을 느끼면 마음은 그중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빨아들여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와 같은 경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에서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삶은 불행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보다 더 근원적인 불행도 있습니다. 아예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있으나 다른 대상의 있음을 느낄 수 없을 때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정도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야 될 부분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0절을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아버지 손에 붙들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필요 없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손에 들어가면 안심하라. 아무도 너를 빼앗을 수 없다.”라는 의도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손에 있을 때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 손에 없으면 내가 나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빼앗길 수 있다는 말씀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멸망입니다. 결국 내가 나를 상실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아버지 손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을 경우에는 절대로 내가 나를 상실하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빼앗긴다는 것은 나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빼앗김의 느낌은 내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상실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아버지 손에 있으면 내가 나를 상실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내가 나를 빼앗겨서 상실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을 드려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으로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있기”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드리면 대부분 무엇인가를 “하는” 방향으로 대답을 합니다. 건강 지키기, 부부관계 유지하기, 주어진 일을 잘 해내기와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으로 힘든 일은 바로 “있기”입니다. 있어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있기”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자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돈 버는 일, 계획하여 성취하는 일, 학업에 관한 일에 이르기까지 오만가지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일을 함을 통하여 “있기”를 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제일 힘든 일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고 끝까지 해야 될 일은 “있기”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데이트를 하면 “둘이 함께 있어서 좋다”라는 하나의 느낌을 갖고자 합니다. 이 느낌을 함께 영화를 보며 표현하고, 함께 팝콘을 먹으며 표현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표현하고, 함께 소풍을 가며 표현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근본적 이유는 “있기”를 하는 것입니다. “있기”가 이렇듯 다양한 직업과 일과 과제로 표현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을 수만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내가 있는 이유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있음이 스스로 충만하다면 일들에 쫓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쫓길 필요가 없이 스스로 있는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계속해서 “있기”를 해야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영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혼이 사실로써 존재하는 것과 내가 인격체로서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스스로 있지 않기 때문에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소나무는 스스로 있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산이 있고 바다가 있지만 산과 바다는 스스로 있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체입니다. 내 안에 내가 있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있음의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가 왜 있지?”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의 있음을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의식함을 통해서 있음을 확인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로부터 있음을 확인합니다. 부모는 자녀로부터 있음을 확인합니다. 내 안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기에 있음의 이유를 다른 대상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보면서도 있음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 또한 있음의 이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명석한 철학자들도 자신에게서 있음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음의 이유를 찾을 수 없자 “생각을 하는 것이 내가 있는 이유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은 감정에서 있는 이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감정 활동이 있다는 것이 내가 있는 이유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윤리주의자들은 의지에서 있는 이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의지 활동이 내가 있어야 될 이유다.”라는 것입니다. 육체지향적인 사람들은 외모나 육체가 느끼는 말초적 쾌락을 있음의 이유로 찾고자 합니다.
나를 상실한다는 것은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생긴 영혼은 불변합니다. 소나무나 강이나 바다와는 다른 인격체이기에 계속해서 있어야 될 이유를 찾게 됩니다. 그럴 때 있어야 될 이유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없어지면 나에 대한 상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30년 동안 기업을 일군 사장님이 있습니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중소기업이지만 탄탄한 회사를 일구어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행에서 갑자기 대출상환을 요구하는데 당장 현금이 없는 상황으로 부도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은행은 회사 자체를 매각하여 처분하고자 합니다. 평생동안 일궈온 회사가 사장님의 손에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장님이 자살합니다.
이 사장님이 지난 30년 동안 해온 일은 “있기”입니다. 있기를 한 이유는 자기 안에 있음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음의 이유가 있으면 “있기”를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기”를 위해서는 있을 이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30년 동안 기업을 일구면서 기업이 나의 있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이 없어지자 더 이상 “있기”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있어야 될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상태가 인간에게는 가장 큰 무서움이고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줄리엣은 로렌스 신부가 준 비약을 먹고 가사 상태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줄리엣이 죽은 줄로만 알았고 그 소식을 로미오에게 전합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은 모습을 보고 자결합니다. 그리고 가사 상태에 빠졌던 줄리엣이 깨어나서 죽은 로미오를 보게 됩니다. 줄리엣은 그 자리에서 로미오의 칼로 자결을 합니다. 로미오가 자살한 이유는 로미오에게 줄리엣이 있음의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로미오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있어야 될 이유를 밖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유일하게 있어야 될 이유였던 줄리엣이 죽자 로미오는 더 이상 “있기”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줄리엣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로 든 사장님이나 로미오나 줄리엣은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이것이 실제인 경우에 영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더 이상 “있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육체가 죽게 되면 영혼이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반면 끊임없이 “있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기 스스로 있지 않은 사람이 끊임없이 “있기”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일시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모두 일시적인 존재입니다. 일시적으로 있는 것들을 있는 이유로 정하지 않고 영원히 있는 하나님을 있는 이유로 정한 사람들은 “있기”가 중단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혼은 없어지지 않지만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있기”는 가장 어렵고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차원의 세상에서 “있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3차원의 세상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 동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3차원의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을 있음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이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있다는 인격적인 느낌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있음의 이유를 일시적인 것들에서 찾습니다. 배우자가 있기에 내가 있다, 생각하기에 내가 있다, 기업이 있기에 내가 있다, 로미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줄리엣이 있기에 내가 있다, 자녀가 있기에 내가 있다, 몸이 있기에 내가 있다, 계좌에 돈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는 “있기”를 할 수 없기에 외부에서 있어야 될 이유를 찾습니다. 그럴 때 3차원의 세상에서 있음의 대상을 적용하지만 그것들은 일시적 대상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멸망으로 규정된 삶입니다. 그러다가 있음의 이유가 되는 것들이 없어지는 죽음의 순간이 오게 되고 영혼은 없어지지 않기에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지옥에서도 있어야 될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지옥은 더 이상 영혼이 있기 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있음의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자살했습니다. 줄리엣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자살해서 지옥으로 가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줄리엣이 죽었을 때 로미오가 느낀 마음은 더 이상 있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공포이고 두려움이었습니다. 더 이상 있어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이 세상을 한순간도 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기에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포와 두려움과 허무함은 자살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있음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과 허무함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곳입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있음의 느낌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있음의 느낌은 외부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있음의 이유로 붙잡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있음의 이유를 찾기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보고 듣는 것들로부터 있음의 이유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배우자와 다투더라도 있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상으로부터 있음의 이유를 찾는다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있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있음의 이유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찾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에게는 있음의 이유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음의 이유로 삼을 때에 나의 상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있음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근거해서 “있기”를 하게 되면 삶에서는 절대 평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근거된 나 있음은 몸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탱크가 장애물들을 밀고 나가듯이 있음의 느낌이 육체의 죽음까지도 밀고 나갑니다. 삶에 어떤 고충이 있고 환경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나 있음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이 되시면 나의 “있기”는 세상 누구도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의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 것들에 대해 죽을 때에 오직 하늘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있다는 “있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있기”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보이고 들리는 이 세상에서 나의 있음의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시켜 나가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문제를 만나든 “있기”만 잘하면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 문제 앞에 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 사건 앞에 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 사람 앞에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있기”만 잘하면 관계도 문제도 일도 다 하나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히 하여 스스로 있지 않는 자로서 있음의 이유를 세상에서 찾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가 상실되지 않게 해주시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버지만을 나의 있음의 이유로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 모든 것들 앞에서 아버지 때문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고집함으로써 모든 순간에 아버지가 나타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