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지(宣城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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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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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解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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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지(宣城誌)’는 예안(禮安) 읍지(邑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선성지’라고 부르나 ‘예안지(禮安誌)’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두 명칭은 예안 고을의 역사적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의 예안은 안동군에 딸린 1읍 14개 면 가운데의 하나이지만 ‘선성지’가 만들어질 당시만 하여도 예안이라는 독립된 현으로 그 범위나 역할이 컸다. 특히 그곳은 퇴계 선생이 탄생하신 이후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소 비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문 받은 고을이었다. 먼저 예안의 행정 변천사를 살펴 본다. 고구려 때는 매곡현, 신라때는 선곡현으로 내성군 순흥의 영현(領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당시 성주(城主)로 있던 이능선(李能宣)이란 사람이 거의(擧義)하여 귀순한 공로로 인해 宣城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현종9년(1018) 길주(吉州) 즉, 안동 땅에 복속되었다가 우왕 2년(1376) 우왕의 태를 이 고을에 묻은 것을 기념으로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 2년(1390)에 감무를 두었고 의인현을 병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현이 되고, 고종32년(1895)에 지방관계 개편에 의해 예안군이 되었다. 읍내ㆍ서면ㆍ북면ㆍ의서ㆍ의동ㆍ동상ㆍ동하 등 7개 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읍면 통폐합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도어 예안ㆍ도산ㆍ녹전 등 3개 면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예안면은 의동면의 분천리, 동상면의 인계리 일부, 그리고 북선면의 외 감애리, 동후면 나소곡리,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옛 예안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면이다. 그 관할 지역은 동부ㆍ서부ㆍ선양ㆍ천전ㆍ오천ㆍ부포ㆍ귀단ㆍ태곡ㆍ인계ㆍ동천ㆍ도촌ㆍ 삼계ㆍ신남 등 13개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이 지역에 가장 큰 변화가 닥쳐왔다. 정부에서는 ‘4대강유역 종합개발공사’의 일환으로 1971년부터 안동수력발전소를 건설하게 되었다. 수력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댐 건설로 1976년 준공과 때를 같이하여 이지역 대부분이 수장되고 고립되는 등 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 예안면은 그래서 과거 선성현이나 예안현이 관할하던 지역에 비하면 극히 일부 지역인데 교통의 편의에 따라 오천리는 와룡면에 편입시키고 면 자체가 없어진 월곡면의 정산ㆍ 구룡ㆍ미질ㆍ주진ㆍ계곡ㆍ도목ㆍ기상 등 7개리를 편입시켜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삼계출장소를 두어 삼계ㆍ동천ㆍ도천ㆍ신남ㆍ인계 등 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현재 예안면은 총 16개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64.00㎢이며 인구는 1989년 현재 4.965이나 매년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2. 지방지로서의 ‘선성읍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는 시도가 없지 않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왕에게 올린 표문에서
“옛날 열국에서도 또한 각기 사관을 두어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께서 말씀하기를, ‘진의 승과 초나라의 도올과 노나라의 춘추는 한가지이다’라 했습니다. 우리 해동삼국은 지나온 연조가 오래니 마땅히 그 사실을 역사에 기록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노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편집케 한 것이나 돌아보건대 자신에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 글은 물론 범 국가적으로 지난 역사를 정리하여 역사서를 엮은 것을 말하지만 그 역사서를 엮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실록이나 지방에서 엮은 ‘지방지’였다. 그러한 자료가 없이 한 나라의 역사가 편찬 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는데 그 대표적 사업이 고려조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 편찬사업이었다. 이어서 왕명으로 방대한 분량의 지리서가 간행되었다. 성종대에 50권 분량으로 ‘동국여지승람’은 세 차례의 교수과정을 거쳐 중종 25년(1530)에 55권 25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책이 바로 유명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은 조선 지리로서의 집성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지리적인면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정치ㆍ경제ㆍ역사ㆍ행정ㆍ군사ㆍ사회ㆍ민속ㆍ예술ㆍ인물 등 지방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백과사전식 서책이다. 따라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로 손꼽힌다. 다만 ‘세조실록’ 지리지와 비교할 때 그것이 지닌 장점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나 조세ㆍ인구 등 경제ㆍ군사ㆍ행정면에 있어서 그 비중이 약화되고, 인물이나 풍습ㆍ 시문 등이 비중있게 다루어진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관찬지리지를 편찬할 당시 각 고을에 공문서를 보내 지방사를 정리하여 보내게 했다. 아마도 이 지역의 역사기록은 그러한 중앙정부의 명에 의해 수집 정리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16세기 이후 지방사림 특히 영남사림파가 대거 중앙 정부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퇴계 선생의 제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륜을 펼쳤으나 이어서 닥친 사회와 당쟁으로 미쳐 뜻을 펴지도 못하고 다시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향리를 찾아 돌아와 학문에 힘쓰며 한편으로는 제자양성 등 향촌사회에서 그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들은 지방사에도 관심을 두어 직ㆍ간접으로 그 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각 고을의 지(誌)였다. 안동의 지지라 할 수 있는 ‘영가지’의 경우 그 일례가 된다고 하겠다. 퇴계 선생의 고제였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을 맞아 임무를 수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정계에서의 경험가 평소 갈고 닦은 학문을 접합시켜 향토지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인 용만(龍巒) 권기(權紀, 1546~1624)에게 영가지 편찬을 명하게 된다. 이리하여 영가지는 선조35년(1602)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1608년에 가서 8권 4책으로 그 초고가 완성된다. 그 동안 1607년 서애 선생의 타계와 이어서 안동부사로 부임한 한강 정구 선생의 교정과 지원, 그리고 소위 편찬위원으로 위촉된 광산 김득연 등 10인의 노력 등이 있었다. 그런데 ‘영가지’가 초고의 형태로나마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서애 선생의 지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은 용만 자신이 쓴 영가지 서문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서애 선생은 용만에게
“우리 안동은 한 도의 웅번(雄蕃)인 바 고려 태조와 같은 분께서 견훤을 토벌 했고,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였던 모든 기록으로 남길 만한 사적이 많았으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글쓰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여기에 유의하지 않았으니 어찌 우리 안동의 수치가 아닌가. 유의해 주시 바라네.”
라고 하여 역사적 편찬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하고, 또 주저하던 용만에게 결정적인 명분도 제공한다.
“자네는 사양하지 말게나. 저 중국의 선비들은 각기 자신들의 살고 있는 고을에 지를 만들어 두고 있으니 우리 안동에서 지(志)를 편찬하는 것이 무슨 참람됨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성리학자들에게는 더더욱 명분이 필요했다. 그런데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혀 용만으로 하여금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에 착수하게 했다. 이 점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영가지를 있게 한 결정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영가지’는 서애 선생의 지휘아래 용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기초가 완성되었고, 이어 고을의 학자들이 한강 정구 선생의 도움으로 참여하여 초고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영가지』 초고는 그 뒤 완성된 형태로 간행되어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중요하게 쓰였던 기록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중앙정부에서 는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기 위해 각 고을에 자료를 보내라는 명령을 하달하게 되었다. 안동의 경우도 그러한 중앙 정부의 멍에 의해『영가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안동부의 호장으로 있던 권창실(權昌實)이란 사람이 정조 8년(1784)에 쓴 영가지 초고본 개장(改粧) 후지(後識)에 보면, 서울 찬수청에서 공문이 내려와 1700년 (숙종26)에 ‘영가지’ 초고본을 보냈는데 이 뒤로는 고을의 크고 작은 고사(故事)에 대해서 고조할 자료가 없어 일을 닥치면 망연하게 되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 이러한 기록은 ‘영가지’가 초고일망정 신빙성이 있는 고증자료로 활용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성지’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중앙정부에 자료를 보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난 현지 규장각도서 속에 彩色地圖가 첨부된 ‘禮安郡邑誌’가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책자가 필사된 1899년 이후에 중앙정부(고종당시, 대한제국 3년)의 요청으로 서울로 올라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고종5년(1868) 이후에 활기를 보이는데 이무렵 모두 5차례에 걸쳐 전국적인 읍지 편찬작업이 이루어진 사실을 고려할 때 ‘선성지’ 역시 그때마다 송부되었다고 예상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중앙정부의 자료송부 요청은 당연히 가가 지방에서 지방사에 대한 재정리 작업을 이루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그 이전에 지방사에 대한 개개인의 자료수집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당쟁의 격화나 각 문중간의 이익 갈등 등 제요인으로 인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지방사 편찬이 주춤한 상태였다. 그런데 ‘선성지’는 ‘영가지’가 서애 류성룡의 지휘를 받은데 비해 이 책은 역시 서애 선생과 동문수학했던 월천 조목 선생의 제자인 권시중이란 분에 의해 초고로 작성된 점은 우연이 아니다. ‘선성지’의 경우 그 초고 작성시기가 명확하지 는 않으나 대개 1619년(광해군11)경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영가지’가 1602년부터 1608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과 비교하면 ‘선성지’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착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편찬 책임자는 ‘영가지’의 경우 용만 권기(명종 1, 1546~인조2, 1624)는 초고 ‘선성지’ 작성자인 늑로 권시중(선조5, 1572~인조22, 1644)이었는데 용만은 늑로보다 이십여년 선배이나 두 분 모두 퇴계 선생의 재전제자(再傳弟子)라는 것과 또 공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독실하게 학문에 전념했던 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는 ‘선성지’의 존재 가치인데, ‘영가지’의 경우 안동부(安東府) 전지역을 수록하기는 했으나 다 예안현 지역은 제외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조차 유림행사시에는 그 관할권을 철저히 존중하는 예를 보아도 엄연히 독립된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선성지’는 초고 작성시기나 편찬책임자들을 고려할 때 가치있는 지방지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선성지’로는 권시중의 초고본 ‘선성지’ 외에 1846년에 필사된 ‘예안현읍지’, 1895년에 필사된 ‘예안읍지’, 1899년에 필사된 ‘예안군읍지’, 간행년도 불명(일정시대로 추정)의 석판본 ‘선성읍지’ 등 몇 종이 있다. 우선 이번 국역 작업에서 제외된 ‘선성지’ 가운데 비교적 그 내용이 충실한 ‘예안군 읍지’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예안군읍지’는 1책으로 필사본이다. 1899년에 편찬된 것으로 채색 지도가 첨부된 특징이 있다. 내용은 군계ㆍ건치연혁ㆍ관원ㆍ성씨ㆍ풍속ㆍ산천ㆍ토산ㆍ성곽ㆍ봉수ㆍ누정ㆍ학교ㆍ역원(譯院)ㆍ불우(佛宇)ㆍ총묘(塚墓)ㆍ사묘(祠廟)ㆍ고적ㆍ환적(宦績)ㆍ인물ㆍ제영(題詠)ㆍ과거(科擧)ㆍ방리(坊里)ㆍ호구(戶口)ㆍ전부(田賦)ㆍ궁실ㆍ도로ㆍ교량ㆍ장시ㆍ책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누정ㆍ환적ㆍ고적 등 문화 관련 조목은 자세한 반면 요역ㆍ군액ㆍ창고 등 제정 관계 항목이 많이 누락되었다. 예안 고을에 전해오는 필사본 가운데 ‘예안군읍지’와 동일본으로 보이는 것으로 밀어 이 책은 비교적 완성된 ‘선성지’로서 중앙에 올린 한 본 이외에 수차의 필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3. 편찬자 늑정(늑亭) 권시중(權是中)에 대하여
편찬자 권시중의 가계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향조 권겸(權謙,1413~1505)은 권시중의 고조부가 되는 분이다. 그는 진사로 부호군에까지 이른 분으로 안동에서 예안현 부라촌으로 시거(始居)했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인 권수익은 문과에 급제했고, 그의 둘째 아들 제월당 권운은 중종 11년(1516)에 문과에 급제했다. 또한 권겸의 셋째 아들 권수복의 손자인 월헌 권수 역시 문과에 급제하는 등 대대로 현달한 가문이었다. 권시중은 바로 권수복의 증손자로 안동 권씨 시조인 권해의 24세손이다. 또한 권겸의 사위인 이흠이란 분은 바로 농암 이현보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내(汾川)에 터전을 잡은 영천 이씨 문중과는 세의(世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고 작성자 권시중의 생애에 대한 소개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그에 대해서는 비교적 생소한 형편이다. 당초에는 족보에 유고(遺稿)의 형태로 간행한 한 권의 책을 얻을 수 있어 참고가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늑정일고’와 기타 관련 자료를 종합해서 그의 일생를 정리 할까 한다. 그의 자는 시정(詩正), 호는 늑로(늑老), 늑정(늑亭) 또는 야주자(野舟子) 갈선노수(葛仙老叟) 등이다. 일찍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1602년(선조35)에 문학과 효행으로 장사랑 남부참봉에 추천되었으나 광해군 난정을 만나 벼슬길에 뜻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귀암 이홍중, 매원 김광계, 금역당 배용길, 회곡 권춘란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했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나 족보를 보면 그가 ‘선성읍지’와 ‘선곡연계록(善谷蓮桂錄)’을 편찬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선성읍지’는 필사본 ‘선성지’ 구지(舊誌)를 말한다. 그의 유고에는 동문록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운ㆍ금경ㆍ권춘란ㆍ김택룡ㆍ김기ㆍ배용길ㆍ금업ㆍ임흘ㆍ금윤고ㆍ조우인ㆍ이준ㆍ김개ㆍ정경세ㆍ김중청ㆍ권굉ㆍ권익창ㆍ이산해ㆍ이광윤ㆍ류종개ㆍ금학고ㆍ신열도ㆍ금각ㆍ조수봉ㆍ신달도ㆍ조석봉
이들 동문록은 권시중 문중 후손가의 고문서 더미에서 뒤늦게 발견한 것이라 한다. 이들 명단을 보면 현달한 사람이 많음과 아울러 뒷날 북인(北人) 정권에 가담했던 인사들도 섞여 있는데 따라서 이 ‘동문록’은 초년에 월천문하에서 학문을 수행할 당시에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호에서 퇴계 선생과의 학맥(學脈)을 분명히 했다. 그는 월천 선생에게 직접 수학을 했으나 퇴계 선생을 사숙(私淑)한 분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은 1561(명종 16) 도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기문과 아울러 그곳의 여러 가지 일을 읊조렸다. 선생은 7언 절구로 18수를 짓고 이어서 5언 절구로 26수를 지었는데, 오언절구 가운데 ‘늑천(늑遷)’이란 작품이 있다. 시의 원주에는,
“상수리나무는 쓸데없는 재목이지만, 고이 늙어 오래 가네. 더러는 면치 못하지만 수하는 길 이것이로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 귀절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편에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재목으로 쓸모 없어서 수를 누릴 수 있다’는 데서 따온 것이다.
기슭 타고 난 길을 천(遷)이라 하는데 綠崖路呼遷 그 위에 상수리나무 많기도 하여라 其上多樹락 굽고 뒤틀린 저 모양 무엇이 해로우리 何妨抱離奇 이미 그 나이 수 백년도 넘겠는걸 壽巳過數百 ‘퇴계집’ 권 3
퇴계 선생이 어렴풋이 느낀 ‘난세’는 늑옹의 시대에 와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안 북계 땅에 정자를 짓고 그 정자의 이름을 찾을 때 떠오른 것이 바로 퇴계 선생의 ‘늑천시’였던 것이다. 난세의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말하는 것이다. 늑로 권시중을 말하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은 바로 ‘효성’이다. 그는 타고난 효자로 당시에 이미 효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사람이다. ‘선곡현(善谷縣) 북계 땅에 권생(權生) 시중(是中)이란 사람이 있었는데•••••’로 작하는 ‘양로낭설(養老囊說)’ 이 초고본 ‘선성지’에 수록되어 있다. 권시중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늘 가죽주머니 하나를 차고 다니면서 맛난 음식을 보면 그곳에 넣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버이께 먼저 드렸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양로낭’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고을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글로 써서 기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담(龍潭) 임흘(任屹, 명종 12, 1557~광해군 12, 1620)과 지령(芝嶺) 윤의정(尹義貞)의 글이다. 두 사람의 문집에는 모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4. ‘선성지’ 간행본에 대하여
1) 초고본 ‘선성지’
초고본 ‘선성지’는 모두 5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이책의 서두 부분이 한두장 떨어진 관계로 원래는 그보다 좀 더 많은 분량이었을 것이다. 필사된 서체는 비교적 해서로 되어 있으니 부분적으로는 행서로 씌어 있다. 또한 이 책이 초고본이 관계로 목차나 체제가 지리서나 역사서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초고본으로서는 내용면에서 아주 충실한 편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개인 문집이나 한 지역의 종합적인 기록물로서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후세에 판단되는 자료까지 꼼꼼히 기록한 점에서 그러하다. 이 책의 서문격인 글은 초고 작성자인 늑정 권시중 자신이 ‘만력(萬曆) 기미(己未) 청화지망(淸和之望) 늑로(늑老)서’라고 작자와 연대를 밝히고 있다. 이어서 예안의 역사를 개관한 ‘예안실록’이 있고, 군계ㆍ산천ㆍ건치연혁ㆍ관원ㆍ사당ㆍ군명ㆍ성씨ㆍ풍속ㆍ고적ㆍ형승(形勝)ㆍ산천ㆍ토산ㆍ성곽ㆍ봉수ㆍ누정ㆍ학교ㆍ서원ㆍ향사당 조약ㆍ향약ㆍ장점(匠店)ㆍ교량ㆍ역원ㆍ불우ㆍ우거(寓居)ㆍ시거(始居)ㆍ인물(人物)ㆍ묘소ㆍ재사(齋舍)ㆍ각 고을 사적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 부분에서는 주로 선성현을 종합적으로 다룬데 비해 뒷부분에서는 각 마을별로 나누어 서술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부라촌(浮羅村)을 기록한 곳에서는, 우선 전체적으로 그 마을이 현 동쪽 10리 쯤에 있다는 것과 산과 강의 자연 배치에 대해 말했다. 이어서 각명조(各名條)에서는 부라마을의 주요한 봉우리ㆍ계곡ㆍ암자ㆍ정자ㆍ역원 등을 상세히 말했다. 인물조(人物條)에서는 권간(權簡)을 비롯한 모두 21인의 간단한 이력을 정리했다. 인물조 말미에는 93세를 산 권겸(權謙)을 위시해 그 마을에서 역대로 오래 살았던 사람 8인을 기록해 두었다. 다음은 그 마을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천재로 이름났던 조대(釣臺) 금각(琴恪)이란 사람이 이력을 ‘금조대실록(琴釣臺實錄)’이란 제목으로 특기했다. 금각이란 분은 월천 조목 선생의 생질로 7,8세에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서울로 가 하곡 허봉에게 수학하였으나 18세에 병으로 죽은 천재였다. 하곡이 그에게 준 장편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시는 전편에서 금조대의 천재성을 찬양하고 있다. 이런한 체제로 분천(汾川)ㆍ온계(溫溪)ㆍ북계(北溪)ㆍ둔곡(鈍谷)ㆍ가야(檟野)ㆍ한곡(寒谷)ㆍ지삼촌(知三村)ㆍ만리촌(萬里村)ㆍ면계촌(綿溪村)ㆍ남명촌(南溟村)ㆍ오천(烏川)ㆍ사천(沙川) ㆍ월천(月川) 등을 기록했다. 이 책의 가치는 여러 측면에서 그 가치가 고려될 수 있을 것이나 우선 세가지면에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문집이나 여러 기록에 누락된 것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야기인 ‘양로낭설발문’의 경우 글을 지은 지령 윤의정의 문집에 보면 내용도 다른 아주 짧은 발문이 실려 있음에 비해 초고본 선성지에서는 아주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문제는 본가에서 제작된 문집이 연대인데 역시 일정시대에 2권으로 정리된 실정이기 때문에 초고본 ‘선성지’를 참고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초고본 ‘선성지’가 늑정이 기록한 것이 사실이라면 훨씬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역사 사실에 엄정한 평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서를 기록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을 엄중하게 평을 가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야사씨왈(野史氏曰)이나 사신왈(史臣曰) 논왈(論曰) 등으로 구분해 사평(史評)을 가한다. 물론 이 책에서 사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역사대로 선성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한 사람들 가운데 청렴했던 명관(名官)이나 고을을 잘 다스렸던 명관(名官)을 따로 빼내어 정리했고, 또 역대 수령 명단을 정리하며 그 하단에 정치의 잘잘못을 평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사평에 해당되며 또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찬하며 채택했던 엄정한 평가인 ‘포폄(褒貶)의 원칙’ 즉 추상(秋霜)같이 엄정함을 유지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견지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셋째, 이 책을 찬집함에 있어서 폭넓은 자료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그가 쓴 ‘선곡연계록후서(善谷蓮桂錄後敍)’를 보면,
“나는 일찍이 월천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고사(故事)를 들었고, 또 여러책을 조사하여 조금 그 대략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주어모아 참고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해 마음속으로 한스러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방목(榜目)과 비문(碑文), 동사(東史)를 넓게 조사하여 상ㆍ중ㆍ하 세부로 찬집하니 우리 고을의 고적이 환하게 어제인 듯 했다.” 권시중 ‘늑정일고’
라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만 ‘선곡연계록’이란 책자가 일실되어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이 책의 문제점은 전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여 못한 점일 것이다. 곧 지나치게 자신의 씨족인 안동 권씨에 비중을 두고 있고, 자신의 스승인 월천 선생에 대한 끽긴하지 못한 기록들도 눈에 뜨인다. 물론 이점은 초고본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또 역사 사실에 대한 일차 사료적 측면에서 받아들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다. 다만 이 책이 안동의 ‘영가지’의 경우 용만이 초고본을 완성한 이후 지방의 학자나 고을 수령들에 의해 수차에 걸쳐 다듬어져 마침내는 목판본으로 완성되어 간행되었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초고본 완성 이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 아쉬울 뿐이다.
2) 석판본 ‘선성읍지’에 대하여
이 책은 모든 ‘선성지’본과 비교할 때 시기적으로 가장 최근(일정시대)에 간행 되었다는 점과 또 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석판본으로 간행된 관계로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다. 이 책의 편찬 체제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선성지’와 유사함으로 미루어 제작 당시 고종년간에 필사된 ‘선성지’가 참고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이후에 알려진 인물 등 사료에 대해서는 더 보태어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요역ㆍ창고ㆍ토산ㆍ진공(進貢) 등 재정관계 항목이 다소 보완 되기도 했으나 역시 인물이나 누정? 과거 항목이 보다 자세하다. 다만 기존의 ‘선성지’에서는 충절과 효행만이 기록된데 비해 이 책에서는 열녀(烈女)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초고본과 비교할 때 가장 큰 특징은 편제가 정비되었다는 점이다. 즉 각 항목에서 전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초고본의 경우 각 정자나 서원 등에 게판된 시가 개별적으로 소개 되었으나 여기서는 ‘제영(題詠)’ 항목에서 일괄적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비문과 책판 항목 역시 초고본에서 없는 내용이다.
5. 누락된 인물에 대하여
석판본 ‘선성지’에는 당시에 생존한 명현들이 더러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예안향교의 편찬이원들이 정독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발견되었다.
과제(科第) 이휘로 (李彙澛) : 순조 임오년에 용린과(龍麟科)에 합격하여 곧 호군(護軍)이 되었다가 동추(同樞)에 올랐다. 이형경(李亨慶) : 락금헌(樂琴軒) 정백(庭栢) 후손(后孫) 호를 송은(松隱)이라 했다. 동추(同樞)로 용양위호군(龍讓衛護軍)이 되었다. 이중섭(李中燮): 무과(武科)에 올랐다. 이중순(李中순): 무과(武科)에 올랐다.
생진(生進) 이동필(李東弼) : 영천인(永川人)으로 진사. 이세립(李世立) : 진성인으로 진사. 이현섭(李鉉燮) : 연안인으로 진사. 경술년에 순국하였다. 신석두(申錫斗) : 평산인으로 진사. 신태로(申㤗魯) : 평산인으로 진사. 이기호(李基琥) : 신성인으로 진사. 신상철(申相喆) : 평산인으로 진사. 이벽호(李蘗鎬) : 진보인으로 진사. 이기수(李基수) : 신성인으로 진사. 신상만(申相晩) : 평산인으로 진사. 신상우(申相遇) : 평산인으로 진사. 이명우(李命우) : 진보인으로 진사. 경술년에 순국하였다.
선행(善行) 이운(李芸): 농암 현보의 증손이다. 호는 지산(芝山)이라 했으면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도산의 위패를 소수서원에 모시고, 난이 평정되자 본 고을 서원에 다시 모시고, 난이 평정 되자 본 고을 서원에 다시 모시고 왔다. 이야순(李野淳)이 행장을 짓고, 이휘령(李彙寧)이 묘갈문을 찬하여 “공은 자나깨나 도산에서 생활했고, 도산 가까이에서 죽었으며, 생사가 도산에 매여 있었으니 공의 도산을 방물케 한다. 구를과 물 사이에 도산은 보이지 않고, 벼랑끝 돌은 천년이나 머무는데 드날리는 비취벌은 병풍처럼 단아하네.”라 하였다.
효행(孝行) 김구성(金九成) : 선산인으로 충개공 제(濟)의 후손이다. 호는 수분와(守分窩), 아비의 묵은 병을 여러해 동안 지성으로 돌보았다. 아비는 외와 송이버섯을 먹고 싶어했으나 그것이 날 철이 아니었으나 하늘에다 정성껏 기도해 드릴 수 있었다. 상을 당하자 상복을 늘 입고 있어 허리에 종기가 날 정도였으며 날마다 성묘하니 마을 사람들이 길을 닦아 주었다 한다. 영조조에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전을 지었다. 오후종(吳後種) : 영양 사람 정아무개의 종이다. 집은 역동서원(易東書院) 아래에 있었다. 아비를 잘 섬겼는데 집이 가난하여 조석조차 잊지 못할 정도였다. 엄동설한에 잘사는 집들이 그의 아비를 도와주어 춥지 않게 했다. 아비가 병이나 물고기를 자시고 싶어했으나 한겨울이라 구할 도리가 없었다. 예안고을 법에 고기잡는 사람은 얼음에 고기를 갈무리해 두었다가 관청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비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구해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번민하여 ‘부내(汾江)’를 건너며 탄식하였다. 그때 갑자기 고기 한 마리가 얼음 틈에 갖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오오후종은 얼른 고기 그것을 잡아다가 바치니 아비의 병에 차도가 있었다. 박문수(朴文秀)라는 분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각 고을을 다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을 듣고 칠백금을 정모씨에게 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그 아비에게는 2품(二品)의 직첩을 내려주었다.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이 전을 지었다.
열녀(烈女) 권씨(權氏): 충정공(忠情公)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으로 진사 이명우(李命挧)의 아내가 되었다. 지아비가 경술국치에 순절하자 권씨는 따라서 절명했다. 세상에서는 쌍절(雙節)이라 불렀는데 유허비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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