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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인간관계>의 줄거리 :
이제까지 유지하던 삶의 태도나 방식은 관성을 가집니다.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려는 힘입니다. 이 관성의 힘이 차단되고 뿌리 뽑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악의 관성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불가항력 적으로 밀어붙이는 이 죄악의 관성을 끊어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에셀과 리브가가 즉각적으로 하란을 떠나려고 하는 태도를 주시해 봅니다.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인간관계
(창세기 24:54~67)
54. 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56.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죄악의 관성(慣性)이란 우리가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삶의 태도나 방식을 계속 밀어붙이는 힘입니다. 달려가던 차가 갑자기 멈추면 달려가던 방향으로 몸이 쓰러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언어체계를 가지고 살아온 삶의 태도나 방식이 관성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 죄악의 관성을 따라서 사람을 관계하지 않습니다.
이 죄악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강압적으로 끌려가고 밀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악의 관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죄악의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특히 엘리에셀과 리브가와 이삭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엘리에셀과 리브가의 행동을 통해서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인간관계에 대해 알아봅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를 허락받고 난 후의 장면입니다. 엘리에셀은 리브가의 가족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허락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엘리에셀이 하란에 도착한 당일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잔 엘리에셀은 곧바로 하란을 떠나고자 합니다.
가나안과 하란은 무려 800km 떨어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루에 8km 정도를 걸을 수 있다고 칠 때 100일이 걸립니다. 이들은 낙타를 타고 이동했을 것입니다만 낙타의 걸음 속도가 사람의 걸음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빠르게 걸어서 하루에 12km 혹은 20km를 이동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두 달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행길을 마치고 하란에 도착한 엘리에셀은 곧바로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을 통하여 리브가를 만나고, 그 당일에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결혼을 허락받은 후에 다음날 떠나고자 합니다.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장기 여행을 했다면 최소한 일주일 정도의 휴식 기간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리브가의 친정 식구들에게도 무척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이 결혼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느닷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결혼은 혼담이 오고 간 뒤에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브두엘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엘리에셀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딸을 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엘리에셀의 출발을 만류합니다. 이것은 피로했을 엘리에셀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딸과 여동생과의 헤어지기 위한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떠나기를 고집합니다.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왜 엘리에셀은 하란에서 단 하루도 머물 수 없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요?
엘리에셀이 하루라도 더 있는 것 자체를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몸은 하란에 있지만 800km 떨어진 가나안에 주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아내감을 찾아 데려오라는 과업을 위임받은 상태에서 지금 하란에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인륜적으로 생각하면 리브가의 가족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 열흘 하다못해 며칠이라도 머무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엘리에셀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다음날 무작정 떠나고자 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엘리에셀처럼 인간관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더 이상 주인 아브라함과 관계되는 일이 없다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는 곳에서 단 하루도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엘리에셀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그 사람에게 하게 하시는 말과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 하라고 하신 말과 행동이 없으면 시간을 지체하며 대면하고 해야 할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이 없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관계를 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의 관성에 의해서 맺어진 인간관계입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이런 면에서 필요하고, 저런 면에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에서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니 삶은 고달프고 괴롭고 짜증이 나고, 마음은 걱정 불안 근심 염려에 휩싸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할 때 그 사람에 대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다면 엘리에셀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칼로 베어내듯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을 잠시도 그 관계를 이루어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때만 말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맺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에셀의 몸은 800km 떨어져 있는 하란에 있지만 그 마음은 오직 주인 아브라함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주인이 섬기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엘리에셀의 주인 아브라함은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엘리에셀은 주인이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란 땅에서 이루신 역사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빨리 아브라함에게 보고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인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엘리에셀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눈앞에는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오빠 라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직 800km 떨어진 가나안 땅에 있는 아브라함을 바라볼 뿐입니다. 엘리에셀의 말과 행동은 주인인 아브라함에 의해서 통제되고, 한계 지어지고, 결정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엘리에셀의 행동으로부터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근거하여 인간관계가 이루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있는 일이라면 면대면 하여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말과 행동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성에 의해 강압되고 밀어붙여지고 이끌려 가는 인간관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엘리에셀이 마음에서 800km 떨어진 가나안에 있는 주인 아브라함을 바라보듯이, 우리도 이 땅을 살며 사람들과 관계하는 동안 우리 마음은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죄악의 관성을 따라 나의 뜻과 생각과 의도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게 됩니다.
엘리에셀의 마음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주인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에서 보고 있는 주인으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우리의 삶이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떠나려는 엘리에셀을 보면 마치 리브가의 친정집 가족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에셀은 그 정도로 눈앞의 사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인간관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인간에 대해서 냉혹하리만치 마음이 끊어지고, 오직 천국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을 영광 중에 바라볼 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내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잡고 있는 동안 마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없다면 해야 할 말도 없고 행동도 없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람과 집에 머물고 있지만 함께 있어야 할 시간,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의 모든 순간순간들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결정해 가십니다. 지금 회사에 있다면 과장님과 부장님과 사장님과 관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할 것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입각해서 맞춰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죄악의 관성에 의해 끌려가게 됩니다. 내가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하려면 부장님이 결정적인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장님 눈치를 봅니다. 성과를 올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고려해서 부장님에게 말과 행동을 한다면 이미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오직 죄악의 관성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죄악의 관성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한 결과는 결국 지옥입니다. 죽어서 지옥에 갈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에도 지옥을 삽니다.
엘리에셀은 주인만을 바라봅니다. 주인이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금 해야 할 말과 행동은 마음에서 바라보는 주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결과 800km 도보 여행을 한 뒤에 다음날 바로 떠나려는 마음가짐이 생깁니다. 리브가의 친정 식구들은 강력하게 말렸지만 엘리에셀은 이들의 만류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칼로 끊어내듯이 단호한 말과 행동과 태도를 보이며 주인에게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삶의 관계를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나 사건 앞에서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대면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입각해서만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엘리에셀이 마음에서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것보다 피곤한 자기의 몸을 바라보았다면 800km를 걸어 왔으니 몸은 지치고 피곤합니다. 하란에 도착해 하룻밤 자고 났더니 얼굴은 붓고 동행한 종들도 다 지쳐있는 것이 명백해 보입니다. 리브가에게도 가족들과 석별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주인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상식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는 맞는 일일지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눈앞에 사람을 보면서 말하고 행동할 이유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내 말과 행동이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타협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그의 눈치를 보든, 그와의 이해관계를 따지든, 어떤 식으로든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서 말과 행동의 이유를 찾는다면 죄악의 관성에 의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의 눈앞에는 리브가의 가족이 있습니다. 리브가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친척이었으나 아브라함의 생김새도 모르거나 거의 기억도 못할 것입니다. 브두엘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아들이었기에, 나홀이라면 기억할 수 있겠지만 그 아들인 브두엘은 오래 전 떠난 아브라함에 대해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은 리브가의 친정 가족들 앞에서 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주인 아브라함만을 바라보며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도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 리브가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을까요? 리브가의 가족들은 떠나겠다는 엘리에셀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떠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고 리브가의 가족들은 곤란해합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아브라함의 종 때문에 하루 만에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하니 거절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기에 딸을 주기로 했지만, 석별의 정을 나눌 시간도 주지 않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당사자인 리브가의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친정 식구들 생각에는 리브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집과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 것을 아쉬워할 것입니다. 친구도 있을 것이고 하던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만 열흘이라도 시간을 갖고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결혼하게 된 것을 알리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게 함이 인지상정인 것은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친정 식구들의 생각은 당사자인 리브가에 의해 깨집니다. 리브가는 엘리에셀을 따라 당장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리브가의 태도는 리브가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알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 집안에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리브가의 태도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시고자 하실까요?
우리가 읽은 본문 이후를 보면 이삭이 브엘라헤로이라 불리는 네게브 땅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언급됩니다. 이삭은 들에 나와 명상에 잠겨있습니다. ‘명상에 잠기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수아흐(שִׂיחַ)는 ‘상념에 잠기다’ 혹은 ‘슬픔에 잠기다’라는 뜻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허허벌판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67절을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어머니 사라의 타계 이후에 이삭이 크게 상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얻은 후에야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들판에 나와서 이제나저제나 신붓감을 기다리듯이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나기를 기다리시며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만 십자가 사건 속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만나 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실제로 인격적으로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 마음이 올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루신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신앙 사건이 됨으로써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은 이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살아계셔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보좌 우편의 예수님에게로 들어가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한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도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엘리에셀이 800km의 길을 갔듯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하여 800km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 주님이 들판에 나온 이삭처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지금 만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만난 증거는 내 마음에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입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 가야 하는 우리는 이삭에게 가야 하는 리브가와 같습니다. 이것을 리브가의 태도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대할 때 죄악의 관성을 따라 밀려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말과 행동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봐야만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리브가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리브가는 엘리에셀을 따라 즉각적으로 하란을 떠나고자 합니다. 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인사를 하거나 모여서 송별회를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하늘로 떠나는 자라면 리브가처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에 마무리 지어야 할 일, 매듭짓지 못한 일, 확실히 해두어야 할 일, 다른 사람에게 의탁해야 할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떠나야 이삭이 가리키는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하늘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리브가처럼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리브가의 마음은 얼굴도 모르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로 향합니다. 더 이상 친정 부모든 친구든 자기 삶의 분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란 땅에 자기 삶의 몫은 없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내 몫이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삶의 내용입니다. 리브가는 그동안 살아온 하란에는 삶을 채울 내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내가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리브가처럼 떠나야 합니다. 이 땅은 떠나야 할 하란입니다. 천국은 들어가야 할 가나안입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이고 이삭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자에게 이 땅에는 몫이 없습니다. 이삭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몫이나 분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땅에 남아있다면 리브가가 떠나듯이 내 마음이 떠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있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에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일도 많고, 매듭지어야 할 일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있으며, 마무리 짓지 못해 꺼림칙한 일도 있습니다. 리브가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모든 일들을 다 끊어내고 떠나기를 결정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매듭지어진 일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그대로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늘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세상을 떠남입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찾아오셔서 대화를 하는데 습관적으로 내려놓는다는 이야기를 하시다가 제 눈치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리브가처럼 떠나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단지 열흘이라도 집에 머물면서 매듭지어야 할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헤어지기를 알려야 할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 즉시 떠나고자 합니다. 아무것도 매듭짓지 않은 채로 떠나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행동입니다. 이래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것, 저것, 그것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떠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일, 직장일, 건강 상태 같은 것들은 모두 땅의 일입니다. 나의 건강 상태를 리브가의 절친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재정 문제를 리브가의 두 번째 친구라고 생각해 봅니다. 중요한 문제들을 리브가의 친정 식구들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모든 문제를 다 잘라내고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떠나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은 보냄 받은 사람으로서 주인만을 마음에서 바라보며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어제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관계와 문제들을 떠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을 따라 떠나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마음이 아버지께로 갑니다. 천국에서 아버지를 대면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이 나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보냄 받은 상태에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중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죄악의 관성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리브가처럼 떠나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때 엘리에셀처럼 땅으로 보내집니다. 땅으로 보내져 살아가는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야 모든 인간관계가 죄악의 관성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리브가처럼 이 땅을 떠나게 하시고,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에 엘리에셀처럼 땅으로 보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오직 영광의 하나님에 의해서 하게 되고, 통제되고, 한정되고, 허락되는 말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