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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의 줄거리 :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유월절의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등 매년 세 번씩 절기를 지켜 성전에 모이라고 하신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세 번의 절기는 단순히 감사의 절기가 아닙니다. 감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각심의 절기라고 해야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이 세 번의 절기를 통해 경각심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선민은 어쩔 수 없이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는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
(출애굽기 23:14~19)
14.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18. 너는 네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지니라
19.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어미 염소는 젖을 먹여 새끼를 키웁니다. 젖을 통해 새끼에게 사랑과 생명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생명을 상징하는 젖으로 새끼를 삶는 일은 선민의 삶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에 대해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을 향해 본격적인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리 잡고 농사지으며 살 때를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면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는 의미는 19절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는 부분과 상통합니다.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성은 매년 세 번 성전의 성회에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성인 남자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20세 이상 남성을 가장으로 둔 아내와 아이들도 모두 성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일 년에 세 번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무교절은 일주일을 지내고, 맥추절은 하루를 지내고, 수장절도 일주일을 지냅니다. 얼핏 많은 일수 같지만 우리가 일 년에 주일 성수를 강조했던 것을 생각하면 성전을 찾는 기간이 너무나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예배당과 성전을 동일시하면서 종교 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일 년에 세 번만 예배당에 나오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성전의 의미는 우리의 생각과는 사뭇 다릅니다. 신명기 12장, 16장, 26장을 보면 성전이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없고 성막도 지어지기 전입니다. 다만 의미상 온 천하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를 따라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모여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기에 성전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삶의 현장에 흩어져서 살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일 년에 세 번씩 성전에 모여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로 부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성전에 올라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성전에 가면 성전 방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 돌아가서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 이름 부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도에서 일 년에 세 번 성전에 올라갈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 이름 부르기가 무엇일까요? 성전은 휘장을 중심으로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 있습니다. 먼저 지성소에는 십계명과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휘장 바깥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것을 명하신 이유는 이러한 성전의 기구들이 뜻하는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는 의미입니다.
지성소는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기는 존재의 이름이 있습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있던 것과 같습니다. 한편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잔대가 있습니다. 분향단은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가 뜻하는 대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는 존재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가졌습니다. 그러면 이로부터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를 가지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어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떡상은 마음의 만족을 상징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담은 대상을 추구하는 이유는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등잔대는 밝음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만족할 때 그것이 내 말과 행동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선민이 마음에서 붙잡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면 마음의 지성소에 담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선민이 마음의 지성소에 돈 10억이라는 이름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10억을 추구함이 나타납니다. 떡상이 뜻하는 대로 10억을 벌어 만족하려고 합니다. 등잔대가 뜻하는 대로 그 만족함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지성소에서 10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실제로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던 나는 번제단에서 죽여야 합니다. 번제단의 죽음을 통해 마음의 지성소에 10억이라는 이름을 없애고 깨끗해진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기도함을 통해 추구합니다. 이것이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매년 세 번씩 성전에 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가지면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대상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즉 마음에는 흡입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입으로 생각으로 많은 이름들을 떠올리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있어야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배타적입니다. 선민이라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의 이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건강과 장수라는 이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자녀의 형통이라는 이름을 담을 수 없습니다. 행여나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름을 담고 만족하고 추구하고자 했다면 그러한 나는 번제단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도에서 선민들을 성전에 모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으로든지 입으로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이름은 허공으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성전 방식의 이름 부르기를 통하여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겠구나.’라고 기대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선민이자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고 부르는데 그 이름이 허공에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의 대상들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선민의 선민 됨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 번의 절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일 년에 세 번은 성전에 와서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익히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제대로 하여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위하여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성전에 모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 이름 부르기를 다시 한번 갱신하고 갱신하고 다짐하고 다짐함으로써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이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전 방식의 이름 부르기가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이 내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를 수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허공에 사라지고 맙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실제 하나님을 만남이 없다면 내 마음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연관하여 각 절기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을 지키는 것은 출애굽을 기억함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 급하게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마음이 탈출하는 출애굽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은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마음에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있다면 세상을 탈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승진이나 가족의 형통 같은 가치들은 모두 세상에 있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이러한 이름들을 붙잡았다면 실제로 그것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면 됩니다. 세상을 탈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다면 세상을 탈출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출애굽이 뜻하는 바대로 세상에 대한 탈출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가려고 하는 바람과 소원이 없다면 차라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천국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내 마음도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세상을 탈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유월절에 이어서 일주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무교절을 지내는 이유입니다.
이어서 맥추절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에서 밀 농사를 지으면 첫 수확이 5~6월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이러한 시기에 찾아옵니다. 그래서인지 주석들을 보면 맥추절을 일종의 추수 감사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밀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드리는 맥추절은 감사제보다는 경각심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수고와 노력으로 첫 결실에 대한 성과를 크게 기뻐합니다. 모든 수고와 노력에는 성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밀 농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해 밀 수확을 하는 시기는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 올해 첫 수확이라는 성과가 마음에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맥추절을 정해서 지키게 하십니다.
수확한 밀을 보는 농부들은 ‘이것이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다.’라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농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여길지라도 마음이 첫 수확이라는 성과에 붙기 때문에 충분한 매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마음이 하늘을 향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첫 수확이라는 대상에 붙기 때문에 실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첫 수확한 밀을 성전에 가지고 나와야 했던 이유는 감사보다는 경각심을 가지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올해 첫 수확을 했습니다. 이 수확물을 보니 나의 노력과 수고가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수확물에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나를 번제단에서 어린양과 함께 죽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첫 수확으로 얼룩진 마음의 더러운 때가 벗겨지기를 원합니다. 하얀 마음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맥추절은 단순한 감사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각심을 갖게 하는 절기입니다. 이 땅에서 좋은 일이 생길 때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입니다.
수장절의 의미 또한 경각심을 갖는 것에 있습니다. 수장절은 밀을 포함하여 올리브나 포도를 비롯한 모든 작물의 수확이 끝난 7월 무렵에 찾아옵니다. 모든 수확물을 곳간에 저장하는 절기라는 뜻에서 수장절이라 불렸습니다. 수장절은 맥추절 이상으로 수확물에 마음을 뺏길만한 시기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6~19절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의 추석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수장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곳간이 채워지는 시기입니다. 세상일이 잘 되고 풍성하니 마음이 세상 떠나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찾아오는 수장절은 단순히 추수에 대한 감사제가 아닌 경각심을 갖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추수 때야말로 선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위기의 순간입니다.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이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는 절기라면, 맥추절과 수장절은 탈출을 방해하고 세상에 머물러 눌러앉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가장 위험한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장절을 맞이하는 선민들은 ‘하나님! 어쩌자고 이렇게 큰 수확을 하게 하셔서 곳간을 채우셨습니까?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는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는 심정을 가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곳간에 가득한 수확물을 보며 뿌듯해하는 나를 번제단에서 죽이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비하면 내 곳간을 채운 수확물은 사소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세상에 매이기 쉽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놓치고서라도 내 곳간의 수확물로 기뻐하며 취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 경각심을 갖도록 하나님께서는 수장절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한편 이로부터 특이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18절을 보면 “너는 네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제사를 드릴 때 누룩이 들어간 떡과 함께 드리는 것을 금하십니다.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이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마음에 얼룩을 만드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선민들이 출애굽 때 무교병을 먹었듯이 세상을 탈출하고자 한다면 세상이라는 누룩에 의해 마음이 얼룩진 상태는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또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되 내일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지금 곧바로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던 일을 다 마치고 30분 후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조금도 지체함 없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출애굽 때 지체함 없이 떠났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지체 말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는 마음에서 좋게 여겨질 만한 대상입니다. 내 노력과 수고의 성과가 눈에 보이게 드러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첫 번째 열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붙을만한 가장 좋은 대상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은 첫 수확의 가장 좋은 것으로 대표되는 노력과 수고의 성과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 해에도 또 수확을 주실 것이고 그다음 해에도 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첫 수확을 좋아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석을 보아도 명확한 해석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상식선에서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다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어미 염소는 젖으로 새끼를 키웁니다. 이러한 젖에는 새끼를 향한 어미의 사랑과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으면 더 맛있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관습을 금지하신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첫 수확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절기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미 염소가 사랑과 생명이 담긴 젖으로 새끼를 키우듯이, 곳간을 가득 채우도록 수확한 모든 농산물은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유지하게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과 생명을 담아서 허락하신 것들이 선민들의 마음 붙일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미 염소의 젖으로 새끼를 죽이듯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선민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단순히 염소 새끼를 삶을 때 어미의 젖으로 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죽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선민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보존하시고자 은혜로 세상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세상 것들에 마음을 붙인다면 선민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어미 젖으로 새끼를 삶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버린 선민을 먹는 것은 마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선민의 삶을 위해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가 있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면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민의 마음이 땅에 붙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보니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로 허락하신 세상 것들을 마음이 붙잡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수확이 그 대상이 될 수 있고, 창고에 쌓아놓은 것들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것들에 마음이 붙어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에 의해 선민이 죽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제일 맛있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것에 비유하시며 깨닫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름과 존재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건강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건강의 상태가 있습니다. 이름을 붙잡고 실제 상태로 가고자 합니다. 돈 10억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10억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돈 10억을 붙잡은 사람은 실제 10억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과정입니다.
한편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은 다른 모든 대상과는 다르게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면 실제 하나님과의 거리는 좁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더는 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인을 자처하며 종교 생활을 하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돈이라는 이름, 건강이라는 이름, 승진이라는 이름, 가족의 형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태를 향해 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백번 천번 부르면서 마음은 조금도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가지 않았습니다.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것과 같은 일을 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뜻이 있으셔서 내게 육체를 주셨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 또한 뜻이 있어서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마치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을 마음에서 붙잡습니다. 세상 것들이 나의 선민 됨을 죽이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상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사랑과 생명과 은혜를 담아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세상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일이 일어납니다. 선민에게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게 하시며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새롭게 갱신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성전의 완성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을 마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안식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안식으로 하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과 마주하며 하나님께 마음이 꽂힌 상태를 유지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중에 하나님의 이름도 함께 끼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 것을 허락하셨다는 이유로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것과 같은 일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상황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기를 쉬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