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어정쩡한 계절이다. 어디로 갈거나. 막바지 겨울? 잿빛 숲에 엉겨 붙은 겨울이 아직 날 즐기라지만 경칩 앞두고 그건 아닌 게다. 봄 여행? 아무리 춘삼월이 낼모레라 해도 꽃이 덜 핀 데야 그 또한 아닌 게다. 꽃 펴서 봄인지, 봄 와서 꽃피는지 모르나, 어쩌겠나 기자에게 봄은 활짝 핀 꽃인 것을. 마음 못 잡고 몇 날을 전국 관광지도에 얼굴을 파묻다 불현듯 포항에 꽂혔다. 그러고보니 대게철이 아니던가. 그렇게 계절 피해 떠난 포항인데, 제대로 봄과 겨울을 만날 줄이야. 봄꽃보다 환한 아이들로 로봇전시관은 언제나 봄일 테고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상처 입은 풍경으로 열두 달이 겨울일 테다.
■로보라이프뮤지엄 '태권V'가 전부인 때가 있었다. 이단 옆차기로 악당을 무찌르는 태권V는 그 시절 맞수가 없는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딱지를 사도, 책받침을 사도 태권V가 인쇄된 걸 최고로 쳤다. 친구들이 장래희망란을 과학자로 도배했던 것도 '태권V 효과'였지 싶다. 30년도 더 된 얘기이지만 여전히 기자에게 로봇은 태권V다. '아톰' 아버지 유식한 박사네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가정부 로봇 '로비타'가 아니라 인류를 지키는 로봇이 진짜 로봇이다.
나비로봇·방범로봇·유리창 청소로봇…
갖가지 기능 가진 로봇에 지루할 틈 없어
'로보노바' 강남스타일 춤 단연 압권
진한 대게 냄새 가득한 구룡포항
근대문화역사거리, 아픈 과거 간직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촌으로 복원 '로보라이프뮤지엄'에 태권V 같은 지구용사는 없다. 춤추고 꼬리 살랑이며 숫제 재롱잔치 벌이는, 어릴 적엔 로봇 축에도 못 꼈던 로비타뿐이다. 그런데도 관람하는 1시간이 빨리 흘렀다. 로비타를 깔봤던 그 시절의 꼬맹이는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신바람을 냈다. 로보라이프뮤지엄을 나올 땐 로비타는 태권V와 동급이었다. 사는 게 허드렛일의 연속인데, 그 일을 하는 로비타가 그쯤은 대우를 받아야겠다. 하긴 로봇이란 용어가 '고되고 지루한 일'이란 체코어 'Robota'에서 유래했으니 어찌보면 로비타가 태권V보다 더 원형에 가깝다.
로보라이프뮤지엄은 한국로봇융합연구원이 운영하는 로봇체험전시관이다. 지능로봇흥미관, 체험관, 홍보관, 교육실로 이뤄졌다. 안내데스크 옆 화상강의실에서 짧은 영상을 본 후 본격적인 로봇여행을 떠난다.
지능로봇흥미관 입구엔 아동학습만화 'Why:로봇편' 내용들이 로봇 역사표로 정리돼 있다. '로봇은 인간에게 해 끼치지 않고, 복종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도 눈에 띈다. "얘는 '파로'예요, 쓰다듬거나 안아주면 눈을 깜박여요, 이름을 불러보세요,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죠." 로봇해설사 손전윤 씨 설명에 이날 동행한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파로는 물개를 닮은 심리치료용 로봇인데, 양로원이나 병원에서 마음 아픈 사람을 치료한단다. 파로는 소리를 음성인식 카메라를 장착한 코로 듣는 녀석이다. 수염이나 털에 센서가 있어 건들면 반응한다. 똘망똘망하고 애처로운 눈빛에 소유욕을 주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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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라이프뮤지엄의 귀염둥이 로봇 제니보. |
군무 동작을 펼치는 '제니보'와 '로보노바'는 TV에 자주 출연했던 녀석들이다. 아이들 반응이 폭발적인 '아이돌 로봇'인 셈. 제니보는 물구나무서기, 태권도 품새 동작에 이어 댄스 필살기를 선보였다. 동요 '그대로 멈춰라'에 맞춰 춤추다 순간 얼음 동작을 취하니 아이들이 넘어간다. 중고생 관람객이 오면 걸그룹 노래로 음악을 바꾼다.
로보노바는 제니보보다 업그레이드된 녀석이다. 로봇은 관절 수가 레벨이다. 제니보가 13개 관절인 반면 로보노바는 17개 관절에 2족 보행을 한다. 로보노바의 강남스타일 춤은 단연 압권이다. 섬세한 관절꺾기와 경쾌한 양발 굴림을 보이고 부러 넘어진 로보노바가 스스로 두 팔 짚고 무릎 꿇고 몸을 세울 땐 절로 탄성이 샌다. 저건 갑옷 무장한 사람이다. 얼굴에 땀 맺혀도 이상할 게 없다. 동영상을 찍어 왔다. 한번 보시라.
이게 전부가 아니다. 손뼉에 날갯짓하는 나비로봇, 도둑 지키는 방범로봇, 유리창 청소로봇, 레이저 쏴 장애물 피해 가며 물속을 유영하는 수중 물고기로봇 등 차별화된 장기를 보유한 녀석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체험관은 아이들 놀이터다. 직접 제니보, 권투 글러브 낀 로봇, 피아노 치는 로봇을 작동시킬 수 있다. 홍보관 역시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다만 손대지 말라니 아쉽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
100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2층 목조가옥으로 빽빽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
로보라이프뮤지엄에서 차로 30분쯤 달렸을까, 바다 비린내보다 진한 대게 냄새로 구룡포항은 떠들썩했다. 내달 말까지 열리는 수산물 한마당 잔치가 한창이었다. 그 맞은편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다. 포항시가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기존 일본인 골목을 개보수해 조성했다.
총 길이라고 해 봐야 200m쯤 되는 이 골목에 발을 디디면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100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2층 목조가옥이 빽빽이 줄지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봤던 그 집들이다. 골목 한쪽 벽면엔 1991년 대한민국을 휩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스틸샷도 걸렸다. 이 일대가 촬영 세트장이었다는데, 어떤 장면에 어떻게 나왔는지 가물가물하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인이 문 열고 불쑥 인사해도 놀랄 게 없는 골목을 걷다 보면 구룡포근대역사관이 나온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구룡포에서 행세깨나 했을 일본인 유지의 집이었다. 일본 벽장 '오시이레'부터 실내난방장치 '고타쓰', 골풀 엮어 만든 바닥재 '다다미', 웃풍 차단장치격인 '이층 덧문' 등 일본 가옥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근대문화역사거리는 충분히 이색적이다. 하지만 구룡포의 근대사에서 연유한 탓에 우리에겐 아픈 골목이다.
구룡포는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어업인들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성장했고 급기야 일본인 거주촌으로 바뀌었다. 배 댈 곳 없는 구룡포 축항공사도 그들이 주도했고 신사(神社), 백화점, 여관, 기생집도 속속 들어섰다. 해방 전 구룡포는 '작은 일본'이었다. 일제강점기 여느 마을처럼 수탈도 심했다. 문화해설사 권혁창 씨는 전쟁물자로 수산물의 80% 이상을 뺐겼다던 한 할아버지 얘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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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시멘트로 덧입힌 일본인 공덕비. |
근대문화역사거리 공원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은 슬프다. 계단 양 옆 돌비석 120개는 일제강점기의 상처다. 이 공원은 사실 일본인들이 처음 만들었다.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원을 세우면서 그들은 비석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자 마을 주민들이 비석을 시멘트로 발라 기록을 덮어 버렸다. 그러고는 비석을 거꾸로 돌려놨다. 지금은 1960년대 공원을 재조성하며 새긴 한국 유공자 이름만 선명하다. 똑같은 풍경이 하나 더 있다. 구룡포에서 성공한 일본인 도가와 야사부로를 기리는 공덕비. 이 또한 앞면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김훈 선생이 '풍경과 상처'에서 한 고백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망언을 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상처의 풍경이 아닐는지. 구룡포항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유난히 차다. 봄은 언제쯤 오려나.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ilbo.com
TIP
■로보라이프뮤지엄 예약
로보라이프뮤지엄(www.kiro.re.kr)은 인터넷 예약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관람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개인 3천 원, 단체(20인 이상) 2천 원.
■교통
자동차:경부고속도로 경주IC~서라벌대로 직진~용강네거리에서 '포항·안강' 방면으로 우회전~산업로를 타고 계속 직진~한국로봇융합연구원(로보라이프뮤지엄). 로보라이프뮤지엄에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가려면 로보라이프뮤지엄~포항제철서초등학교 방면~유강대교~31번 국도 직진~구룡포·호미곶해맞이광장' 방면으로 빠져 계속 직진~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대중교통:로보라이프뮤지엄 갈 땐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105번 승차 후 승리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갈 땐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번 승차 후 구룡포 6리 정류장에서 하차. 로보라이프뮤지엄에서 바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가려면 승리아파트 정류장에서 105번 승차 후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해 200번을 타면 된다.
포항까지 가는 열차는 부산(사상역·부전역)~포항(효자역) 무궁화호가 있다. 2시간 30분 걸림. 버스는 부산종합버스터미널(1577-9956)에서 포항시외버스터미널(1666-2313)까지 1시간 20분 걸린다.
■연락처 및 이용안내(지역번호 054)
구룡포근대역사관(근대문화역사거리) 276-9605.
로보라이프뮤지엄(한국로봇융합연구원) 279-0427.
■먹을 곳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철규분식(054-276-3215)은 50년 전통의 찐빵을 자랑하는 소문난 맛집이다. 찐빵(3개 1천 원), 국수(2천 원), 단팥죽(2천 원)을 주문하면 후회가 없다. 무뚝뚝한 서비스에 당황하지 말고 음식을 즐기면 된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구룡포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다.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