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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유업 받을 자 / 갈 4:1-7
텔레비전에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빠들이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배우 송일국 씨가 그의 세쌍둥이 아들인 ‘대한, 민국, 만세’를 양육하며 세쌍둥이 아들들과 함께 놀아주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일국 씨가 인천 송도에서 살고 있는데 방송이 나간 후에 집값이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곳으로 가면 아이들을 그렇게 양육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겠지요? ‘슈퍼맨이 돌아왔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에 젊은 부부들이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부부가 다투는 일이 더 자주 벌어진다고 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아내들이 남편을 향해 ‘당신은 왜 송일국처럼 못하느냐?’고 타박하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송일국 씨가 세쌍둥이를 양육하는 것처럼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송일국 씨도 일상생활에서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아이들을 양육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방송은 ‘설정’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스탭들이 돕고, 아동 전문 상담가가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지도합니다. 특히 그 방송에 출연하면서 수 천만 원 광고료까지 포함한다면 수 억 원의 돈을 벌게 됩니다. 일반 부모들이 ‘설정’ 된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하면 당연히 불평이 생기고, 한계를 느끼면서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지만 좋은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들으면 기분이 좋은 이름이 있고, 들으면 기분이 나쁜 이름이 있습니다. 고재봉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살인마로 들려서 끔찍합니다.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매국노로 들리기에 기분이 나쁩니다. 유영철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자들을 죽이는 악마 같아서 섬뜩합니다. 조 세형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도둑놈이 얼른 연상되어 금방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에디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발명왕 생각이 나서 의욕이 생깁니다. 베토벤, 헨델, 바하, 슈베르트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름다운 음악이 떠올라 기분이 상쾌하여집니다.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대조영, 연개소문 같은 이름을 들으면 민족의 자궁 심이 팍팍 생깁니다. 또 이름을 들으면 축복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고 저주가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병철,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부요가 떠오릅니다. 록펠러라는 이름을 들으면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빌 게이츠라는 이름을 들으면 믿음이 좋은 세계최고의 갑부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바디매오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지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히틀러, 스탈린,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저주스러운 영상이 머리를 채웁니다. 아간이라는 이름을 들어도 저주가 가득 차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이름만 들어도 배신자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생의 모습이 얼룩져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아들을 낳고 목사님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자, 목사님은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을지 몰라 고민하다가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발할 발(發), 빛 광(光)자를 넣어서 발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의미는 좋지만 발음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친구들에게 엄청나게 놀림을 받았습니다. 어느 가정에서는 계속 실패하고 쓰러지기만 할 때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이름을 재기(再起)라고 지었습니다. 다시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성이 양씨였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도 양재기라고 놀림을 받고 있답니다. 또 그 이름을 들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명이 불타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고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불타는 사명이 떠오릅니다. 마더 테레사라는 이름을 들으면 인도 콜카타에서 빈민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름다운 이름으로 떠오릅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붙여진 이름도 많습니다. 신자, 성도, 크리스천, 교인, 예수쟁이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합니다. 보통 이름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늘의 시민권자'라고 부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의 꿈은 '시민권'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시민권이 나오면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의 시민권보다 더 좋은 하늘의 시민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시 16: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사 43:4절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을 자들입니다. 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7절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유업을 잇는다. 유업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인생을 막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자신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잠 29:18절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묵시로 나와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비전, 꿈으로 나와 있습니다. 묵시는 히브리어로 '하존'인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된 뜻은 언제나 미래 적이고 내일을 향한 희망적인 뜻입니다. 그리고 '방자히 행하거니와'의 뜻은 '멸망하다. 사라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전, 곧 꿈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다 결국 망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늘의 복을 유업으로 이을 자들입니다. 가슴을 활짝 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거십시오!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존경하는 사람, 자기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람,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형제나 부모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귀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그 남편은 세상에 나가서도 무시를 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도 도가 넘으면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피 값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이 내 죄 때문에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고초를 다 당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주님의 보혈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갈 6: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우리는 주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예수의 권세를 붙잡은 자입니다. 시 37:24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존귀한 자들입니다. 왜 우리가 존귀한 자입니까? 우리의 가치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가치가 있으면 존귀한 법입니다. 물건을 보면 어떤 물건은 다른 물건에 비해서 월등하게 값이 비싼 것이 있습니다. 금이나 진주 같은 것은 그 어떤 물건보다도 값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건 자체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존귀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예수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생명과 맞바꾼 존재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나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존귀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이 있어야 매사에 확신이 있고, 세상을 값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존귀한 자입니까? 우리의 쓰임새, 곧 용도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 앞에 쓰임 받아도 굉장한데,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면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가치를 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절대로 방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존귀한 자입니까? 우리의 주인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 주인이 귀하면 그 물건도 덩달아 귀해 집니다. 이순신 장군의 칼이 지금까지 박물관에 보관중이랍니다. 칼이 귀해서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의 먹과 벼루도 보관중이랍니다. 그 붓으로 훈민정음을 반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에 내가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존귀한 자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황송하게도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십니다. 또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도 흠모하는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존귀한 자라고 하십니다. 이래도 기가 죽습니까? 힘을 내세요! 자신에게 크게 기대를 거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존귀한 자입니까? 하나님의 유업을 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기업을 우리가 이를 자입니다. 곧 상속자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상속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장남은 다른 아들의 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집에서 신임하는 종을 상속자로 세울 수도 있습니다. 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경우에는 딸이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마저도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이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사회의 상속제도는 딸과 종들에게까지도 상속 대상을 확대하므로 그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장자로 상속의 우선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는 상속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12세에 성인의식을 거행하는데 성인의식을 마치고 성인이 되기 전에는 아들이라 하더라도 노예나 종의 신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상속자라 하더라도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학식이 뛰어난 노예 출신의 가정교사인 후견인이나,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감독과 보호를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는 상속자로서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성인식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모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과 인간으로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식에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거두어 가셨나이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는 “나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어린이로부터 어른이 되게 하시는 이 엄숙하고도 거룩한 날에, 나는 겸손히 눈을 들어 당신을 보오며, 이후로 나는 당신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당신에게 대한 나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의무를 다할 것을, 성실과 진실함을 가지고 선언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성인식이야말로 인생의 뚜렷한 경계선이며, 이제 어린이로부터 ‘장년’으로서 대접받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그때부터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녀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고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관습에 빗대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3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3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세상의 질서를 영적 질서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우리의 믿음이 어렸을 때'를 말합니다. '세상 초등학문'은 세상의 지식을 말합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초등학문은 '점성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세계에는 점성술에 대한 신앙이 대단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와 함께 별도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자기별이 있고, 그 사람의 운명은 그 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 자리가 어떻게 바뀌는가에 대해 대단히 민감했고, 그 움직임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예측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생활로는 초등학문인 점성술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세상 지식에 의존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지식의 종노릇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안내할 뿐이고, 진정한 구속 사역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이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더 이상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있지는 않지만, 오늘에도 율법처럼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과학만능주의’와 ‘물질주의’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인하여 우리는 ‘최첨단’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상상만 하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는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물질주의’와도 연관되는데, 과학기술은 근본적으로 풍요로운 물질 소비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과학기술이 발전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생명이나, 사랑, 배려, 나눔 같은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은 아무리 그 겉모습이 화려해보이고 대단해 보여도, 인간을 진정으로 성숙하게 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바울이 말한 초등학문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골 2:20-21)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곧 초등학문 같은 것에는 우리들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4-5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향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차매' 이 말은 때가 무르익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그 때는 정말 주님이 오셔야 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때 오셨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꼭 알아야할 것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때를 알아야 되고 하나는 자기 분수를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나 일반 생활에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방법으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때를 아시는 분입니다. 예언하신 대로 약속한 장소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동정녀 몸에서 신비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분이 창 3:15절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 '속량'이라는 말은 노예를 살 때에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량은 '값을 지불했다, 대가를 치렀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죄인 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그러한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대신 그 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를 살 때는 그에 해당하는 몸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 노예의 값을 준 그 행위가 속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 종 된 데서 자유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엡 2: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누구를 따라다니는 종이었습니까?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을 따라다니는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탄의 종이며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했습니까. 엡 3: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곁을 떠나 사탄의 종이 되어 세상의 영광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탄을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이 사탄의 종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탄과 함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었던 자들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는 에이즈라는 무서운 병에 국민 1/3이 걸려 있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이들은 자신들이 이 병에 감염된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파멸로 끌고 가는 무서운 죽음의 병이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은 이보다 다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속량 후에 우리에게 온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분의 변화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종에서 아들이 된 것입니다. 5절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칼 바르트는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셔서 나를 구원하셨을까? 그래서 십자가를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되고 용기를 얻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자녀의 명분 얻음이 왜 그리 중요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속에서 아들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유업을 이을 자'라는 표현을 두 차례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유업을 이을 자'라는 표현이 나오고 7절에도 보면 '유업을 받을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바로 극적으로 변한 우리의 신분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 상속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영생복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유산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이생 길에서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허락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입니다. 갈 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빠”라는 아람어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신약성서학자인 예레미야스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해석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해석을 따랐습니다. 게다가 우리말의 “아빠”와도 발음과 의미가 같아서 본문의 “아빠”라는 말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친근한 ‘유아기적 호칭’이라고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빠’라는 용어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사를 책임지는 절대적인 보호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대적인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나 바울이 하나님께 어리광을 부리기 위해 “아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보다 성숙하게 깨달은 것을 표현한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리광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무한한 애정과 공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부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자체로 큰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재벌총수나 최고 통치권자의 자녀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권세를 부립니까? 남들 다가는 군대도 안가고, 젊은 나이에 그룹 임원이나 사장, 회장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천지를 지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높아진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종은 가난합니다. 종은 자기 재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부자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지만 아들은 자유 합니다. 종은 주인 아래 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종은 애써 주인을 모방할 수 있지만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아버지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 행동합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관리인에 불과 하지만 아들은 모든 것을 물려받을 상속자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쫓겨날까 두려워하지만 아들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종은 날마다 살아 갈 것에 걱정하지만 아들은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들 된 자의 특권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는 램프의 종이 있습니다. 램프가 알라딘에게 속해 있을 때는 램프의 종도 알라딘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램프가 잡하르의 손에 들어가면 램프의 종도 잡하르에게 속하게 됩니다. 이처럼 종은 상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인이 바뀌면 종은 새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바꿀 수 없습니다. 또 종은 상전을 위해 마지못해 일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일합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종은 아무리 일해도 그것이 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한 모든 것이 결국 자기 것이 됩니다. 아들에게는 종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상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말한 성경 구절이 롬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전통적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상속자는 아버지의 재산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와 지위까지도 상속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원로원 의원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줄리어스 시저의 양자로 입양되어 황제의 권한까지 상속받아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0년 동안 로마의 평화를 구축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율법과 죄의 노예요, 죽음에서 도저히 건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으나 우리를 건지기 위해 이 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상속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세속에 종이 되어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세상의 학문과 과학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주의 일보다 세상일에 더 분주하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것보다 내 개인의 이익에 혈안이 되는 것, 또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노예 자리로 향해서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늘의 복을 유업으로 이을 자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존귀한 사람인 것을 명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골 3:1-2)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거룩한 일에 나서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일에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 갈 4:8-20
엔젤라 엘웰 헌트(Angela Elwell Hunt)의 “세 나무의 꿈”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느 산 위에 서 있던 세 그루의 나무가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나무는 각각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나무의 꿈은 값진 보석함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 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는 큰 배가 되는 것이었고,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높이 자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나무의 꿈이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세 명의 나무꾼이 산에 올라 그 나무들을 베어가, 그 나무들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것입니다. 보석함을 꿈꾸던 나무는 동물의 밥통이 되어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어느 여관의 지저분한 마구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 왕이 타는 큰 배를 꿈꾸던 나무는 조그마한 고깃배가 되어, 갈릴리 호수에서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실어 나르는 배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뚝 솟아 큰 나무가 되기를 원했던 나무는 그만 잘려서 어느 목재소의 구석에 쌓여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 나무는 자기들의 꿈과 가치를 상실했다고 한탄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나무들은 자기들이 꿈꾸던 꿈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떤 젊은 여자가 첫 번째 나무로 만든 구유가 있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를 구유에 누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와 그 구유를 비추는 것을 본 아기 엄마는 “정말 아름다운 구유군요”라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첫 번째 나무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월이 흘러,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배가 된 두 번째 나무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고깃배에 올라 호수를 건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몰아쳐 배가 뒤집힐 지경이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다가 일어나더니 바다를 향해서 ‘잠잠 하라’고 명령하자 거센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두 번째 나무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가장 위대한 왕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금요일 오전이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이 목재소에 몰려와 쌓여있던 나무 몇 개를 가지고 갔는데, 세 번째 나무도 함께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그 나무 목재로 십자가를 만들더니 어떤 사람을 거기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을 때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사흘 후, 그 나무는 자신에게 매달려 못 박혀 죽은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를 떠올릴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자란 나무보다 더 우뚝 서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세 나무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나무였지만 후에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값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분명 세 나무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없이 위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될 때, 실망하고 좌절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바로 알아 때에 맞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를 놓치고 난 다음에 후회하는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가 그렇습니다. 물론 요즘이야 평생 교육이라는 말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풍성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추가교육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고 원래대로 학교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학생의 시기에 해야 정상입니다. 물론 예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거나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해서 한글조차 몰라서 뒤늦게 야학이라든가 한글교실에 등록해서 다니는 분도 계십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다 그래도 고등교육까지는 마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볼 때 참으로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결국 후회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학창시절에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하는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건 다 아쉬움에 찬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안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왜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거든요. 막상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지난날을 후회하면 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때를 놓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배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욕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만도 못하다면 그 비난의 강도는 더 심해지겠죠?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 덧셈 뺄셈도 못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장난치니?’ 그러지 않겠어요? 그건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8-9절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른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별별 것들을 다 섬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우리 풍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집을 새로 짓는다던가 하면 돼지 머리 갖다 놓고 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은 돼지 머리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듯 그 앞에 절하며 복을 빌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당연히 기제사를 드렸습니다. 선친들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당연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참인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 아닙니다. 아직 믿음 안에 있지 않는 가족과 친지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삶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래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과 화평을 이루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말씀의 기본은 사랑으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말들이 과연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세워나가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사람을 향해서 그건 잘못된 일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동기가 정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 7:3을 보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비난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고 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어떻게 할까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누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내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10-11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날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대교 사람들은 특정한 날이 되면 반드시 금식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왜 금식해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8:3-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금식인지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6-7 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이 바른 뜻을 헤아려 실천할 때 그 금식의 의미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별개로 하고 단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비슷한 예로 오늘날 주일 성수와 십일조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합니까? 그래야 구원받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합니까? 단지 교회를 채우기 위해서 또 교회 재정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받아 누리는 첫걸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기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하고 있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안타까운 것이죠. 힘든 것 같으나 오히려 가장 쉬운 길입니다. 부족할 것 같으나 넘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쏙 빼버리고 단지 율법만 강조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법으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순종하라고 할 때도 순종할 때 주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유익을 가르쳐 기쁨으로 따르게 하기 보다는 먼저 정죄부터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의 법으로 다가가기 바랍니다. 누가 바르게 지키지 못한다고 정죄하는 자신부터가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은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주신 약속대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하면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쳤고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구원받는데 할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하면서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야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실상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례를 강조하고 육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의 약한 것을 그대로 내보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2하-14절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이제까지 여러분은 내게 잘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몸의 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그대로 알렸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미워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마치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얼마나 지성으로 섬겼는지 그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섬기는 모습이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은 마음으로부터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섬기는데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비록 바울이 약하기는 해도 그 자신 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진심으로 섬기며 따랐습니다.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바울이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거짓 선생들의 말에 그만 홀딱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바울을 섬기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16-18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아마도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겠죠. “저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이젠 그가 뭐라고 해도 못 믿어.” 하지만 바울이 달라진 것이 있던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기서는 저렇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의 말을 듣다보니 이상하게도 바울이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거짓 선생들이 노리는 점입니다. 기껏 멍석을 깔아놓으니까 뭐가 먼저 올라간다는 말처럼 거짓 선생들은 슬쩍 바울을 밀어내고 모든 갈라디아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그들이 이렇게 깜빡 속아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정말 순수했습니다. 지성으로 섬겼습니다. 사랑이 넘쳤습니다.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마치 소 닭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바울이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한쪽 얘기만 듣다보니 그 말만 옳은 것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대하는 것만 같은 그 모습이 과연 어땠을까요? 우선 기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저들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모든 걸 판단해 버립니다. 단지 내가 보고 내 귀에 들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내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진다면 그건 내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아니라고 정죄해버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결과는 내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약한 모습 그대로를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지성으로 섬겼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이 틀렸다는 그 말을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옳고 뜻이 좋아도 그 결과 기쁨을 잃게 된다면 그건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으로부터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연약한 모습이 보이면 더욱 강력하게 중보기도를 해주십시오. 더욱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십시오. 그래서 항상 넘치는 은혜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9-20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 사도는 주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치 아기를 낳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몰라주는 그 모습에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합니다. 함께 만나서 그게 아니라고 큰 소리라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 주의 일에 힘쓰는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심정일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다른 말로 비난하고 욕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정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이 듭니다. 속이라도 다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섭섭하다고 말이라도 꺼내면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엉망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는 그게 아니라고 외쳐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마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하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당신도 똑같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고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느냐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간이 해결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속은 시커멓게 다 타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방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속이 문드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이 사람다운 자식 되도록 만들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야 내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이끌어 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면 해산하는 수고 해산하는 고통이라고까지 표현하겠습니까? 자기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섭섭한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어떻게 부모가 돼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건 믿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정말 들어야 될 말, 지켜야 될 말은 흘려버리고, 듣지 말아야 될 말, 잘못된 말에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그런 말이야 철이 든 다음 얘기지 매를 들어보세요. 당장 튀지 않던가요? 아니 거꾸로 덤벼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죄인이라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자식을 미워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안타까워하면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마음 좀 알아 달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너희들이 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야. 그것은 모든 목회자의 심정도 다 똑같을 것입니다. 아니 부모의 마음 역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서 오직 사랑의 법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랍습니다. 그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리고 앞서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이 기뻐하시도록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다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아니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누구나 자기 약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억지를 부르고 있다고나 할까요? 자기 약점만 생각하다 보니까 주어지는 사랑은 생각하지를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을 섭섭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의 약점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이게 약점이다 싶으면 그걸 붙들고 늘어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그 거짓된 마음에 속지 마십시오. 오히려 약점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강점으로 바꾸어나가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세워 가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 내가 약할 대 오히려 주님의 능력은 더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오직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영적 풍성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운 성도로 세움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 갈 4:21-31
어떤 성도 한 분이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친구 중에 사업을 하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만 자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8천 만 원을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돈은 자기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적금을 들고 있던 5천만 원과, 언니에게 빌린 3천만 원을 합한 돈으로 너무나도 소중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평소에 워낙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기꺼이 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구의 사업이 그 후로도 수습되지 않은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빌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찾아갔더니, 십여 명의 채권자들이 모여서, 그 친구에게 따지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성도분도 빌려간 돈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듣고 싶었지만, 그 채권자들 틈에 끼어서 친구를 몰아세울 수가 없어서 그냥 조용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주일날 아침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가 9시쯤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전 가족이 도피하게 되었다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낮 12시 비행기로 떠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친구에게는 일부라도 갚고 떠나려고 하니, 10시 30분까지 인천 공항 출국장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2천만 원이라도 갚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 성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노후를 위해 준비했던 적금과, 언니에게 빌린 돈을 다 잃어버릴 뻔 했는데, 2천만 원이라도 받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나가면 예배를 못 드릴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면, 이제 영영 그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자신의 소중한 돈 가운데 일부라도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냐 돈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도 없이 예배를 선택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혼란을 정리하고,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하고는 인천공항이 아닌, 교회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머릿속에서 ‘2천만 원도 상당한 돈인데, 그 돈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그의 마음에 평안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성도의 간증을 듣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의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원문에 보면 ‘재물’은 단순한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맘몬’(Momm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신, 돈 신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돈은 인간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다 누리고 살고 싶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에 매어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양쪽을 걸치고 사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가 아닌 돈을 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는 것도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것입니다.
대한항공이 땅콩회항을 했다고 난리가 났었지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06년 8월 25일 오후 3시 20분쯤 인천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비행 중에 네 살 난 여자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유 73톤을 쏟아버리고 회항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10여분 전 이륙한 비행기가 강원도 원주 상공을 지날 때 어머니와 함께 탄 이 어린이가 39도의 고열과 호흡곤란, 발작 등의 증상을 보이며 의식이 혼미해졌습니다. 기내 상황은 즉시 기장에게 보고됐고 승무원들은 기내방송을 통해 탑승객 가운데 의사를 찾았고 다행히 의사가 비행기 안에 타고 있어서 “기압 차이 때문에 감기가 악화된 것 같지만 나이가 어려 비행을 지속하는 것보다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을 냈습니다. 그래서 기장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기수를 돌리기로 하고 운항센터에 통보했습니다. 기장은 회항한다는 점을 감안, 72.6t(4000 여만 원어치)의 항공유를 공중에서 버린 뒤 인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이 어린이는 기장의 연락을 받고 공항에 대기 중이던 의료진으로부터 응급조치를 받고 정상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항공기에는 두 모녀를 제외하고 361명의 승객이 있었지만 아무도 운항 지연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항공은 “이번 회항으로 유류비, 이착륙 료, 연결승객 관련 경비 등 5000만 원 가량의 추가비용이 발생했지만 인명을 중시한 기장의 결정은 회사의 경영방침과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어린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재수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생명을 향한 사랑과 희생을 361명의 승객들 모두가 감당했고 기장을 비롯한 항공사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므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살아가고 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은, 그 위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간섭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아직도 자신이 운수를 잘못 타고 나서,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더러워서 그렇다고 한탄하면서 오늘 이 거룩한 예배자리에 나와 계신 성도님들은 안 계시겠지요? 또한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운명아!” 이처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팔자 타령하면서 낙담하고 절망하면서 살아오신 분은 안 계신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도 잘들 된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걸까? 나는 무엇인가 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왜 이토록 안 풀리는 것일까? 아무개는 잘 되는 데, 누구의 가정은 행복하다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우환질고가 그렇게 많은가?” 오늘도 이런 복잡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까?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운명과 천리를 개척하는 것을 뜻하며,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개발하여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의 설교 가운데 "Almost Christian"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는데 그 뜻은 "거의 기독교인"입니다. 이 '거의'라는 단어가 참 좋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Sony 회사의 회장이 늘 걱정하며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기술 개발해서 전자제품을 마련하고 1년 후면 한국에서 거의 비슷한 제품이 나온다. 그러더니 그 기간이 점점 단축되어서 6개월 후, 3개월 후면 나오고, 이제는 거의 다음 달이면 거의 유사한 제품이 나온다." 사실은 한국 경제가 이만큼 발전하는데 그것이 대단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제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별 볼일 없는 차였는데 그들이 참 열심히 기술 개발하고 만들어서 미국 차보다 고장 없는 차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그 이미지를 깊이 심어놓았는데, 지금은 한국이 일본 자동차 하고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국 차가 세계 시장에서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것, 이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거의'라는 말이 치명적일 때가 있습니다. 한 학생이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내신 성적이 참 좋았습니다. 수능 시험을 봤는데 최고 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점수를 받아서 흐뭇했습니다. 원서를 냈습니다. '거의 합격했습니다.' 그러면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여러분, '거의'가 괜찮을 때도 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습니다. '거의'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가장 무서운 적은 차선'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차선이 없었으면 최선으로 살 사람들이 차선으로 만족해버리고 만단 말입니다. 더 발전해서 더 아름다운 진짜 생애를 살 수 있는데 차선 때문에 가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복음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 채 과거에 의지하고 살았던 율법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을 미치자 갈라디아 교회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그처럼 잘 지킨다며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율법을 자세히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23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거기 보면 비슷해서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13살 차이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이스마엘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그 둘이 같은 것이 있는데 아버지가 같습니다. 그 아버지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데 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사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로 삼은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그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같은 것이 많았습니다. 아마 외모가 많이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그 둘은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풍습도 같았을 것이고 그 가정만이 가졌던 가풍이나 삶의 스타일도 동일하게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분이 다릅니다.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한 여인은 종이었고 한 여인은 자유자였습니다. 당시의 법에 따라서 종의 자식은 종이었습니다. 그 신분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온전한 상속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종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은 종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고, 본처의 몸에서 난 동생 이삭은 주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아들 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기도 합니다.(홍길동) 그런데 아브라함의 두 아들 사이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벽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에 따라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었던 결과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라는 더 이상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을 것을 포기한 사라는, 아브라함과 의논하여 사라라는 몸종을 통해서 아들을 생산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곧, 자신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니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몸종을 통해서 자식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의 자연스런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5,60년 전만 해도 자녀 없는 집안이 씨받이했습니다. 근래에는 서구 사회에서는 대리모라는 아이를 낳아주는 그 여자들을 돈으로 사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방법으로 지금 제안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핏줄이 섞이지 않은 엘리에셀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는 것보다 그래도 피가 섞인 이 방법이 더 좋겠다 싶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것을 시행해서 나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방법대로 났습니다. 비슷하지만 가운데 내용이 전혀 틀립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때라 태어난 자였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어머니인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에,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였으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열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이삭이란 아들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낳았다고 해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고, 아버지가 같아도 종인 아들이 있고 상속자인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세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우리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는 것처럼, 신을 섬긴다고 해서 또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로 이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약속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입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재능과 실력으로, 자신의 의를 쌓아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목표를 세워두고, 인간적인 열심으로 자신의 경건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런 것은 경건하기는 해도, 겉모습은 그럴 듯해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적이며 종과 같은 생활입니다.
약속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애쓰지 않습니다. 나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실패자요, 죄인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미래, 나의 운명, 내가 살아야 할 모든 길들을 맡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런데 내 힘과 내 지혜와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는 율법의 자식이고 종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자는 참된 자유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면 기쁨이 있고 성취감도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맛도 있고 또 멋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을 것이고, 우러러 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끔 수도사들처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서 몇 달이고 기도와 묵상만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영성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을 멋으로 하고, 사람들이 보아줄 것을 바라고 할 때에,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내적인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할 때에, 이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과 봉사와 영성도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율법적인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되고,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구가 되길 원하고, 그리하여 성령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맺어진 열매는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가운데 오직 신적인 능력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맺어진 열매는 참된 상속자요, 참된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생활이 종의 생활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아들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24-28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특징을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비유는 비유(Parable) 은유(Allegory)로 나눕니다. ‘비유’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고, ‘은유’는 문자 하나하나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유라 했지만 원문은 은유로써, 바울은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두 언약에 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시내산이 나오고, 예루살렘이 나오며, 또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은유입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시내산이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율법을 의미하며, 또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유대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인을 하고 서명을 하여 확정한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옛 언약이란 그 내용이 '너희는 ... 하라.' '너희는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선, 지켜야 할 법칙과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달랐습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고, 보호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이런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다렸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과 내 땀과 수고와 희생으로 나타난 열매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로 여기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내 의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능력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복음의 세계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살아가는가?, 내 의지와 내 힘과 내 결단력으로 살아가는가? 입니다.
29-31절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두 아들들의 운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운명은 그가 쫓겨남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씨였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하신 축복이 있어서 그도 큰 민족의 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복인 영적인 복,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 영원하고 신령한 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의 열매, 의지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어느 정도의 죄성과 타락과 인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열매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생각 대신에, 성령께서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하는 겸손함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인 경건인 것입니다. 이삭의 운명은 어떠합니까? 그가 핍박을 받았지만 그는 진정한 하늘의 복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진정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우리들은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의아하게 여겨선 안 됩니다. 이삭이 그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고 있어야 할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약속과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란 사실입니다. 이 축복은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이며,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이루어진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해선 안 됩니다.
폴 뚜르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과 악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위한 또 친구를 위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것은 선이고 이기심과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욕망에서 행해지는 것은 악이다." 그렇습니다.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일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사랑의 헌신을 하는데 한 편에선 선이 되고, 또 다른 편의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복음과 율법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은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선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속에 있고 영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행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빛 아래서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 의와 능력과 의지와 경건에 의지하여 행할 때에 우리는 율법의 아들이 되고, 종의 아들이 되고, 쫓겨날 운명의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선 안 됩니다. 곧 나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실력, 심지어 내 경건의 능력까지라도 의지하고, 자랑하고, 으스대고, 뽐내려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우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두 운명의 차이에서 선택받은 약속의 자녀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만 자랑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며, 약속의 자녀로 긍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