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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엄마의 자장가
-시계풀꽃-
김 광 욱
1
그 여자고등학교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래된 역사와,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 재벌 같은 여류 유명인사를 배출한 혁혁한 전통을 자랑하는 이 학교에도 유행병처럼 번지는 여학생 폭력 서클이 있어 명문 여고란 이름을 무색케 했다.
이 학교에는 두 개의 폭력 서클이 대립하고 있었으니, 하나는 ‘흑장미’란 불량 서클이고 다른 하나는 ‘백합’이란 건전 서클이었다. ‘흑장미’는 성인 조직폭력배들의 지시를 받으며 교내외에서 폭력, 폭행을 일삼는 악명 높은 불량학생 집단이고 ‘백합’은 ‘흑장미’ 서클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누구의 지시(공식적인) 없이 스스로 결성한 자칭 규찰대였다. 두 서클이 벌이는 싸움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은 불안해하고, 형사 한 명이 학내에 고정 배치되어 두 서클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폭력의 잔인성에 있어서는, ‘흑장미’는 일반 조직폭력배를 못지않게 대담해서 형사들도 골치 아파했다. 그들은 대부분 돈 많고 빽이 좋은 집의 딸들이어서 학교에서 함부로 처벌할 수도 없었다. 부모들이 학교 경영에 깊숙이 개입돼 있고 교장, 교사들과 친해서 그 딸들을 처벌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경찰에서도 같은 이치로 이 서클을 뿌리뽑지 못하고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직무유기인 셈이었다.
나쁜 부모들이 자식의 앞길을 틔운답시고 비행을 방조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학교 폭력을 추방하려고 노력하는 정의바른 부모도 있었지만, 숫적으로 많고 권력이 센 불량학생 부모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피해를 입고도 힘이 없어 속앓이하거나, 자식을 폭력 서클에서 빼내려다 보복이 두려워서 끝내는 포기하고 자식이 사회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식이 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만 불량학생의 부모들은 처벌을 해서라도 자식을 선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식의 비행을 감싸고 두둔하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자기 딸이 ‘흑장미’의 일원이 된 걸 자랑으로 생각하고 뒤에서 활동비를 지원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한심스럽게도 ‘흑장미’를 거쳐야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여걸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존재하는 한 “흑장미는 영원하다”는 그들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도저히 그 싹을 자르기 불가능할 것 같았다.
‘백합’이란 서클은 최근에 학내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반흑장미’ 결사대였다. 그들의 인원은 10명이었고 모두 운동으로 단련된 유단자였다. 학교에서는 태권도와 유도, 검도 등의 무술을 필수와 선택과목으로 수업시간표에 편성하여 가르치고 운동부를 두어 특별지도를 하는데 모두 거기에 소속된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흑장미파’ 학생들도 수업 시간에 무술 수업을 받지만 ‘백합파’의 실력을 따르지 못해 모두 운동부에서 빠져나갔다. 그점에서 두 서클의 차이가 있었다.
‘흑장미파’들은 흉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깨끗한 운동 선수들인 ‘백합파’를 가소롭다고 비웃지만 그 운동 실력을 아는지라 교내에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교내에서는 처벌이 두려워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게 ‘흑장미파’의 불만이었다. ‘백합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원 모두가 ‘흑장미파’한테서 시달림을 당한 피해자들이라는 것.
‘백합파’ 대원들은 공부 잘하고 예쁘고 얌전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무술 실력이 있었던 게 아니고 서클의 지침에 의하여 무술을 필수적으로 익히도록 하고 있었다. 유단자가 된 다음에 대원으로 가입했다. 그래야 ‘흑장미파’들이 얕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얌전한 강아지가 화내면 사납다고, ‘흑장미’의 피해자인 그들은 자기들이 폭행당한 데 대한 앙갚음보다도, 다른 순진한 학생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도와 주는 게 목표였다. 그 서클을 창시한 사람은 ‘미야’란 2학년 여학생인데 그녀는 덩치가 크고 싸움 실력이 대단했다. ‘흑장미파’들도 그녀를 ‘바람개비’라고 부르며 은근히 두려워했다. 미야는 그 별명처럼 몸놀림이 바람개비처럼 날쎄고 돌려차기에 능한 3가지 무술의 유단자로, 여학생 같지 않은 여학생이었다.
2
두려워한다는 건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여자가 싸움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여자 깡패 세 명보다 남자 깡패 하나가 더 세다는 말이 있듯이, 미야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면서도 언젠가 없애 버리려고 ‘흑장미’들은 벼르고 있었다.
‘백합’이라는 자칭 규찰대가 생긴 이후로(그 연륜은 일 년밖에 안 되니 지극히 짧다) 학내의 불법 폭력이 줄어들고 피해 학생이 감소된 게 사실이었다. ‘흑장미’가 ‘백합’에게 촉을 못 쓰기 때문이었다. ‘흑장미’가 못된 짓을 하는 곳에 ‘백합’이 나타나서 막아 주므로 학교 입장에서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허나 일부 교사들은 ‘백합’을 ‘흑장미’와 같은 폭력 서클로 간주하며 그 역할을 비하시켰다.
“어떤 경우든지 학생이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그 교사들은 그런 생각을 갖고 두 서클에 속한 학생들을 동일한 잣대로 측정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빽이 좋은 ‘흑장미’는 처벌하지도 못하고 좋은 일을 한 ‘백합’의 학생들이 처벌을 받는 부조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참으로 한심한 교사들이었다.
‘흑장미’를 나쁘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부모의 빽이 두려워 손도 대지 못하고 ‘백합’만 수난을 당한 꼴이다. 이상하게도 서클에 계층의 구별이 있기라도 한 듯이 ‘백합’의 학생들은 ‘흑장미’보다 부모의 빽이 더 약했다. 가난한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부모로 가진 학생들이었다. 그 부모들의 상사가 ‘흑장미’의 부모들이었다. 그러니 엉터리 교사들에겐 ‘백합’이 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합’은 과연 연약한 여학생들이 스스로 결성한 조직체였을까? 모두들 그렇게 믿는 것 같지 않고 배후 인물이 있다고 추측한다. 그 배후 인물은 교사 중에 있을 것이다. 검도 교사인 전유미 선생이라고도 하고 일반사회 교사인 박광호 선생이라고도 했다. 두 교사의 합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흑장미파’와 그들을 두둔하는 교사들이었다. 싸움이 나서 징계를 할 때 위의 두 교사가 ‘백합’을 옹호하고 ‘흑장미’를 비난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아이(흑장미)는 맞아도 쌉니다. 그 아이가 한 행동에 비하면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진 것은 약과라 그 말입니다.”
하고.
그러나 세상 일이 원인보다는 결과를 가지고, 피를 흘린 쪽보다 피를 흘리게 한 쪽에 징계의 칼을 휘두르기 좋아하는 걸 어쩌랴. 어쨌든 ‘흑장미’와 ‘백합’이 싸움이 붙으면 승자는 언제나 ‘백합’이고, ‘흑장미’는 자기들의 빽을 믿고 일부러 싸움에 패배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싸움을 걸어서 두들겨맞고 피해자인 척 연극을 하는 것이다.
‘백합’의 선행을 역이용하여 ‘백합’의 조직을 서서히 와해시키려는 속셈이다. 그 아이디어는 훈육주임인 체육교사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고 체육선생이 바로 ‘흑장미’의 추종자였다. 나쁜 서클의 배후엔 학교 질서를 파괴하고 약자를 울리는 추악한 ‘악의 꽃’을 배양하는 정원사가 있었던 것이다.
3
따르르릉-
수업 시작 벨이 울린다. 교실 앞 잔디에서 휴식 시간을 즐기던 여학생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간다. 여학생들이 교실로 들어가고 난 뒤엔 탁 트인 교사 전면으로 푸른 숲과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강 건너 고층빌딩과 주택들이 상자갑처럼 아득히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만 남는다.
한쪽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수업이 시작됐는데도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교사 모퉁이에 모여서서 잡담하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여학생들이 있다. ‘흑장미’의 패거리들이다. 그들은 공부와 담을 쌓은 듯 줄담배를 피우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성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사나 직원이 지나가도 인사할 줄 모르고 담뱃불을 끄지 않았다. 교직원들은 그들에게 놀림을 당할까 봐서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체육 선생님이 지나갈 때만 담배를 감추고 순진한 체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훈육주임인 장현 선생님뿐이었다. 그는 고참 체육교사인데 해병대 출신이어서 독종같이 굴었다.
장현 선생님에게 걸리면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얻어맞고 기합을 받았다. ‘흑장미’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합’을 미워하고 ‘흑장미’를 두둔하는 그였지만 훈육교사의 위엄을 지키려고 공정한 체했다. 그러나 ‘흑장미’ 패거리들이 그에게 걸려 중징계당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뒤에서 권세 있고 돈 많은 부모들의 사주를 받고 변호해 주기 때문이었다.
“곧 수업 시작된다. 빨리 교실로 들어가서 공부해라. 말썽 피우지 말고.”
“네.”
“네.”
소녀들은 고분고분 대답하며 얌전한 체했다. 장현 선생님이 멀리 사라지는 걸 보고 불량소녀들은 다시 담배를 꺼내어 굴뚝같이 연기를 뿜어대며 쌍소리 잡담을 지껄였다. 그곳은 평소에 그들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후미진 곳이었다.
“야, 씨발 경치 기통차게 좋다.”
“한강에 가서 유람선이나 타고 놀까?”
“유람선 타면 뭘 하냐? 심심하기만 하지. 어떤 년 하나 걸려들면 좋겠다. 깝데기 벗겨 놓고 울려서 시간이나 보내게.”
“야, 동족을 사랑해라. 깝데기를 벗기려면 남학생 껄 벗겨야지.”
“엠병할 것. 난 큰 놈을 한번도 보지 못했어. 벗겨 놓고 보면 모두 맛없는 풋고추야.”
“우리 남학생 후리러 갈까? 이웃 학교에 골샌님들이 많지. 골샌님들이 고추는 크다더라.”
“얌전한 고추는 싱거워. 공부벌레들 후리면 떡이 나오니 밥이 나오니? 건달놈들을 잡아 족쳐야 스릴 있지.”
“그럼 건달 사냥 갈까?”
“학생이 수업 시간에 자릴 이탈하면 못쓰느니라. 그래도 우린 모범생들인데.”
“모범생이 없어서 고추들이 울겠는데.”
등등 노골적인 음담패설이 오고 갔다. 저쪽에서 한 여학생이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들도 잘 아는 지예란 2학년 학생이었다. 지예는 오빠가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갔다가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바삐 걸어왔다. 교실로 가려면 여학생들의 앞을 지나가야 했다.
“얘, 저기 ‘백합’ 부대장 온다.”
“어떻게 골려 줄까?”
“지난번에 우리가 ‘백합’에게 당한 복수해 주자.”
“마침 한 명뿐이니 잘 걸려들었어. 요절을 내 줘야 해.”
대장인 장미가 입을 사려 물었다. 지예는 모퉁이에 진을 치고 있는 여학생들의 눈총을 받으며 태연히 그 앞으로 지나가려고 했다. 대장이 가로막고 손을 내밀었다.
“야, 통행세 내놔.”
“통행세?”
“귓구녁에 말뚝이 박혔나? 왜 되씹고 지랄이야?”
부대장인 경희가 옆에서 거들었다.
“여기가 너희들의 땅이냐? 나 너희들과 참새방아 찧을 시간 없어. 비켜 줘.”
“이게 ‘백합’ 물을 먹더니 통이 커졌어. 이 촌년아, 보이는 게 없어? 우리가 널 그냥 보내 줄 것 같애? 통행세를 못 내놓겠다면 지난번 당한 것까지 곱빼기로 갚아 주마. 통행세를 낼 테냐, 매를 맞을 테냐?”
지예는 허허 웃었다. 수업 받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책가방을 벗어 놓고 대전 태세를 했다.
“통행세가 도대체 얼마냐? 듣고나 보자.”
“백억원.”
장미가 대답했다.
“백억원이 뉘애기 이름인 줄 아니? 하긴 너희 부모들이 재벌이니까 그 정도는 너에게 사탕값이겠구나. 그런 거액이 내게 없는데 어쩌지?”
“그럼 우리 가랑이를 끼어가라.”
“그 지린내 나는 가랑이를 무슨 재미로 끼어가겠냐? 차라리 훈육실에 불려가고 징계에 회부되는 게 낫겠다.”
지예는 당당하게 응수했다.
“요게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려. 얘들아, 뜯어 버려!”
싸움이 벌어졌다. 팔 대 일이었다. 태권도로 다져진 지예의 무술 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흑장미’에게 에워싸여 잡아뜯기고 얻어터져서 지예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땅바닥에는 여기저기 피가 수놓였다. 지예가 흘린 피였다.
여학생들은 저항 능력을 잃은 지예를 짐짝처럼 짓밟고 두들겨팼다. 장미는 팔짱을 끼고 고소하단 듯이 웃고 있었다.
“다시는 쓰지 못하게 팔다리를 분질러 놔라!”
여학생들은 대장의 명령에 따라 지예의 팔과 다리를 비틀었다. 지예의 찢듯한 비명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드득 날아갔다. 후미진 곳이어서 교실까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렸으면 교사들이 달려 나왔겠지만.
이때 반대편 모퉁이에서 한 떼의 여학생들이 나타났다. 미야를 위시한 ‘백합’ 규찰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상호 연락 체제가 갖춰져서 사태가 발생하면 재빨리 모여 들었다. 열 명 중 한 명도 빠짐없이. 그래서 규찰대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의 몸에는 비상시 서로 연락하는 신호 장치가 있었는데 지예는 그걸 이용했던 것이다. 미야가 대원들을 집합시켜 신호의 발신처로 달려가 보니 지예가 ‘흑장미’들에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지 않은가.
4
맨 앞에서 치마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폼재며 걸어오는 여학생이 규찰대의 대장 미야였다. 그들은 동료가 매맞는 걸 보고도 황급히 달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걸음 속도는 달리기처럼 빨랐다. 규찰대는 순식간에 ‘흑장미’ 주위로 모여들었다. 규찰대를 보고 장미는 구타를 멈추라고 지시했다.
미야는 적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지예 빼고 ‘백합’보다 한 명이 적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싸움을 미야는 바라지 않았다. 두 명의 부하에게 지예를 들쳐업으라고 명령했다. 많이 맞아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두 명이 지예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가고 남은 대원의 숫자는 칠 대 팔의 열세였다. 그러나 다섯 명이면 ‘흑장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미야는 성난 맹수처럼 장미를 노려보고 다가갔다. 장미는 슬슬 뒷걸음질쳐 달아났다. 대장이 없는 ‘흑장미’는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제대로 맞붙어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규찰대에게 실컷 얻어맞고 사분오열되어 뿔뿔이 달아났다.
장미는 정신없이 숲속으로 도망치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졌디. 미야와 붙어 봤자 패배할 게 뻔해서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었다. 대장이 도망치면 부하들도 도망칠 줄 알았는데 남아서 개처럼 얻어맞고 있었다.
“병신 같은 년들! 흉기를 쓰지 않으려면 얻어터지지나 말아야지. 아유 성질나! 괜히 벌집만 쑤신 꼴이 됐네.”
장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혼자 넋두리를 했다.
“미야, 두고보자! 내가 네 간을 씹어 먹고 죽어야지 한이 맺혀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용하의 힘을 빌려서라도 꼭 복수할 테다.”
장미는 남자 친구 용하에게 핸드폰을 했다. 한참 만에 용하가 전화를 받았다.
“바쁜 사람을 왜 부르고 난리냐?”
“엉엉엉엉.”
“울지 말고 용건을 말해 봐.”
“영영, 분해서 못 살겠어. 나 태권도 좀 가르쳐 주지 않겠니?”
“태권도를 하루 이틀에 배운 줄 아니? 학교에서 또 사고냈구나.”
“사고는 아니고 내가 당한 거야.”
“미야한테?”
“잘 아는구나.”
“널 이길 사람이 미야밖에 더 있니? 네가 건드렸으니까 규찰대가 발동을 했겠지. 너 그쪽 애들 때렸지? 그렇지 않고서야 미야가 널 때릴 필요 없잖아?”
“맞지도 않고 도망쳐 왔어. 그리고 전화하는 거야.”
“잘한다.”
“놀리지 마란 말이야.”
“나에게 구원을 요청한 모양인데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칠 순 없다. 무슨 끄나풀이 있어야지.”
“사사건건 우리 사업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게 끄나풀이지. 그 이상 무엇을 바래?”
“그것 가지곤 약해. 경찰서에 끌려갈 일도 생각해야지.”
“네 아버지가 대검 검사니까 무서울 게 없잖아?”
“네 아버지는 재벌 회장이면서 미야 하나 없앨 능력이 없니? 그와 똑같은 이치야. 나 똑똑하지?”
“똑똑하다 똑똑해. 똑똑이 넘쳐서 홍수나겠어.”
“밤에 만나자.”
“알았어.”
장미는 울화가 좀 풀려서 다시 학교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걸어서 교사 모퉁이로 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백합파’들은 장현 선생님에게 현장이 발각되어 훈육실로 가서 야단을 맞고 있었다.
“왜 싸웠지? 수업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패싸움이나 하고. 너희들 용서하지 않겠어.”
훈육주임이 으르렁거렸다. 장현 선생님은 ‘백합파’만 붙잡고 야단을 쳤다. ‘흑장미’ 패들은 붙잡지도 않았다.
“그 애들이 먼저 지예를 때렸습니다. 지예가 우리 규찰대원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 누구도 폭행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수업보다 선도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선도는 무슨 선도야? 너희가 규찰대야? 학교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학교에서 폭력을 수수방관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서클입니다. 저희들은 얌전한 학생을 폭행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방해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무법자들을 처단하는 게 목적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학교를 위해서요.”
“시끄러워! 날 훈계할 셈이냐? 오늘은 병원에 실려 간 학생이 있다고 하니까 특별히 봐준다. 다음에 또 싸우면 이유없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테야. 퇴학당할 각오하란 말이야.”
규찰대원들은 용서를 받고 훈육실에서 나왔다.
“왜 우리만 갖고 그러는 거야? 진짜 잘못한 ‘흑장미’는 봐주면서 우리만 징계, 징계, 노래를 부른다니까.”
“지예가 병원에 실려가지 않았으면 또 정학당할 뻔했지 뭐야.”
“훈육주임이 우리만 무기정학시켜 달라고 건의했겠지.”
“불공평해 정말 불공평해. 장현 선생님은 뇌물병에 단단히 걸린 것 같아.”
“항상 우리가 피해자라니까.”
대원들이 교실로 가면서 투덜거렸다.
“그게 어제 오늘 일이니? 모두 정신들 차려. 부당한 압력이 들어올수록 기죽지 말고 규찰대의 본분을 지키란 말이야. 수업 끝나고 지예한테 가자. 상처가 빨리 아물었으면 좋겠어.”
미야는 불평하는 대원들을 다독거렸다. 학교는 공권력이고 훈육주임도 공권력이었다. 공권력에 대항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재치있게 수완껏 불의와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미야의 목표였다.
5
교내 검도 도장. 검도부 여학생들의 기합과 고함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검도 교사가 학생들에게 자세와 기술을 친절히 가르쳐 준다. 모두 도복과 가면으로 몸을 감추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교사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있어서 그 미모를 보고 전유미 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날렵한 동작으로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흑띠 선수가 미야와 지예였다. 미야는 목검으로 정신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지예는 목검에 머리를 몇 대 맞고 벌렁 쓰러졌다. 가면이 벗겨져 매트 위로 굴러갔다.
“그만, 그만! 항복! 항복! 내가 졌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서 공격해 봐.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규찰대를 이끌어 나가겠니?”
“나는 연습 삼아서 하는데 네가 너무 인정사정 없이 덤벼드니까 정신이 없어. 너하고 연습 안할래. 넌 선생님보다 더해.”
“어디 나하고 해 볼까?”
선생님이 파트너로 고른 사람은 미야였다. 대련할 때는 선생님도 가면을 썼다. 일격 이격, 선생님의 목검이 예리하게 얼굴과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미야는 잽싸게 피하며 선생님의 허점을 찔렀다. 선생님의 가슴 부위가 목검에 정통으로 여러 번 맞아 아플 것 같았다.
선생님은 미야의 검도 실력에 놀라고 있었다. 실력이 어찌나 빠르게 향상되는지 제자가 스승을 압도했다. 미야는 검도뿐 아니라 유도와 태권도에도 2단, 3단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보니 전유미 선생님의 유방이 빨갛게 부어 있어서 미야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야의 몸도 군데군데 멍들어 있었다. 선생님과 연습할 때는 실전과 구분 없이 찌르고 내려쳤다. 선생님과 대련할 정도이면 검술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은 미야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야를 자신이 개발한 검법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어했다.
선생님만이 아는 비법을 가르쳐 준다면 미야는 훌륭한 검객이 될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었다. 선생님은 미야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미야는 선생님처럼 장차 무술 사범이 되어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꿈이었다.
왜 그런 꿈을 갖게 됐냐 하면 전유미 선생님의 인격적 영향과 가정 환경 때문이었다. 가정이 그리 넉넉지 못해서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다. 대학 공부는 나중에라도 맘만 먹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미야는 엄마의 신세지기가 싫었고 엄마와 같은 삶의 방법을 원하지 않았다. 엄마는 술집 작부였다. 술장사는 아무리 아름답게 미화시켜도 아름다운 삶이 아니었다. 그런 가정 환경을 잘 아는 전유미 선생님은 미야에게 검도로 출세하라고 은근히 부추겼고 그것이 미야의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전유미 선생님의 집과 미야의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귀가할 땐 가끔 선생님의 승용차를 태워 주었다. 도장에서 나오니 컴컴한 밤이었다. 미야는 친구들과 헤어져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고 있었다.
“대련할 때 네 눈을 보면 무섭더라. 살기등등한 게 상대를 잡아먹을 것 같아. 적극적인 자세는 좋지만 감정에 물들면 좋지 않아. 사고가 날 수 있거든.”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위축될 건 없어. 그렇다는 얘기야. 엄마하고 사이는 좋아졌어?”
“그저 그래요.”
“엄마에게 잘해야 해. 엄마가 부끄러운 장사를 한다고 엄마를 욕하지 마. 엄마는 그 장사가 몸에 배어서 하는 거야. 생계 수단으로 술 팔고 웃음을 파는 거지. 엄마가 너를 낳았을 때 젖을 먹이고 자장가를 불러 주던 때를 생각해 봐. 그럼 엄마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질 거야.”
“알고 있어요.”
“남자들 조심해라. 요즘 학교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다. ‘흑장미’ 패거리들이 불량소년들과 합세하는 것 같아. 너를 해치려고 벼르고 있을 거야.”
“선생님이 옆에서 지켜 주시니 든든해요. 전 걱정하지 않아요.”
“그렇게 낙천적인 성격이면서 왜 엄마를 이해해 주지 않니? 오늘은 친구 집으로 가지 말고 엄마한테 찾아가 봐.”
“술집엔 들어가기 싫어요. 방도 좁고 술냄새가 나서 오장육부가 뒤집혀지는 것 같아요. 공부는 되지도 않고요. 술꾼들 잡소리 때문에……”
“그런 환경을 극복해야 진짜 승자가 되는 거야. 난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한 줄 아니? 내 인생도 파란만장했어. 두 살 때 아버지 죽고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 난 고아였던 거야. 이래도 네가 나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니?”
“죄송해요 선생님. 그런 사연은 몰랐어요.”
“엄마한테 가는 거지?”
“생각해 보겠어요.”
6
“어디서 내려 줄까?”
“아무 데도 좋아요.”
“또 친구 집으로 갈 생각이구나? 거지잠 자려고? 바보 같은 것. 좋아.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간다. 우리 집에서 저녁 지어 먹고 피씨방에 가서 스트레스 풀자.”
“선생님도 오락 게임을 해요?”
“외롭고 답답할 땐 그게 최고지. 청소년들 속에서 그 애들 풍속도 배우고. 어른도 아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는 거야.”
“선생님은 박광호 선생님과 친하지 않아요?”
“그분은 교육적인 동지이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상대는 아니야. 차라리 네가 더 좋지.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가자.”
“잠도 재워 주실래요?”
“그러지.”
미야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제가 검도 선생님 집에서 함께 잤다고 소문나면 선생님에게 이로울 게 없어요. 말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헛소문을 퍼뜨릴 게 아녜요?”
“그 말도 맞다.”
승용차가 강변도로를 지나 도심으로 진입했다. 차들이 밀려서 달리는 시간보다 차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선생님은 차를 멈춰 놓고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미야가 고등학교에 와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을 만났다면 전유미 선생님일 게다. 그분을 존경하고 있었다.
미야가 가난한 집 아이로 얼굴도 예쁘고 공부 잘한다고, 돈 많은 집 딸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어 왕따당했을 때 따뜻이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전유미 선생님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미야는 ‘흑장미’ 여학생들의 밥이었다. 걸핏하면 두들겨맞고 놀림당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태권도와 유도는 ‘흑장미’의 잔인성과 숫적 우세 앞에서 무용지물. 외롭고 서럽고 분한 나날. 공부를 할래도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길에서 만난 전유미 선생님이 검도부에 들어오라고 권유했던 것이다. 검도부엔 미야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선배와 후배들이 많았다. 그들과 단결하여 규찰대를 탄생시킨 사람이 전유미 선생님이었다. 소문대로 ‘백합’이란 이름의 배후에는 전유미 선생님의 노력과 지도가 숨어 있었다. 전유미 선생님은 미야의 은인이고 참스승이었다.
“참, 저녁에 박광호 선생님과 차 마실 약속이 있는데 함께 가지 않으련?”
“사양하겠어요 선생님. 제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이상할 거예요.”
“박광호 선생님과 단둘이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네가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해 달라는 거야.”
“그러면 더욱 싫어요. 그분을 좋아하면서 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세요?”
“분위기란 게 뭔데?”
“사랑 말예요.”
“넌 너무 숙성해서 탈이야. 나보다 아는 게 많아.”
“선생님은 운동에만 심혈을 기울여서 몸과 마음이 굳어 있는 것 같아요. 2년 동안 그분과 이뤄 논 게 뭐가 있어요? 어쩌다 차 마시는 약속이나 하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결혼을 해요? 마음을 좀 열어 놓으세요.”
“넌 참 아는 것도 많다. 너 몇 살이지?”
“열 여덟 살이예요.”
“난 서른 세 살인데 나보다 정신 연령이 높은 것 같아. 어떤 면에서 말이야. 난 그쪽으로 너처럼 조숙하지 못했나 봐. 박광호 선생님이 내게 프로포즈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후회돼. 그분도 소극적이야. 그분은 운동이 뭔지 모르고 대학 시절에 운동권 학생이었다더구나. 정의파란 성격만 빼면 좋아하고픈 구석이 없는 남자야.”
“그분도 선생님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난 딱딱한 돌멩이 같은 여자야.”
“제겐 은인이예요, 등대고요.”
“별소릴 다 한다.”
미야가 내릴 지점이었다. 미야는 선생님 집으로 가자는 제의를 곱게 사양하고 승용차에서 내려 혼자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니 자기 집 근처였다. 술집 골목이었다. 미야는 선생님의 말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다. 한 달 만에 찾아오는 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