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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오늘은 “섬기는 남자, 돕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사람이 한자로 “인(人)”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이 등을 맞댄 모습입니다. 사람은 홀로 설 수 없으며 혼자 있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인류를 형성하셨습니다(창 2:4~17).1)
창세기 2장 7절에 “야훼 하나님께서 먼지로(of) 아담을 형성하신 후에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호흡하셨고 아담이 살아 있는 영혼에 되었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지로 인류를 만드신 후 그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쉬시고 그 인류(man)가 살아 있는 영혼(living being)에 되었습니다(창 2:7).
창세기 2장 8절에 “하나님께서 동쪽으로부터 에덴에 정원을 심으셨고 그가 거기 그가 형성하신 그 아담(man)을 놓으셨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창설하다”로 번역된 단어(나타)는 “심는다(plant)”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동산(hill)이 아니라 정원(garden)을 심으신 것입니다.
“동산”으로 번역된 말(간)은 “정원”을 뜻하며 영어로 “garden”인데 “정원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음식점”을 “가든”이라고 합니다. “garden”은 “정원”을 뜻하는데 한국어 성경들은 “동산”으로 번역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동쪽으로부터 에덴 안에 정원(庭園)을 심으셨습니다.
“에덴(Eden)”은 ‘즐거움의 정원’, ‘기쁨의 정원’을 뜻하는 말이며, 즐겁다는 것이 한자로는 “락(樂)”인데 두음법칙에 의하면 “낙”이 됩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정원은 “낙원(樂園)”인 것입니다.
“동쪽”이라는 것은 창세기 저자인 이스라엘인의 시각에 “동쪽”입니다. 현대 지명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이라크로 추정됩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시각에 탐나고 음식에 좋은 나무를 싹 트게 하시고 그 생명의 나무가 그 정원 중앙에 있고 좋고 나쁜 그 지식의 나무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름답다”라고 번역된 말은 “탐나다”(be desirable)는 뜻입니다. “탐(貪)”은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차지하다”라는 말은 “사물이나 공간, 지위 따위를 자기 몫으로 가짐”을 뜻합니다. 그래서 “탐(貪)”이라는 말은 “나 저것 가지고 싶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면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나무를 싹 트게 만드셨습니다.
“선(good)”이라고 번역된 말(토브)은 “좋은”, “선한”이라는 뜻인데 “좋을 호(好)”라고 번역하지 않고, “착한 선(善)”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한국 개역 성경은 “좋다”라는 말을 “착할 선(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착할 선(善)”을 사용했지만, “착하다”라는 뜻이 아닌 “좋다”는 뜻입니다.
“악(evil)”이라고 번역된 말(라)은 “악하다”(라아)에서 나왔고, 한국 개역 성경은 “나쁘다”라는 말을 “악할 악(惡)”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악(惡)”이라는 한자가 “나쁘다”라는 뜻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개역 성경은 한자로 “선악(善惡)”으로 번역한 것인데 “선악(善惡)”이라는 한자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그 인류를 취하셨으며 그가 그를 에덴의 정원 안에 그것을 섬기기와 그것을 지키게 만드시기에 종사하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끌다”라고 번역된 동사(라카흐)는 “취하다(take)”를 뜻합니다. “취(取)하다”라는 동사는 “자기 것으로 골라 만들어 가지다”를 뜻합니다. 영어로는 “take”입니다.
“take”에는 “가지고 가다”는 뜻이 있고, “out”은 “밖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Take-out”은 “밖에 가지고 가다”, “포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take”에 많은 뜻이 있는데, “손에 잡다”, “쥐다”를 뜻하며, “안는다”, “품는다”, “가지다”, “잡다”, “포획하다”, “붙잡는다”를 뜻하며, “빼앗는다”, “탈취하다”, “점령하다”, “손에 넣는다”, “이기다”를 뜻하며, “받는다”, “받아들인다”(accept), “선택하다”, “골라 가지다”를 뜻합니다.
“둔다(put)”로 번역된 단어(야나흐)는 “종사하다”, “휴식한다”인데, “종사(從事)”라는 한자는 “일정한 일에 마음을 다하여 일함”을 뜻합니다. “종사(從事)한다”는 “일을 좇는다”, “일을 좇아 섬긴다”는 뜻을 지닙니다. 야훼께서 그를 그 정원을 섬기고 지키게 하시기 위해 종사시키셨습니다.
개정은 같은 단어(아바드)를 앞에 5절에 “땅을 갈다”로 번역하고, 15절에 “경작하다”로 번역하여서 고유어와 한자어로 다르게 번역합니다. 단어(아바드)의 원래 뜻은 “일하다”(work), “섬긴다”(serve)입니다.
영어로는 “serve”인데 “serving”은 음식으로써 계속 섬기는 일입니다. “섬긴다”(아바드)가 개역 개정에는 “경작하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흙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가리켜서 “경작하다”(till)라고 합니다(창 2:5). 지킨다는 말은 잃거나 침해받지 않게 보호하거나 살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에덴의 정원 안에 두신 목적이 두 가지 언급되는데 정원을 경작하고 정원을 지키게 하시려고 인류를 정원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단순히 그 정원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섬기고 그것을 지키게 하시기 위하여 정원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냥 놀며 먹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일하고 섬기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농부나 정원 지기에게 섬김은 밭과 정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은 단순히 며칠은 좋겠지만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섬기며 살라고 사명을 주신 것이 인류에게 복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 살아갈 이유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사명을 행하며 살라고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의 정원을 섬기고 지키기에 종사시키셨으므로 그에게 에덴의 정원을 섬기고 지켜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창 2:15).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의 정원에 두셔서 그 정원을 섬기게 하셨는데, 아담은 낙원 안에서 빈둥거리며 지낸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지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섬기고 일하면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창 2:15).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할 수 있으며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복입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쉴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일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 일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일합니다. 일함으로써 돈이라든지 명성이라든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으니까 돈과 쾌락과 권력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욕심을 성취하려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법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만 참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류를 만드신 때 그에게 문화 사명을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며 정원을 섬기며 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주셨는데, “지상명령(至上命令)”은 “지극(至極)히 위에 있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지극하다”라는 말은 “더없이 극진하다”, “매우 극진하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라”라고 하신 명령이 지상명령인데, 우리는 “지극히 위에 있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마 28:19). 복음을 전하여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막 16:15).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은 곧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인데, 악마의 왕국에 속하여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일하고 지키는 것은 1장의 정복하고 다스리는 행동을 표현합니다.2)
“경작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일하다”나 “섬긴다”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민수기에서 레위 지파가 섬기는 것에 사용됩니다(민 3:7~8).
아담의 농사는 성전 봉사와 관련되는 왕과 제사장의 일이었습니다.3)
그러나 레위 지파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처럼 직접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자들이 있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목사를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류는 자기 일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한 것이었고, 사명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사람은 일을 섬겨서 얻은 결과물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바칠 것이 필요한 법입니다.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되어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그 장소를 에덴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장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사시키신 에덴입니다. 그 안에서 그것을 일하고 지키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그 장소를 에덴으로 만들어 감을 통해 에덴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그 장소를 에덴으로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땅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 아담에 대해 명령하여 말씀하셨습니다(창 2:16).
창세기 2장 16~17절에 “너는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것이고. 너는 좋고 나쁜 지식의 나무로부터 그것으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 것이니 이는 그것으로부터 너의 먹기의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각종”은 “모든”을 뜻하며 “임의로”는 “자유로이”를 뜻합니다(창 2:16). 아담은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자유로이(freely) 따먹어도 되었습니다.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그것으로부터 절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그의 먹기의 날에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임입니다(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줄여 “선악과(善惡果)”라고 합니다.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하나만 금지되었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아담이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만 빼고서 다른 모든 과일을 자유로이 먹어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만드셨기에 인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왕으로 만드셨을지라도, 인류 위에 그 인류를 만드신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인류의 주인으로 계시고 더 높은 왕으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왕으로 만드신 후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지만, 사람은 더 높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마땅합니다.
사람은 창조주가 아니며 하나님처럼 스스로 있는 무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다스림을 받는 존재인 것을 알기 원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창 2:18~25).
창세기 2장 18절에 “그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에게 그의 맞은편과 같이 조력자를 만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돕는(helper)”이라는 단어(에제르)는 “조력자(助力自)”를 뜻하며, “조력자(助力自)”라는 한자어는 “힘을 돕는 자”를 뜻합니다.
“배필(suitable)”이라는 단어(네게드)는 “~ 맞은편에”를 뜻합니다. “맞은편(便)”이라는 단어는 “마주 바라보이는 쪽”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이 영어 성경들에는 “적당한”(suitable)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마주 바라보며 힘을 돕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힘을 돕는 자를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산다는 번역은 “인류가 홀로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파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울이 여러 도시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감옥에도 자주 갇혔고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기도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 외에는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좋다”가 질서를 뜻하므로 홀로 있으면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돕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사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의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10명, 20명의 일을 행할 수 있는데, 이것을 영어로 “시너지(Synergy)”라고 합니다. 1+1=2가 되어야 하는데, 1+1이 10이 되고 20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아니하므로 조력자가 있어야만 좋습니다. 그런데 결혼하여도 아내가 조력자가 되지 않으면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결혼하려면 이 여자가 조력자가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여자의 기본적인 역할은 남편을 위하여 돕는 조력자의 역할입니다.4)
여자가 남편을 돕는 기본 역할을 망각하면 가정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여자는 남편을 돕는 자로 만들어졌고 주관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 머리 위에 오를 때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남자를 만드셨고 뒤에 여자를 돕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남편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사는 때 살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뒤집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여자는 그 남편에게 복종하며 그 남편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사명은 남편을 옆에서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힘을 보태고 돕는 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여자들도 이 구절을 받아야 합니다.
여자들은 이 구절을 싫어할지 모르나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고 여자는 남편을 위해 돕는 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죄의 성품이 있으므로 여자들은 이 구절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성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달리 해석하고자 시도하기도 합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생각은 인본주의(人本主義)며 사람 근본의 인본주의는 결국에는 타락한 사람이 만든 주장일 뿐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인본주의와 자기 생각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神)의 말씀에 입각한 신본주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타락하였고 그 결과 사람의 생각은 심히 왜곡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인본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결혼하니까 불행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까닭에 가정이 평화롭지 못하고 다툼과 싸움이 빈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돕는 자라는 개념보다는 주고받는 식의 계산으로 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욱 받기를 바라고 그렇게 못하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호감도 이심전심으로 통하기에 결국 자신도 호감을 못 받게 됩니다. 그러면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자가 이런 인본주의적인 여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사니까 동상이몽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같은 침대를 써도 꿈이 다르다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과 동상이몽을 하니 돕는 자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방향을 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아내는 그 남편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같은 방향을 보고 도와야 합니다.
롯의 아내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방향만을 추구하다가 세상만을 추구하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하여 멸망하게 된 여자 말입니다. 세상만을 바라보다가는 결국 이렇게 영원히 비참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같은 쪽을 보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섬기며 돕고 살아야 합니다.
잘생긴 남자가 자기만을 떠받드는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 여자들은 현실도 드라마 속 매트릭스 세계와 같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섬기며 사는 때에 행복하지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불행합니다. 악마가 거짓말쟁인 사실은 창세기 다음 장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드라마 남 주인공 같은 남자를 만나려다가 노처녀가 됩니다. 악마는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질서인 가정을 흩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남편을 돕는 자가 되어서 가정을 세우고 둘이 같은 꿈을 꾸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가야지 행복합니다.
페미니즘(feminism), 즉 여권주의는 인본주의 사상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악마의 거짓 계략일 뿐입니다.
“여권주의”는 악마가 ‘가정 해체’를 목적으로 만들어 쓰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악마가 만든 무기입니다. 악마는 여권주의를 외치며 살 때 여자에게 행복한 것으로 거짓말합니다.
“여권주의”는 여자에게 권리를 남자와 동등하게 부여하자는 주의인데 악마는 여자가 남자와 같은 권리를 가져야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권주의”는 남녀를 하나가 되게 하지 않고 남녀를 둘로 분열시킵니다.
남자가 할 일에 여자가 참여함으로써 여자가 할 일을 팽개쳐버립니다. 여자가 자기 할 일 안 하고 밖으로 나다니면 그 가정이 행복하겠습니까? 그 남편이 불행해지고 결국은 자기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대로 살아가는 때에 그 가정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가면 가정이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하면 다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섬기고 그 남편을 돕는, 복된 성도가 다 됩시다!
1)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64.
2) G. K. Beale, 『성전 신학』, 김성일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114.
3) Beale, 『성전 신학』, 123.
4) 김상복, 『잃어버린 왕좌』 (서울: 선교횃불, 1993),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