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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1월 13일 오후 13시 30분(일요일) |
만남 장소 | 경복궁역 1번 출구(지하철 3호선) |
트레킹 코스 | 경복궁역 #1 출구 ⇨사직단 ⇨단군성전 ⇨등과정터 ⇨인왕산숲길 ⇨ 수성동계곡/안평대군 별장(비해당 터) ⇨광화문 세종이야기 상설전시장 ⇨대한문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정동전망대(13층) ⇨덕수궁 돌담길 ⇨고종의 길 ⇨한국카톨릭 수도원 첫 자리(정동 수녀원) ⇨구(舊) 러시아 공관 ⇨덕수 초등학교 및 구세군학교 ⇨ 덕수궁돌담길(영국대사관) ⇨북창동 암소 소사골 식당/신년 旦拜式 |
소요시간 및 난이도 | 트레킹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8Km(난이도 하) |
진행자 | 이길헌(010-5251-0083) 김현회(010-8579-9988) 지종학(010-5233-2253) 김남선(010-5811-1188) |
길 안내자 및 해설자 | 권오철, 이광우, 명인식, 장동인 |
참석방법 | 카페에 들어가서 닉네임 또는 실명/연락처/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 댓글로 신청 |
준비물 | 식수, 트레킹복장, 트레킹화, 개인 안전장비, 썬 크림, 날씨에 따른 준비물, 간단한 간식 |
트레킹 중 안전에 대하여 | - 역사문화지리트레킹은 순수 비영리 트레킹으로 카페운영진과 트레킹진행자는 같은 회원으로 일시적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트레킹 중 일어나는 모든 사고는 참석한 회원 각자의 책임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카페 운영진이나 진행자에게 민, 형사상의 법적, 금전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 항상 회원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참석신청 자체가 위 사항을 확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진행 측 차원에서는 보험이 없으므로 필요시 개인적으로 여행자보험가입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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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정시에 출발 - 회비는 없음 - 도보 종료 후 식사 시는 n/1 원칙 - 당일 트레킹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국제경영컨설팅 홈페이지(www.kukjec.com) 또는 카페주소(http://cafe.daum.net/trekking7)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사직단社稷壇(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도성의 서쪽에 위치하며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이며 한 변의 길이는 25척, 높이는 3척이었다. 단의 사방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이었다.중춘·중추·납일이 되면 대향사를, 정월에는 기곡제를,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사직단의 지위를 태사·태직으로 올렸다. 그러나 사직단은 일제강점기를 맞으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단군성전
성전의 규모는 전체 대지면적 241.99평(800㎡)에 성전이 16평(52.92㎡), 정문(正門)인 내외삼문(內外三門) 5.63평(18.6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32.56평, 107.64㎡) 등으로 이루어졌다.
단군성전(백악전)은 檀紀 4301(西紀1968)年 李淑峰 女史의 희사에 힘입어, 李貞峰, 李淑峰, 李喜秀 삼 자매에 의해 단군성전으로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공건물로 建立된 후 社團法人 顯正會로 移管 되었으며, 단기 4306(서기1973)년 서울특별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개천절대제전은 우리민족이 아주 오랜 엣 부터 시대에 따라 형식이나 방법은 달랐지만 국가와 민간에서도 이날을 기리는 행사를 기려왔다. 이것은 우리나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화합을 위하여 이어져 왔다고 한다.
국조단군의 승천(어천절:돌아가신날)과 개국(개천절:우리민족 최초의 국가를 세우신날)을 기리는 민족고유의 의례행사인 어천절대제전(3월15일),개천절대제전(10월3일) 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등과정터(登科亭址)
등과정은 조선시대 무사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한 사정(射亭)이다.
사정이란 활터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등과정은 서울서쪽 지역에 있는 다섯 군데 이름난 사정가운데 하나였다. 갑오개혁 이래 궁술이 폐지되면서 헐렸다.
◯운영전의 무대 , 수성동 계곡과 안평대군 집터
아름다운 궁궐 수성궁은 안평대군이 살던 집을 한양성 서쪽 인왕산 기슭에 있었다. 인왕산은 산줄기와 물줄기가 험하면서도 매우 수려하여 마치 용이 몸을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궁궐을 지켜 주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사직단이 동쪽에는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는 천하의 명당이었다. 인왕산의 한 줄기가 굽이쳐 내려오다 수성궁에 이르러 우뚝 일어서는데 , 그리 높지는 않아도 그 위에 올라서면 한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그 위에 올라서면 성안 가득한 집들이 바둑판의 바둑돌이나 하늘의 별처럼 또렷하게 보였고 베틀의 실처럼 줄지어 펼쳐져 있다. 또한 동쪽을 바라보면 아득히 궁궐이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임금이 다니는 길과 신화가 다니는 길이 가로질렀으며 푸른빛을 드리운 구름과 안개가 아침저녁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과연 수성궁은 한양에서도 제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며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래서 꽃 피는 봄이나 단풍 드는 가을미녀 술이나 활쏘기를 즐기는 한량들이 날이면 날마다 노래 부르는 기생과 피리 부는 시종을 데리고 가 놀았으며 , 시를 짓고 서예를 즐기는 이들 역시 매일같이 수성궁을 찾아가 풍류에 취해서는 돌아기는 것마저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운영전의 무대가 된 아름다운 수성궁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아직 부암동에 가면 살펴볼 수 있다. 계곡물 소리가 크다 하여 '수성(水聲)'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수성동계곡이 그곳인데 , 옥인시범아파트를 2010년에 철거하면서 발굴됐고, 지금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수성동 계곡은 서울시 기념물 31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수성궁의 주인공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1418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이용이다. 큰형은 훗날 문종이 되었고 둘째 형은 수양대군으로 나중에 세조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쫒아냈을 때 그때 그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8일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받았던 인물로 운영전에서 묘사한 것처럼 학식이 깊고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1442년 6월 어느 날 안평대군이 수성동 계곡에 집을 지은 다음 경복궁에 들어가니 아버지 세종이 ‘비해당’ 이라는 당호를 내려 주었다. 세종은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長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東宮 훗날의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하기 위하여 ‘비해’ 두 글자를 따서 당호로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최근 옥인 아파트 철거 덕분에 겸재의 그림으로 보던 기린교도 재확인돼 운치를 더한다. <겸재 정선의 <장동 팔경첩>과 인왕상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 최근 모습>
◯윤동주 하숙집터와 서시(序詩)
서울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1년 스물다섯의 청년 윤동주가 시인의 꿈을 키웠던 하숙집이다.
윤동주(尹東柱)가 지은 시.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의 좌우명격 시인 동시에 절명시에 해당하며, 또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 가지 천체적 심상(心像)이 서로 조응되어 윤동주 서정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 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연은 ‘하늘-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을 이룬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구절은 운명애에 대한 확고하면서도 신념에 찬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의와 다짐은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윤동주가 택한 자기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애의 길은 관념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솔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에 의해 마침내 획득되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참된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운명 감수의 태도가 아니라 그 극복과 초월에 목표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박노수 가옥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은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하여 1938년에 건립한 이층집이다. 1991년 5월 28일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문신 윤덕영(1873∼1940)이 그의 딸을 위해 세운 집이다. 윤덕영은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이완용과 함께 한일합방 조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의정부찬정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938년대에 지은 이 집은 2층 벽돌집이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집터 뒤는 '송석원'이라는 추사 김정희가 쓴 암각 글씨가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집은 당시 중국 기술자들이 참여하였고, 한옥과 중국, 그리고 양옥의 수법들이 섞인 절충식이다. 반지하층이 있는 2층 가옥인데, 1층은 벽돌조이고, 2층은 목조이며, 지붕은 서까래가 노출된 처마가 나온 박공지붕을 하였다. 건물은 남향을 하였으며, 건물 서쪽에 포치가 설치되었는데, 포치의 서쪽과 북쪽 벽은 벽돌로 아치를 틀어 뚫어 놓았다. 1층은 온돌ㆍ마루ㆍ응접실 등을 두어 프랑스풍이 나게 꾸몄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만들었으며, 주택 내에는 벽난로가 3개 설치되어 있다. 2층에는 원래 베란다가 있었으나 30여 년 전에 방으로 바뀌었다.
1973년 화가 박노수가 이 가옥을 인수하여 거주하였고, 박노수가 사망하기 전인 2011년에 종로구에 자신의 작품, 고미술품, 고가구과 함께 기증하여, 보수를 거친 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노수(藍丁朴魯壽; 1927~ 2013) 화백은 1946년 서울대학교 제1회화과(한국화) 첫 입학생이었다. 재학 중에 김용준(金瑢俊), 노수현(盧壽鉉), 장우성(張遇聖) 등에게 배웠으며, 특히 이상범(靑田 李象範)을 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전(國展)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다.
박화백은 정부수립후 1949년에 처음 열린 국전에 ‘청추(晴秋)’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특히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仙簫韻)’을 출품, 동양화부문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20대의 젊은 나이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에도 1981년 마지막 국전(30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고 한다.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선생이 젊은 박노수 화백에게 화두처럼 던진 ‘고예독왕(孤詣獨往; 외롭게 홀로 가는 작가의 길은 고독하다)’이라는 글귀가 평생의 지침이 되어 외로운 예술가로서 탈속한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해주는 말이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평한다.
2003년에 뇌수종으로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인 2004년 그의 첫 화집이 출간되었고, 1955년부터 박화백이 언론에 기고했던 200여 편의 글 중에서 발췌한 ‘화필인생’이 출간되었다.젊은이들에게는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고 박노수 화백이 40년간 살던 옥인동 집은 지금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세종이야기 상설전시관
세종이야기 전시관은 6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인간, 세종- 세종대왕의 출생지, 가족관계, 품성과 취미 등을 소개하고 세종의 연대기를 소개하고 있다. 2. 민본사상- 노비출산휴가제도, 부민고소금지법 시행 등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복합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3. 한글창제 - 훈민정음 해례본, 언해본, 월인천강지곡 등 대표적인 조선시대 한글 문헌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창제의 원리, 디지털 시대에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 한글을 소개하고 있다.- 터치스크린으로 한글을 체험해 볼 수 있고, 사진 방명록을 남길 수 있다. 4. 군사정책 - 세종시대 제작된 신기전과 실제 발사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대마도 정벌, 이만주 토벌, 4군 6진 정책을 소개한다.- 세종대왕의 평화적 외교에 관한 내용을 애니메이션(3분 분량)으로 감상할 수 있다. 5. 세종시대의 과학- 앙부일구(해시계)와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고,
측우기, 혼천의 등을 3D 홀로그램으로 감상할 수 있다.- 세종시대의 천문학에 관한 내용을 애니메이션(3분 분량)으로 감상할 수 있다. 6. 우리소리, 우리음악- 세종대왕이 창시한 보태평과 정대업을 터치스크린으로 체험해 볼 수 있고,
세종시대 제작된 편종, 편경 등을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다.- 종묘제례악 키오스크를 통해 종묘제례악과 구성 악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의 신악 창제 열정에 관한 내용을 애니메이션(3분 분량)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세종영상관,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관련 서적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읽을 수 있는 한글 도서관, 한글을 소재로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시 공간 한글갤러리 등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
기존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 재정비하고,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길이는 900m이다. 자연친화적인 점토블록 및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권 확보를 위해 차도에 석고석 포장(페이빙스톤) 실시하였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느티나무 외 2종 130주 식재, 평의자 20개 설치하였으며 주변의 역사적 시설인 덕수궁과 연계한 역사적 가로 경관의 창출 및 가로환경 개선하였다. 낭만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며, 주변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문화산책 코스로도 제격이다.
역사를 읊어주는 사랑의 노래
덕수궁 돌담길의 이별은 1988년이 기준이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태어난 해다. 그 전까지는 가정법원이 상징이었지만 이후는 「광화문 연가」로 남았다. 그 증거처럼 가정법원은 서초구로 떠나고 덕수궁 돌담길에는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이영훈의 노래비가 남았다. 하지만 연인들은 ‘우리 사랑’을 실험하듯 지금도 변함없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걷기에 좋은 길이니 뉘인들 고풍스런 돌담 아래 곱게 떨어진 낙엽을 그냥 지나치고 싶을까. 이별은 그저 끝나지 않는 사랑의 연장전이다. 추억이라 이름 붙을 따름이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의 연가(戀歌)는 늘 사랑의 진행형이다.
덕수궁 돌담길은 계동이나 성북동길과 더불어 서울에서 역사의 온도가 가장 따스한 길이다. 족히 100년이 넘는 시간이 차곡하다. 정동교회와 신아빌딩, 이화여고와 배재학당이 들고나며 지난 시간을 읊어준다. 낡고 오래된 것들은 늘 사람을 품으므로 어미의 숨결인 양 푸근하다. 길이 이처럼 또렷한 역사를 간직하기는 600년 수도 서울에서도 드물다. 그 역사는 정동길과 어울려 한층 풍요롭다. 실상 정동길과 덕수궁 돌담길의 구분은 늘 모호하거나 헛갈린다. 공간의 중첩이다. 정동이 좀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 안에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길이 자리한다. 연인들을 불러내고 지친 이들을 품어준다.
기존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 재정비하고, 보행자를 위해 보도와 차도 공존도로 및 푸르름이 가득한 가로공간인 녹도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길이는 900m이다. 자연친화적인 점토블록 및 보행자의 안전한 보행권 확보를 위해 차도에 석고석 포장(페이빙스톤) 실시하였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느티나무 외 2종 130주 식재, 평의자 20개 설치하였으며 주변의 역사적 시설인 덕수궁과 연계한 역사적 가로 경관의 창출 및 가로환경 개선하였다. 낭만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며, 주변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문화산책 코스로도 제격이다.
◯서울시청 서소문 정동 전망대에서 덕수궁을 한눈에 읽다.
-덕수궁 역사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 고종의 길
'고종의 길'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11일 러시아 대사관으로 거쳐를 옮긴 '아관파천' 당시 이용했던 길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1년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고종의 길'을 복원하자는 취지로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이 구미 공사관 경계벽 영역과 겹치며 그간 한미 협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 한국 가톨릭 수도원 첫자리 (정동 수녀원) 및 구 러시아공관
첫댓글 이길헌교수님 & 현회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