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대전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대전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대전경찰서, 유성경찰서, 대전형무소 등에 며칠 동안 감금되었으며 일부는 바로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장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대전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충남의 여러 지역에서 온 경우였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경부대 근무자에 따르면, 1950년 7월 7일경 헌병대 심용현 중위가 대전형무소에 찾아와 보도연맹원을 비롯하여 여순사건 관련자, 국가보안법위반자, 10년 형 이상의 수형자 등을 인도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7월 1일경부터 경찰의 후퇴시기인 7월 17일경까지 대전시 동구 산내면 낭월동에서 대전경찰서 경찰 및 육군형무소 헌병대, 2사단 헌병대에게 집단희생되었다.
당시 헌병과 경찰은 희생자들을 구덩이 앞에 엎드리게 하고뒤에서 총을 쏘았다. 당시 2사단 5연대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산내면 골령골 사건을 지휘한 자는 헌병대 사령관 송요찬 대령이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희생자 중에는 재소자보다 보도연맹원이 더 많았다고한다.
미군 CIC보고서를 기준으로 보아 형무소 정치범을 제외한 희생자 수는 1,4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형무소사건>
후퇴를 앞둔 국군은 대전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재소자들을 집단학살했다. 대전형무소는 1,200명이 수용 가능했으나 1949년 8월 이미 재소자 수는 3,041명에 달했다.
전쟁 발발 당시에는 4,000명이었고 이중 2,000여 명이 정치범이었다. 전쟁이 발발 한 후 7월 1일에는 연와공장을 개조하여 8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수용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1,800~7,000명은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충남지구CIC, 2사단 헌병대, 경찰에 의해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
첫 번째는 6월 28일부터 30일에 산내면 골령골에서 벌어졌다. 당시 헌병은 처형하듯 재소자들을 총살한 후 50여 명씩 장작더미 위에 올려 화장했는데, 미25사단 CIC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이미 이때 1,4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7월 3일부터 5일의 3일 사이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는데, 9월 23일 미 육군 정보부의 보고문에는 1950년 7월 첫 주 3일간 1,800여 명의 정치범이 학살당했다고 적고 있다.
세 번째는 7월 6일부터 대전전투 직전인 17일일 사이에 벌어졌는데, 희생자는 주로 이감 온 재소자와 충남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었다. 일부나마 이 시기 희생자의 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청주형무소에서 200여 명, 서산경찰서에서 4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이 이송되었다고 하므로 이 시기에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은 최소 600명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수에 대한 증언이 있다. 종군기자 필립 딘(Philip Deane)은 이 시기 희생자의 수가 1,700명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반면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3,700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 세 차례에 걸쳐 저질러진 사건을 종합하면, 이 사건 희생자의 수는 4,900~6,900명에 이름을 알 수 있다. 앞의 위닝턴 기자는 대전형무소를 거쳐 희생된 사람 전체를 7,000명으로 보고 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는 ‘조선정판 위조지폐 사건’ 관련 이관술, 송언필을 비롯하여 여순사건 또는 제주4․3사건 등 시국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시기에도 있었다.
인민군 후퇴 전 대전형무소에는 1,5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이중 500여 명이 1950년 9월 26~27일 집단희생되었다. 같은 시기 충남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도 집단희생사건이 있었는데, 감금되었던 주민 일부가 9월 24일 풀려나기도 했으나 110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이후 학살된 사건이 있었다.
한편, 대전내무서 수감자 50여 명은 9월 27일 학살당했다. 이 외에 용두산 일대에서도 6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데, 이 장소에서는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도 있었으며 미군 폭격에 의한 피해도 있었다고 하므로 증언이 엇갈린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미 24사단의 진격으로 6명(미군 2명, 한국군 1명, 민간인 3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대전은 9월 28일 탈환되었다)
<1 4후퇴시기 피해>
대전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은 1951년에도 있었다.
<미군 폭격 피해>
대전지역에서는 시내에서 미 제24사단과 인민군의 시가전이 치열했던 1950년 7월 20일 오전 9시 대전 외곽에 위치한 대덕군 기성면 봉곡리(현 대전시 봉곡동)와 대덕군 유성면 사기막골(현 대전시 유성구 계산동)에 피난하던 수백 명의 주민들이 정찰기의 비행 후 나타난 전폭기 4대의 공격을 받아 최소 11명이 사망했다.
당시 피난민들은 전투기가 안 보이는 데 있으면 공격을 받는다고 하여 잘 보이는 곳에 나왔으나 전투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기총사격을 가했던 것이었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폭격 전날 인민군이 목격되었다고 하므로 미군은 아군 측이 후퇴한 상태에서 인민군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폭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대전역과 인근지역이 9대의 B-29에 의해 융단폭격을 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발견한 문서에 따르면 대전역이 B-29에 의해 폭격당한 때는 9월 15일이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대전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