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시인의 시집 [바보사막]리뷰
-김주혜
신현정 시인과 나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냥 문학 모임에서 만나 얼굴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한 자리에 앉아 본 적도 없다. 신 시인과 친한 시인에게 가끔 그 분의 근황을 들어 안, 후로는 술자리에서 뵐 때면 안쓰러웠다. ‘술 드시면 안 될 텐데…….’ 그러나 염려와는 달리 술잔을 든 시인의 모습은 얼굴이 발그레하니 천진하고 행복해 보였다.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천진한 얼굴로 술을 마시면 괜찮을 거야.’ 나름대로 안심하고는 시선을 옮긴 것이 전부이다. 신 시인이 [자전거 도둑](2005 애지) 시집을 냈을 때 난 가슴이 아팠다.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만든 영화 이름과 같기 때문이다. 실업자 아버지가 오랜 생활고 끝에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자리를 얻은 후 침대시트를 저당 잡히고 자전거를 찾아 아들을 뒤에 태우고 기쁜 마음으로 거리로 나간 뒤 그만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모른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시집 제목을 [자전거 도둑]으로 했을까? 영화처럼 가슴이 아플까 봐 그 시집은 읽지 않았다. 이번 시집은 그 [자전거 도둑] 이후, 네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만난 신 시인은, 그랬다. 술잔을 들고 행복해 보였던 그 때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보통, 시와 시 쓰는 사람과의 괴리는 있기 마련이고, 또 그것이 관례처럼 여겨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묶여 있는 염소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서 어린애처럼 행복해 하는 그의 모습에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 사막]이라는 제목도 친근하다. 이 시대엔 바보가 너무 없다. 바보가 얼마나 친근한가. 바보처럼 살았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바보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없다. 바보는 천국행 티켓을 따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보가 많은 세상은 천국이요,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바보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이 세상을 떠난 시인들이 옮겨준 행복 바이러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즐겁지 않은가. 시인은 평생 환자입니다. -시인의 말 시인은 평생 환자라고 첫 서두를 내뱉었다. 그 순간 시인은 이미 치유가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삶이란 상처를 주고받는 여행이 아니던가. 크고 작은 삶의 상처가 있는 한 우리는 누구나 다 환자다. 윌리엄 하블리첼은 말한다. -인생을 단 하루처럼 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상처를 먼저 가르친다 ― 고. 그렇다. [바보사막]의 신 시인은 인생을 단 하루처럼 살고 있으므로 그는 환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희망으로 살고, 기다리고 사랑받는 삶보다 상처받지 않는 삶을 위하여 시를 선택하였으리라. 달빛이 밝군요. 아기를 안고 있군요. 이 가을, 밤은 차갑습니다. ........ 당신의 목덜미 속에다 고작 귀뚜라미 몇 마리 집어 넣어드리는 수밖에 그렇게라도 조금의 온기가 돌 수 있다면 울어도 그렇게 우시라고. -석상
참 아름답다. 이렇게 천진할 수가! 성모상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시인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성모상이 울고 있을까? 아니다 시인이 울고 싶은 거다. 귀뚜라미의 체온조차 그리운 거다. 그의 싸늘한 가슴을 성모상이 알아줬으면 하는 기도가 어여쁘다. 이래서 시인은 나이와 상관없는 시간대에 살고, 그래서 해맑은 표정을 간직할 수 있지 않나 싶다. 한밤중, 새로 도배한 벽에 그리마가 나왔다 털복숭이 돈벌레가 슬슬 기는 거 보고 나는 내일 웃을 일이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내 몇 개의 결심은 이렇다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볏을 높다랗게 올린 맨드라미한테 가보는 것과 헛간의 거미집을 구경하는 것과 -굿모닝 시인의 [바보사막]에는 낙타를 비롯해서 새와 악어, 고래, 토끼, 하마, 뻐꾸기, 거미, 굴뚝새, 등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 인생의 마지막장을 장식하는 나이임에도 그가 이처럼 자유롭고 영원한 아이의 감성을 끌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내일 울 일보다 웃을 일을 걱정하는 순진무구함이다. 이는 시인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가 이미 4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가 없는 세계, 일체 공空인 세계, 내(我所有)가 없는 세계, 보편타당한, 영원히 행복한 세계에서 시를 쓰는 일보다 소중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어찌나 푸른지 이런 날엔 괜히 싸움이 걸고 싶어진다. 아 이마의 관자놀이가 다 뻐근해져오는데 무언가 질근질근 씹고 싶거나 한 반 뻥하고 날리고 싶어진다. 거, 하나님 뿔 내려놓으시오 턱 내려놓으시오 투구 내려놓으시오 하늘이 어찌나 푸른지 하나님도 끌어내리고 싶어진다 나 벌써부터 상기됐다 하늘이 어찌나 푸른지 오늘은오늘은 정말로 장수하늘소를 만날 것만 같다. - 장수하늘소를 찾아 모든 순간을 사랑한 신 시인은 지상의 것과 천상의 모든 것까지도 행복으로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신 시인의 천진스런 옹알이는 영원한 삶을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기적 같은 시어들을 펼친다. 하나님을 끌어내려서라도, 장수하늘소의 이름을 빌어서라도 그는 건강하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마치 아픔이 아름다운 휴식인 것처럼 행간마다 삶을 자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선물 같은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해가 진다 황혼이다 갈까마귀 울다 나. 서쪽에서 싸우다 너, 이거나 먹어라 하고 주먹을 팔까지 �어 감자떡을 먹이다. 신발짝을 확 벗어던지다 지팡이를 날리다 여차마면 도로 지팡이를 끌어안고 이제라도 못 본 척 장님 행세라도 하며 가면 그만이다. -서쪽에서 싸우다 이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천년을 내놓으라고 벌떡 일어나시라고 저만치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라고 -와불 그러나 때로는 그도 지상으로 내려와 사막 같은 현실 속을 헤맨다. 열사의 모래 위를 걸으며 어린아이처럼 낙타 등에 올라 마냥 행복하다가도 아픔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 고통스러워 그만 투정을 부린다. 스스로를 부정하면 할수록 현실은 아프기만 하여 결코 꿈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것을 알고는 운명에게 떼를 쓴다. 시인이 ‘서쪽에서 싸우는’ 의도가 무엇일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일까? 동쪽은 온갖 세속의 욕심을 초탈한 정토, 자신의 욕망을 비워냄으로써 초월의 땅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지형의 특질상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아서 모든 오물은 서쪽에서 털어낸다는 속설이 있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장소, 권위에 대해 엇나가는 저항정신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서쪽으로 향한 주인공들이 무수히 많다. 주인공이 물구나무를 선 채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달마와 루이스]의 두 주인공도 서쪽으로 도주한다. ‘천 년을 내놓으라.’고, ‘저만치 한세상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운명이라도 바꿀 기세다. 때로는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신발끈이 또 풀어졌다. 나비로 해서 그런가 다른 것은 없을까 두루미 같은 것은 어떨까 저 청산을 훨훨 가고 있는 두루미로 어찌 안 될까 두루미로 하면 영영 안 풀어질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어디서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네가 불현 듯 나타나더니 야 이놈아 신발끈 풀지 말고 그래 길 위에서 평생 살아라 소리치는 게 아닌가. -길 위에서 끈이 풀린다는 것은 긴장이 '묶인' 상태와 대조되는 지쳐버린 모습이다. 자꾸 풀리는 신발이 시인은 귀찮다. 왠지 무언가가 자꾸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자유롭고 싶다면서 왜 하필 끈이 달린 신발을 고집할까? 실상은 속박이 그리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속박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해탈이 필요하겠느냐’ 는 승찬선사의 말씀처럼 시인은 지쳐있는 그의 삶을 '팽팽한' 상태로 유지시키고 싶은 마음인 게다. 그러나 신발끈은 자꾸 풀어지고, 그 원인을 연약한 나비로 맨 까닭이라고 풀이하고는 두루미 수명으로 대체하려고 할 뿐, 끈 없는 신발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속박의 마음으로 해탈하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첫눈이 깔렸으면 좋겠다. 첫눈이 아니더라도 나 그걸 주먹만하게 뭉쳐 굴려서는 눈사람을 만들 것이로되 이번만은 눈 코 수염을 붙이지도 숯검댕이를 그리지도 않겠으며 아예 얼굴은 생략, 그렇게 하겠으며 담배도 물리지 않겠으며 굴뚝모자도 씌우지 않겠으며 지팡이도 들리지 않겠으며 그저 둥글게 둥글게 만으로 굴리는 것만으로 굴리고 굴리고 세상 끝까지에라도 굴리고 굴리는 것만으로 둥글게만으로 나를 받아주겠니. -화해 애처롭다. 아프다. 둥글게만으로 받아주지 않을 사람이기에 외롭다. 눈사람 같은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은 천사만이 할 수 있다. 모나고 모난 세상사에 온갖 오해와 질시 속에서 인간의 도구로 이용되는 언어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쿵저러쿵 변명과 구실로 손발이 닳도록 이해해주기 바라는 그런 다양한 언어보다 ‘둥굴게’라는, ‘굴리고’라는 언어처럼 처절하게 낮은 자세로 화해를 청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순한]시인은 외롭다. 외롭지만 자연과 한 몸이 되었기에 그는 환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치유시키는 [순한]의사의 역할을 하였다. 의사가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한 알의 쓴 약이 아니다. 자연이다. 자연의 선물 같은 [바보사막]으로 [순한]시인은 오늘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천진한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창작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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