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바라본 성도의 신분과 현실적 상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이것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법조문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일부 어리석은 위선자들은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행위는 죄가 아니라고 어거지를 씁니다. 구원파와 율법폐기론자들이 그런 교묘한 유혹을 하지요. 성도가 원죄의 사함을 받은 이후 짓는 죄들도 죄는 죄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에서 “우리”는 불신자가 아니라 성도들입니다. 성도들도 중생∙회심한 이후 잘잘한 죄들을 계속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래 로버트 쇼의 해설을 통해서 잘 이해하시고 첨부된 성경구절도 다 찾아 읽고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장 5항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이러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요일 1:8, 10; 롬 7:14, 17-1, 823; 약 3:2, 잠 20:9, 전 7:20).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 받고, 극복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는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롬 7:5, 7-8, 25; 갈 5:17). |
이 조항은 거듭난 자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본성의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 조항은 '신자의 완전함'과 관련된 모든 주장을 논박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바울도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름 7:17-21)라고 말했다. 바울이 자신의 감정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말한 것인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우리는 바울이 거듭난 자신의 상태를 비롯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교리는 이 구절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갈등은 참 신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똑같이 언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이 조항은 거듭난 자들의 경우에도 부패한 본성 자체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모든 행위가 엄연한 죄에 해당한다고 진술한다. 죄책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거되고, 죄의 권세가 성령과 은혜로 깨어졌지만 그 본성 자체는 죄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이 조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술가들은 우리가 본성의 부패라고 일컫는 '보편적인 죄의 성향'을 '욕망'(concupiscence)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욕망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며그 자체로는 아무런 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원죄가 세례를 통해 제거된다고 믿지만, 거듭난 자들에게도 이 부패한 성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원죄의 일부가 아니고 아담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자연스런 본성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본래는 아담에게 그런 본성을 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도움이 주어졌지만 죄를 지은 탓에 그런 도움이 그와 그의 후손으로부터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욕망, 또는 정욕을 죄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고 나서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그는 탐심을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pp.96∼97.
첫댓글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완벽한 의인’이 아니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악하고요. 성도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내용입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연약한 존재이기에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개혁주의를 비롯한 정통 복음주의는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칭의(과거)-성화(현재)-영화(미래)의 팽팽한 연속과 긴장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파와 율법폐기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다 끝났다고 착각하며 방심하고 교만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삶을 계속해 나아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현세에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인데요. 구원파 류 이단들의 오해와 달리 성경은 이미 구원받은(과거) 자의 구원(미래)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하며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 영적 각성과 분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롬13:11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13: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장코뱅 정욕을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그냥 넘어가자는 천주교나 아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구원파 모두 이단이 맞습니다.
현대의 구원파와 17세기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행위언약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폐기되었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행위언약의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특히 개혁주의는 행위언약의 일부는 과거로 끝났지만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과거로 끝난 일부는, 쉽게 말해,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유효한 일부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연약한 상태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행위구원론은 어불성설이지만,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성도들에게 의(義)를 전가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의 대표로서 율법을 완벽하고 온전하게 순종하시고, 그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하여 의인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성도는 양심이 살아났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인 상태와 신분은 의인이지만, 현세에서 현실적 상황에서는 여전히 죄악 가운데 노출되어 있고 죄의 영향에서 완전히 열외(列外)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딤전1:18.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순종하며 싸워야 합니다. 딤전1:18∼19은 목사로 안수 받은 디모데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 당부했던 말씀(딤전4:14)을 받은 디모데는 물론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말씀을 받는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9)는 말씀이 신신당부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착한 양심을 버리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의 당부를 우리는 애써 상기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거룩한 형상이 깃든 양심이 살아서 작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의 양심을 단단하게 만드시고 강화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시편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장코뱅 아멘! 공감합니다.
"시1: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1:2 여호와의 율법은, 율법과 복음으로 양분할 때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의인에게 불안은 없고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즐겁기 때문입니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할머니나 엄마의 품에 안겨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무한 배수 이상의 즐거움이 있는 즐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시1:6의 의인인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고 천국에서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자들은 때때로 또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천국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 되는 연단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한 이 세상에서 평안이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경험하며 연단과 훈련을 견디어 나아가며 전진하는 삶(=성도의 견인)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장코뱅 구구절절 공감이 됩니다. o.k.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에는 살인 교사∙궤계를 동원해 간음을 자행한 악랄한 범죄자(다윗)조차도 하나님께서 멸시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회는 형식적인 대표기도나 목회기도를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찐(眞)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통회하는 자가 착해서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66:2의 마음이 가난한 것은 마5:3~10의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연결됩니다. 사66:2은 지고지순하고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이며 비현실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마5:3~10절을 해석하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마5:10의 박해를 받은 자 마5:8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완벽한 무균실(無菌室) 안에 있는 사람, 절대적 보호를 받는 온실 속의 화초, 깨끗한 이슬만 먹고 사는 아기 사슴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점진적 성화는 가능해도 완전 성화는 불가능한 것을 유추하면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는 절대적 의인이 아니라, 이신칭의(以信稱義)로 의롭게 된 의인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상태에서 죄를 지었지만 진심으로 회개하고 심령으로 통회(痛悔, contrite)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통회하는 자는 믿는다고 입으로만 나발을 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사66:2)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으로 통회하고(contrite in spirit)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지 않고 존중하며 순종하고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얼핏 소극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적극적으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 믿음을 증명합니다.
@장코뱅 오늘도 진심으로 화개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웨민의 네임밸류와 로버트 쇼 목사님의 좋은 해설을 통해서 큰 은혜와 바른 지식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문과 댓글까지 잘 보았습니다. 모두 유익하고, 복음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 같습니다.
인간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더라도 지금 당장 하늘나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여전히 육체의 욕구들을 가진 채 살아야 하고, 인간의 정체성을 특징지우는 영혼이 활동을 하면서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살아야 할 인생의 시간을 각자가 잘 보낼 수도, 잘못 보낼 수도 있는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거듭난 것은 인생의 시작일 뿐이고, 육체의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각자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긴 흔적들을 나이테와 같이 가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최후 심판대 앞에 서서 공과를 가리게 될 것입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이 이것을 잘 알면 좋겠습니다.
적절한 요약과 좋은 분별을 제공해 주셔서 매우 공감하고 감사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