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접는다. 종이만 보면 큰 것은 여러 칸이 되도록 잘 접어두고 그 속에 넣을 돈을 잘라 볼록하게 넣으면 밖으로 나간다. 친구들을 모아서 소꿉놀이가 시작된다. 지갑을 가졌으니 위세가 대단하다. 되고 싶으면 엄마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종이돈의 힘이다.
돌맹이를 모아놓고 과일 장수도 되고 풀을 뽑아 야채 장수도 된다. 흙을 긁어모아 채에 치면 쌀, 조금 거칠 거리면 보리쌀, 놀이는 확장할수록, 이름만 다르게 부치면 된다. 돈은 무궁무진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조폐공사다. 종이가 떨어지면 돈을 더 잘게 자르면 된다. 소꿉장난하는 어린 마음에도 부자가 좋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돈이 쓸모가 없다.
P국의 국경수비대로 횡설수설 하는 한국인이 찾아왔다. 본인 이름도 모르고 차림새는 남루했다. N국과 P국의 국경이다. 며칠 동안 안정을 시킨 후 기억을 기록하게 했다. 매일 조금씩 기록한 메모가 이야기로 엮였다. 작가의 상상력은 비범한 픽션을 만든다.
일행은 여행지에서 만났다. 각자 따로 여행을, 했지만 다시 만나면 친근해진다. 그렇게 마음이 통하면 동행을 하게 된다. 시장기를 느끼자 그들은 식당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풍성한 진열장이 있는 시장으로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지만 사서 먹을 수 없었다.
돈의 쓸모가 없는 시장이라니? 그들은 어떻게 음식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 환전소에 가서 기억을 팔고 물고기 비늘과 바꾼다. 어릴 적 기억부터 팔기도 한다며 환전상이 조언까지 해 준다. 어린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그 아이들이 잡은 고기 비늘만 통용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고기를 커다란 물통에 담아 환전소로 왔다. 환전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물고기를 끓는 기름 솥에 넣으니 비늘이 뒤로 세워졌다. 환전상은 그것을 훑어 담아준다.
팔목에 자해한 자국이 세 줄 있는 여자 친구가 그것을 팔고 비늘 한 주머니를 받아 들고 식당으로 가서 일행들과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었다. 그들은 또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뿔뿔이 흩어졌다. 친구에게 한웅큼 집어 주기도 했다. 비늘이 떨어지면 다시 환전소로 뛰어간다.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은 친구는 그 기억을 팔기 위해 환전소에 가서 이마에 기름을 바르고 그만큼의 기억을 팔고 값으로 비늘을 자루에 가득 담아 나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기억을 팔았고, 나쁜 기억부터 팔기 시작하여 흥청이며 썻다. 향락을 즐긴 일행 중에는 추억을 모두 팔아버려 자기가 누군지 몰라 몽롱해진 멍충이가 되어있었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시장이 번창하다가 만월이 기울면 사라졌다. 한 달에 한 번, 단 하루만 열리는 시장이다. 김성중의 소설 이야기다.
내 삶과 연계하여 생각해 본다. 무슨 기억부터 팔게 될까? 부끄럽고 참기 어려웠던 순간들이 튀어나온다. 신혼 때 일이었다. 시어머니 앞에서 “여보 밥상 들여가게 문 좀 열어줘요.” 결혼 첫날 배웠던 그 말 “여보”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어머니는 평생 한 번도 입에 올려보지 못한 호칭! 놀라 바라보던 모습이 정지화면이 되어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주워 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멈췄다. 부끄러웠다. 그 기억을 팔까. 그럴 수는 없다. 신혼의 추억이다.
아이가 울면 어쩌지 못해 어미도 같이 울고 있었다. 통금은 되었고 울음 강도는 더 크고 높아졌다. 우리는 아이를 안고 병원 문을 두드렸다. 의사 선생님이 관장을 시켜주니 새록새록 잠이 들었다. 서툰 어미였다. 지우기는 아깝다.
거울도 보기 싫었다. 달력도 걸지 않았다. 아들, 딸이 서로 순번을 정해 교대로 걱정을 보냈다. 불면증까지 왔다. 무협지를 몇 권씩 계속 빌려온 아들이다. 어느 날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반찬이 맛있다고 말하고 김치를 얻어왔다.
“엄마 00집에서 김치 얻어다 냉장고에 넣어 뒀으니 식사하세요.”라고 말하며 학교로 갔다. 딸은 학업보다 어미 챙기기에 전념했다. 나약함이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살았다. 고난 극복이라 잊을 수 없다. 상처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받는다.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 모든 순간들을 극복하고 이겨냈기에 지금이 있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과격한 행동으로 가기 쉽다. 삶을 포기할 순간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보름달이 뜨면 팔고 싶은 기억 보따리를 들고나와 달빛을 행해 훌훌 털어 버리자. 그리고 국경시장을 가는 길목을 막아서자. 욕망을 제어하고 기억을 지키라고 적극 말려보자. 고통도 모두 지혜의 보고니까. 품고 가자. 위로도 자식이 준다. 맛있는 음식을 사 주며 옛날이야기로 웃는다.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추억들로 가족들은 모든 역경을 헤쳐나간다.
첫댓글 국경 시장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