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영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기사를 읽고는
혹시....하며 몇몇 사이트를 찾아보니, 역시 "부용산"에 관한 이야기도 같이 올라와 있군요.
시대의 양심이 하나 둘....사라지고,
그 분들의 떠난 뒷자리에 남겨진 우리의 가슴은 너무나 허황하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곁들여 올린 노래는 송영 선생 생전에 문인들과 모이는 좌석에서 이 노래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1947년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기동 씨는....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당시 같은 학교에 음악 교사로 재직했었던....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인 안성현이 나중에 곡을 붙였다고 하구요.
이 노래는 해방과 전쟁 이후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 됐지만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한데다
당시 빨치산이 즐겨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시를 지었던 김기동 시인....
곡을 붙였던 안성현 작곡가....
구슬프게 이 노래를 부르셨던 송영 작가....
다들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만,
이 노래는 영원히 기억되고 불러질 것입니다.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詩 / 박기동, 作曲 / 안성현....>
부용산에서, 보성 벌교/ 나천수....
보성 벌교 땅 부용산에는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박기성씨의 누이가 누워있다고 하여
길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더니
누워있어야 할 누이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부용산 등산로 입구에
詩碑로 서있구나
1947년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 산허리에 파묻고 되돌아서는
오빠의 발목 부여잡고
홀 남겨두고 가지마란 듯이
산새도 슬피 울었다
살점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다고
恨의 피눈물 쏟아내면서
詩 한 구절 부용산 잔디에 써놓고
누이를 잊은 지 어언 60여년의 세월
부용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은
그때나 지금이나 햇살만 반짝이고 있다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영화필름처럼 돌아가는 동안에
그 시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빨치산이 즐겨 부르는
榮辱의 세월 보낸 지금
누이도 시도 노래도
부용산에 산허리에서 부활하여
세상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 왔다
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용산 노래를
차마 큰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좌우 이념의 강물이 흐르는
강 언덕 저편에서
입술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소리로
부용산 산허리의 잔디만 푸르다고
고장 난 축음기가 반복하듯
내뱉었을 수밖에 없었으니
부용산 산허리는
사람 사는 동네와 접해있어서
마음 답답할 때
바람 쏘이러 가는 언덕배기이다
마치 골고다 언덕처럼
꼭 그 자리 만큼에
예수님의 십자가 서 있듯
부용산 詩碑가 있어서
사람들이 詩碑를 보러 가는지
부용산 누이를 보러 가는지
아니면 恨의 상징인 詩碑가
멀리 여자만 남해바다를 응시하는지
부용산 오리길 산허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 알 것 같다....< 2004년 2월12일 벌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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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누리당이랑 청와대는 최순실 게이트, 우병우 의혹 물타기 하느라고
종북몰이를 또 해대기 시작하네요....ㅠ.ㅠ
이념이고 사상이고 간에 나라 국민들이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말입니다.
고마워요, 진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