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4
미국이 지난달 27일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공개했다. 2018년 NPR처럼 이번에도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사용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없다”고 경고했다.
정말 그럴까.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쓰고도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이냐에 달렸다. 그 대가는 핵무기의 규모·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이 “동맹국 방어를 위해 핵과 재래식 무기, 미사일 방어 등 군사 능력을 최대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신중한 표현은 미국이 북한의 핵 공격에 반드시 핵 역량으로 대응하진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북한이 미국의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면 미국은 핵으로 응징하겠지만, 요격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핵으로 응징할까, 아니면 엄청난 재래식 무기로 노동당 본부를 공격할까. 또 북한이 전술 핵무기로 미국이나 한국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까. 미국은 괌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응징할 것이고, 전략 핵무기로 상황을 고조시킬 가능성은 작다.
▲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7일 노동당 중앙간부학교를 찾아 당 간부들 앞에서 얘기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은 지난달 18일 김정은이 간부학교에서 '새시대 우리 당건설방향과 조선노동당 중앙간부학교의 임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고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연합뉴스
이런 미국의 대응으로 북한 정권이 붕괴할까. 북한에는 고도화된 현대 무기에도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지하 벙커가 있다.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와 핵탄두를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핵 공격을 감행하고도 벙커로 들어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하벙커는 핵무기나 강력한 재래식 무기 공격에 파괴될 수도 있다. 얼마나 깊이, 강고하게 만들었는지가 관건인데 CIA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 땅을 한국과 미군이 장악해도 김정은 충성파가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은 분쟁 종식이 아닌,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의 지루한 전쟁을 의미한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9월 제정한 핵 무력 정책 법령에서 북한은 군 사령 체계가 위험에 처하면 선제 핵 공격이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우발적 핵무기 사용 위험성은 커졌다. 의도적 사용 가능성도 존재한다. 북한은 한국을 공격한 뒤 미국이 개입하면 전략 핵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북한 정권의 성격상, 정권 붕괴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면 파국임을 알면서도 핵무기를 쓰고 장렬히 사라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지상 과제는 정권 생존이라고들 하지만 극단 상황에선 자멸적·비합리적 결정도 가능하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여부는 미국의 실제 행동보다 북한이 미국의 행동을 어떻게 예측·판단하느냐에 달렸다. 냉전 핵 경쟁 시대 심리전과 같다. 핵을 쏜 뒤 한·미의 대응으로 정권이 괴멸할 것으로 판단하면 북한은 핵을 쉽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정책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나 미국을 경험한 적 없는 소수의 늙은 남성들이 결정한다. 미국인은 멍청한 겁쟁이라고 믿는 북한 고위층은 핵 공격을 해도 미국이 겁을 먹고 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의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최고 지도자의 의견에 맞서지 않을 것이고, 핵 공격 이후의 대가를 아는 군사 전문가도 김정은의 뜻을 거스르진 못한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져 온 북한의 재래식 미사일은 최근 저수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화했다. 한·미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뚫고 심각한 피해를 줄 것이다. 미 정부는 NPR에서 “북한은 핵이 아닌 다른 전략적 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 미국의 핵무기는 이런 공격 억제에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처럼, 미국 역시 북한의 비핵 공격에 핵무기로 맞설 수 있다는 경고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작지만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며, NPR 주장과 달리 핵을 쓰고도 북한 정권은 괴멸되지 않은 채 끝까지 반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정권을 더 위협하는 게 있다. 간부들의 충성심 균열이다. 지난달 17일 노동당 간부학교에서 김정은은 “반사회주의 및 비사회주의적 현상들” “기회주의적 반혁명적 사상 경향들” “비조직·무규율·부정적 요소들”을 지적하며 놀랍게도 노동당이 “인민의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안감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한·미에 의한 축출보다 주민에 의한 정권 붕괴를 김정은은 더 걱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의 핵무기 사용 여부에 대한 답은 못 얻겠지만, 그 자체로 좋은 일 아닌가.
존 에버라드 /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