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고주희 ∣ 파란시선 0045 ∣ B6(128×208) ∣ 168쪽 ∣ 2019년 11월 18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신간 소개
그곳이 지옥이라 한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고주희의 첫 시집은 ‘당신을 앓는 나’가 가학적인 치유의 역설을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쓴, 상실의 체험에 관한 섬세한 심리 진술서의 성격을 지닌다. 병증의 언어를 시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어떤 형태로든 미학적 지향성을 내포하며, 고통에 대한 미적 거리감은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의 거리감으로 변주된다. 그런데 고주희의 작업은 통상 시가 병증의 언어들을 흡수하는 내면화와 승화의 방식과는 다른 경로를 걷는다. 고주희는 가능한 깊이, 최대한 충실하게 앓기를 원하는 듯하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쓰라린 탐닉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주희의 시에서 ‘나’가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고통의 기원인 당신을 대하는 자세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상실한 고통을 앓는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데, 나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나의 의지로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고통은 나의 것임에도, 그 중심은 나의 의지와 능력이 닿지 않는 외부에 있다(또한 나의 내부에 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당신을 상실한 고통을 계속 앓는 일과 일치한다. 당신이 없는 지금-여기는, 사랑의 윤리와 고통의 윤리가 일치하는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장소다. 나는 상실을 메우기 위해 ‘당신’을 다른 누구로 대체하지 않는다/못한다. 처음부터,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당신은 유일하며, 당신의 유일성은 절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다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나에게 애도는 상실을 처리하는 생존의 기술을 넘어, 상실의 텅 빈 시간에도 당신을 계속 사랑하는 능력이며,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의 주체’로 살아가려는 윤리적인 의지이자 실천이다. 흠 없는 완전한 애도가 애도를 끝내고 망각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변함없는 온전한 애도는 애도의 원천인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온전한 애도에서 기억은 애도의 목적이 아니라 사랑의 부산물이다.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완전하다’는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어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다”를, ‘온전하다’는 “변화되지 않고 본바탕대로 고스란하다”를 의미한다. 고주희의 애도는 후자에 속하는데, 온전한 애도-사랑의 한 사례를 고주희는 성경의 욥기를 재구성한 여성 작가의 소설을 참조해 이렇게 기록한다. “천 번의 태풍을 맞이하며 몸속에 기꺼이 아비와 아들을 새긴/그녀는 생존자였다”(「욥의 아내」). 아무런 죄 없이 신이 내린 수난에 처한 ‘그녀’는 사랑하는-잃어버린 이들을 온몸에 고통스럽게 새기며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상실을 처리함으로써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사랑을 계속함으로써였다.”(이상 김수이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고주희 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5년 <시와 표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은 고주희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추천사
우리는 그녀를 산책자라고 부르자. 해변을 걸으면서 “조개껍데기의 상처”(「협재」)를 줍는 사람. 밤의 길 위에서 “고요히 끓고 있는 어둠”(「오래된 악서」)과 “뒷모습에 실패한 나무들”(「뒷모습의 세계」)을 만나고, “갸륵한 손뼉을 치”(「라 폴리아」)는 문장들의 소리를 듣는 사람.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숲으로 가는 놀이”(「불가능한 실비아」)를 떠나는 사람, 사냥개에게 얼굴을 뜯기게 될지라도 끝내 매일의 미행을 떠날 사람.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그녀를 히치하이커라고 부르자. 비밀들의 우연한 기습을 예감하며 “유폐된 주소만 찾아 떠나는”(「그림자 몰이」) 사람. 어떤 응답도 없이 “진통제를 토해 놓는 밤”(「프리다와 사슴」)이 지나가 버리더라도, “동공에 맺힌 서로의 폭풍을 마주”(「저물녘의 일」)하는 시간을 향하여 다시 몸을 일으키는 사람. “시력을 잃으면 노래”(「레몬 중독자」)가 올 것이라며, 밤의 눈보라 속으로 “별을 몰고 유유히 체크아웃”(「미미」)하는 사람.
그녀는 길들지 않는 세계 속에서 “깨진 진공관 앰프처럼”(「산책의 조건」) 불안하면서도, 끝내 “빗물에 씻긴 돌의 표정”(「폭풍 속으로」)으로 빈 들판의 폭풍 앞에 서 있을 사람. 그녀를 고요한 생존자라고 부르자. 그녀가 걸어온 길의 이곳과 저곳에서 소리 없는 비명과 무표정한 아름다움이 얼음처럼 반짝인다. 그곳이 지옥이라 한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노춘기(시인)
시인의 말
음악 속에서 우리는
잠시 떨리는 악기일 뿐
눈물 너머, 약간의 천국이 있기를
저자 약력
고주희
제주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5년 <시와 표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베르주 화요일 - 11
미미 - 13
스테이크 - 14
레몬 중독자 - 16
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 - 18
뒷모습의 세계 - 20
생강빵 박물관 - 22
짧았던 봄 - 24
밤의 화장실에서 - 26
라 폴리아 - 28
욥의 아내 - 30
하몬 - 32
나의 누드 속 와인 - 34
대마젤란성운 - 36
블루 마가리타 - 38
오래된 악서(樂書) - 40
제2부
프리다와 사슴 - 45
버드 스트라이크 - 48
저물녘의 일 - 50
협재 - 52
자정의 새 – 54
록산느 - 56
불가능한 실비아 - 58
블랙아웃 - 61
그루그루 - 62
자동문 바깥 풍경 - 64
벌레 먹은 장미 - 66
캐비닛 - 68
모래시계 - 70
찻잔, 그리고 웅덩이 - 72
그림자 몰이 - 74
울거나 노래했거나 - 76
제3부
산책의 조건 - 81
기억들 - 83
문스트럭 - 85
현기증 - 87
스팅 - 89
Night Passage - 91
봄밤 - 93
모데라토 칸타빌레 - 95
피에타 - 97
갈라테아 - 99
백일홍 경야(經夜) - 101
정오의 팽나무 - 103
지슬 – 105
확장되는 백야 - 107
공평한 기도 - 109
태풍이 혀를 맛볼 때 - 111
제4부
비둘기의 바깥 - 115
블러드 오렌지 - 116
최초의 세드나 - 118
히스 - 120
비자나무가 사라진 밤 - 122
함덕, 829 - 124
믿을 수 없는 목련 - 126
이녹 아든 - 128
아일랜드 일기 - 130
글루미 선데이 - 132
러닝메이트 - 134
이모의 방 - 136
로즈메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 138
속눈썹의 오후 - 140
검은 저녁의 우화 - 142
극지 - 144
폭풍 속으로 - 146
리뫼르 - 148
해설 김수이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랑은 어떤 일을 하는가’로 대답하기 – 150
시집 속의 시 세 편
대마젤란성운
온 방향이 허물어져 캄캄한 날
냉장육 가공 트럭 눈보라 속을 지난다
절단 난 하늘에선 잿빛 폭발음
낮의 소용돌이는 알 수 없어
밤에는 손깍지투성이니
바퀴는 구르고 또 굴러 무중력일까
노래는 새로울 것 없고 심장은 너무 멀구나
기능을 멈춘 냉장고 모터 밖으로
이름도 없이 추락하는 무수한 냉기들
고작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
앞바람과 뒷바람 사이에 낀 갈매기처럼
사력을 다해 제자리일 때
무참히도 아름다워
빛을 숨기며 한곳을 맴도는 사제 폭탄
차오른 숨결로 팽창하는 날개와 가스통 사이
받으나 마나 한 꽃다발을 들고
끝내 피가 돌지 않는 발끝으로 턴,
주먹을 쥐었다 펴면 전류가 흐른다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반대편 자정에 뜬 별들
어디를 건드려도 폭발할 거야 ***
생강빵 박물관
여섯 겹의 밤을 굽자
부풀어 오르는 입꼬리가 생겼다
새카맣게 타 버리기 전
언젠가 맡았던 냄새, 먹구름이 쏟아지고
이내 문 닫은 상점처럼 어두워지는 버릇
폴카를 추는 아이가 늑대로 변해 가는 동안
저민 사과와 젖은 눈꺼풀 녹아내리고
단 한 조각만으로도 부활하는
검은 연대의 노래
밀봉된 편지를 뜯으면
악필을 뒤집어쓴 겨울이 오고
얼룩을 겨우 읽어 낼 때쯤 부스러기가 되는 일
몇 억 광년의 밤을 뒤척여야
앓지 않을까 당신을
얼얼한 생육의 감각을 잃고
뿌리가 몸이던 계절의 이름으로 나는
내지를 수 없는 비명이 되네
오후의 진열대로 몰려오는 입술들
굳어 버린 반죽처럼 심장은
구석의 일이 되어 가네 ***
프리다와 사슴
내가 키우는 사슴이야, 볼래?
이제 시작될 고통이야 작은 사슴은 작게 아플 거야
발작 전의 전조 증상 천 살이 넘는 폭력으로 마비된 입술
나는 너무 자주이고 나를 제일 잘 그리고
마지막 전차가 지나면 어쩔 수 없는 사슴들 나동그라지고 병상은 앵무새와 원숭이들 차지지
침대 밖으로 뻗어 나간 붉은 달리아 꽃잎들 절창이다 자궁근 뚫고 나온 비명들 손모가지째 똑똑 떨어지는 2억 년 전 개화, 벵듸에서 부는 바람은 모래 반 눈물 반
뿌리 없는 것들은 눈동자를 아프게 해 내전의 도미노 속 끝나지 않을 기아
청동거울 속 얼굴은 반대편으로만 향하지 이젤의 오른 다리 절룩이며 계절을 끌고 와 하얀 캔버스에 밤을 걸지 영원히 반대편으로 자라날 자식들이란
한쪽 굽만 자꾸 높아지는 침대를 보았나요?
화구들 있는 대로 펼쳐 놓고 수염을 그리고 입술을 오려요
벨벳처럼 보드라운 풀들이 두 발을 파랗게 감싸고
뿌리도 없는 것들 초현실적으로 아파 오면
더 붉어지는 꽃들
눈물 쏟아지는 날 망명을 꿈꿔요
심장은 이제 아무나 다녀가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가시 목걸이에 걸린 벌새만이 나를 견뎌요 셀 수 없을 만큼의 날갯짓을 셀 수 없이……
하반신은 눈물을 마비시키죠
베개 밑에 놓여 있는 얌전한 총
장전된 꿈이 자화상을 비껴갈 때
총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코끼리와 비둘기 다시 손잡을 수 있을까요?
온몸에 못이 날아와 박혀도 끝나지 않을 혁명
몇 번 찔렸을 뿐인데 폐렴이 겹쳐요 질질 끌려가는 침대들
구원해 줘요, 낳아 줘요, 놓아 줘요
진통제를 토해 놓는 밤
고통은 질투에 관대해 목에 총구를 겨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애인들은
강철 코르셋으로 간신히 버티던 침묵들
갔던 봄 갔던 여름 갔던 가을인데
아랫도리를 뚫고 허벅지를 관통한 아들과 딸들은 왜 돌아오지를 않니?
아홉 개의 화살이 명중한 나의 사슴
프리다, 너를 만난 건 사. 고. 였. 어. ***